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08
공기처럼 주변에 있어서 고마움을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어머니가 그렇고 아내가 그렇다. 매일 아침마다 차를 끓여 주는 직장동료도 그중 하나다. 제일 먼저 학교에 도착한 그가 정성스럽게 끓인 차를 아침마다 마신다. 끓인 게 아니라 다렸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이름만 들어도 몸에 좋을 것 같은 온갖 재료들, 오가피, 음나무, 보이차, 철관음, 계피, 감초, 우엉, 대추, 비트, 결명자, 구기자, 오미자 등이 그때그때 다르게 결합되어 다려진다. ‘차 한잔 하세요’라는 탱주의 권유에, 때로는 주인 몰래 살금살금 찻잔 한가득 차를 따라온다. 하루가 즐겁다. 잠이 들깬 몸에 활력이 솟는다.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차’라고 쓰고 ‘고마움’, ‘건강’이라고 부른다.
며칠 전 고3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받지를 못했다. 선생님의 칠순을 맞아 포항으로 찾아뵌 후 벌써 몇 년이 흘렀다. 선생님이 먼저 전화를 하는 경우는 잘 없던 터라 갑자기 불안한 마음도 들고 해서 바로 전화를 드렸다. 내용인 즉 사모님이 죽도시장에 갔다가 갈치가 너무 좋아 나를 주기 위해 몇 마리 샀는데, 포항-대구 간 고속도로 편에 부칠 테니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옛 드라마 속 장면을 말했다. 여름방학 때 자식들을 자신의 담임 선생님이 계시는 시골에 보내 며칠을 머물게 하는 내용이었는데, 참 부러웠다고 이야기했다. 감사함을 표하고 싶은 사람이 주위에 많을수록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을 많이 만들라고 ‘훈화’했다.
교직생활 27년째다. 명절 때가 되면 잊지 않고 성의를 표하는 제자들이 있다. 늘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면서도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나도 명절이면 고3 담임선생님을 포함한 몇 분들에게 성의를 표한다. 내가 기분이 좋듯이 그분들도 기분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선물을 보낸다.
요즘엔 학생들에게 음료수 한 잔을 얻어먹어도 김영란법에 위배되어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음료수를 사 줄 수도 없다. 교원능력개발평가에서 학생들의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사준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주고받을 것이 없기 때문에 서로 편하다고 자조하기엔 상황이 너무 서글프다. 청렴의 강조가 정(情)의 미풍양속을 근절시켜서는 안 된다.
‘선생님은 우리들을 가르치면서 월급을 받잖아. 당연히 본인이 하실 일을 하신 거야. 그렇게 까지 성의를 표할 일이 뭐 있어’라고 말하면서 일 년에 두세 번씩 학창 시절 선생님에게 성의를 표하는 나를 의아하게 여기는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감사하는 마음을 내는 것은 결국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것은 결국 나를 기쁘게 만든다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이 대인관계력의 기저가 되는 전전두피질을 활성화시키고 편도체를 안정화시켜 나의 마음근력을 키워준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누군가에게 감사한다는 건 첫째, 내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이 나한테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자기긍정’의 요소가 있고 둘째, 내게 일어난 그 좋은 일이 다른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는 ‘타인긍정’의 요소가 있다.” - 김주환 저 ‘그릿’ 중
부처님은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부처가 깨달은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연기(緣起)인 것이다. 연기를 제대로 알면 대립과 갈등은 사라지고 감사와 화합이 저절로 일어나게 된다.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 때문이라면 어찌 그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어찌 그것들을 자비심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학생들에게 손가락 자랑 콘테스트 이야기를 자주 해 준다. 어느 날 손가락 다섯 개가 서로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 났다고 자랑을 하고 있었다. 엄지 손가락이 말한다. ‘얘들아, 세상에서 최고를 이야기할 때 어느 손가락을 사용하지. 바로 나야. 좋은 것, 뛰어난 것을 이야기할 때 항상 나를 사용하니 내가 세상에서 최고가 아닐까?’ 검지가 앞으로 나와 끼어든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아니?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렇게 노래했지.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내가 가리키지. 내가 없으면 아무리 비싼 것도 지칭될 수가 없어. 그래서 내가 최고지.’ 잠자코 듣고 있던 중지가 네 개의 손가락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리고 한 마디 한다. ‘조그만 것들이 까불고 있어.’ 이에 질세라 약지는 이렇게 묻는다. ‘얘들아 세상에 제일 비싼 것은 무엇이니? 다이아몬드잖아. 그것을 어느 손가락에 끼니? 바로 나야.’ 자신의 장점을 찾으려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찾을 수가 없자 새끼손가락은 고개를 숙이고 슬그머니 자리를 떠난다. 그때서야 나머지 손가락들은 자신의 손이 장애가 있는 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후회를 한다.
세상에 의미 없는 것들은 없다. 모두가 다 존재 이유가 있고 소중하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에게 무한히 감사해야 한다. 그들이 있기에 자신이 공부를 잘한다고 주위의 칭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공부를 잘하면 돋보일 수가 없다. 누군가는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연이 없는 주연은 있을 수가 없다. 주연은 조연에게 늘 밥을 사주어야 한다. 조연에게 감사해야 한다.
‘명절에 성의를 표하고 싶은 사람이 한 사람인 것보다는 열 사람인 것이 10배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에 보인 중1 학생의 반응은 ‘그러면 돈이 10배로 많이 드는데요’이다. 아직은 감사함을 표하고 싶은 사람이 주위에 많을수록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