2018. 8. 17.
신앙이나 이념은 훌륭할 수 있다. 그거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앙에 대한 관용(tolerance)을 갖추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신념은 삶을 풍요롭고 기쁘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 이념의 도구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다. 빛나야 할 것은 신앙이나 이념이 아니다. 정말 빛나야 할 것은 자연이 준 본성과 욕망을 긍정적으로 표출하고 실현하면서 영위하는 기쁜 삶이다.
- 유시민 지음. 『어떻게 살 것인가 275쪽』
학교에 근무하면 자연인인 개인으로서는 만날 수 없는 유명 인사들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가끔씩 가지게 된다. 능인고등학교 ‘저자와의 만남’ 프로그램에서 만나게 된 홍세화 작가도 그중 한 사람이다. 홍세화 작가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 후 무역회사에 재직하던 중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에서 20년간 망명생활을 하였다. 프랑스에서의 택시기사 생활 경험과 당대의 문제들에 대한 담론을 담아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1995년작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감명 깊게 읽었기 때문에 만사를 제쳐두고 시청각실에서 강의를 들었다. 담임을 맡은 학생들에게도 작가를 소개했더니 고3임에도 불구하고 몇몇의 학생들은 나를 따라 시청각실로 내려갔다. 강의를 들으면서 감명 깊은 내용을 메모해서 어딘가에 두었는데 수년이 지난 지금 아무리 찾아도 자료가 없다.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그때그때 느낌을 반드시 기록해 두어야겠다. 아직도 기억나는 한 가지는 ‘똘레랑스를 제한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허하라’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관점에 따라 시비와 호불호가 결정된다. 누구나 관점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관점만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똘레랑스는 불가능해진다.
영국의 심리학자 피터 웨이슨 (Peter Wason)이 1960년에 제시한 확증 편향 즉,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에 우리는 너무 쉽게 빠진다. 요즘 ‘정보의 바다’중 모든 콘텐츠를 흡수하고 있어 ‘갓튜브’로 불리는 유튜브는 나의 검색을 인식했다가 같은 종류의 정보를 맨 앞에 위치시킨다. 확증 편향을 부추긴다. 나와 다른 생각을 단지 ‘다름’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틀림’으로 판단 내리는 순간 내 마음속엔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확증 편향을 통한 편견(bias)은 강화되어, 상대는 타도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황희가 공무에 잠깐 짬을 내어 집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집의 여종이 서로 시끄럽게 싸우다가 잠시 뒤 한 여종이 와서 “아무개가 저와 다투다가 이러이러한 못된 짓을 하였으니 아주 간악한 년입니다.”라고 일러바쳤다. 그러자 황희는 “네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또 다른 여종이 와서 꼭 같은 말을 하니 황희는 또 “네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마침 황희의 조카가 옆에 있다가 화가 나서는 “아저씨 판단이 너무 흐릿하십니다. 아무개는 이러하고 다른 아무개는 저러하니 이 아무개가 옳고 저 아무개가 그릅니다.”하며 나서자 황희는 다시 또 “네 말도 옳다.”라고 하며 독서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위의 일화와 같이 조선의 최장수 정승인 황희의 일화는 관용과 관련된 것이 많다. 얼핏 보기에 황희의 태도는 주관이 없고 그저 남의 주장에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거기에는 ‘역지사지’와 ‘공감’에 대한 깊은 이해가 깃들어 있다. 관용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경쟁’과 ‘권모술수’가 팽배해 있는 정치계에서 20여 년 이상 재상직에 머물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할 때 원효의 화쟁(和爭)을 많이 이야기한다. 대립과 갈등을 풀어 화합을 이루는 화쟁의 기본 원칙은 역시 역지사지이다. 부처가 해탈했다고 하는 것은 삼독(三毒) 즉 탐진치(貪瞋痴)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독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다. 삼독 가운데 어리석음을 의미하는 치(痴)는 ‘내가 있다’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나를 중심으로 놓고 모든 것을 바라보면 상대는 보이지 않는다. 연기(緣起)에 대한 무지가 치(痴)이며 이 무지에서 아상(我相)이 생긴다. 연기(緣起)를 알면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님을 알게 되고 나는 오로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알게 되며, ‘덕분에’를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다. 그때서야 역지사지가 가능하고 똘레랑스가 가능하다.
대단히 곤궁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티베트 불교신자들에게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이 세계평화라고 답한다. 거저 내뱉는 말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과 가치관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말이다. 숭고함 마저 느껴진다. 티베트불교 수행법 중 자비심을 강화시키는 수행법인 자타상환법, 즉 나와 남을 바꿔보기를 오랫동안 수행하면, 처음 원수를 보면 불쾌하고 화가 나지만 나중에는 ‘저 원수는 참 어떻게 됐나 염려스럽다.’로 바뀐다고 한다. 중국에 감금되어 오랫동안 고통을 받으면서 풀려나기를 반복했던 티베트의 어느 종교 지도자가 한 번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번에는 정말 위험했습니다. 하마터면 중국인들을 미워할 뻔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늘 누군가를 비판할 때 세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첫째, 비판하는 대상이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둘째, 비판하려는 대상에 대한 다양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셋째, 역지사지의 자세에서 비판하려는 대상이 그것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만약에 이 세 가지가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 하는 비판은 십중팔구 ‘비난’이 될 가능성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