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조직사이, 다시 배운 HR(#1)

#1. 이론만 아는 사기꾼이 두려워 퇴사한 어느 컨설턴트의 고백

by 사람과조직사이

컨설턴트로서 혼자서 꽤 큰 규모 프로젝트까지 해낼 수 있을 때였다.

고객과의 미팅에서는 연차와 상관없이 늘 똑같은 문장이 나왔다.


“이 방향이 지금 상황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적합한 솔루션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회의실 문이 닫힌 뒤에 나 혼자만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인하우스 경험도 없는 내가 이 제도가 ‘적절하다’, ‘적합하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과연 이게 고객에게 진짜 좋은 솔루션일까?”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제도를 설계하고, 실행 방안을 제안하는 일이

컨설턴트로서의 내 일이었다.
보고서의 논리, 슬라이드의 구조, 워크숍 운영도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졌다.


그런데 정작 한 가지가 점점 낯설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내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퀄리티가 따라오고 있나?”


나는 이 일을 정말 좋아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고,
더 좋은 컨설턴트가 되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만든 제도와 솔루션이 고객사의 ‘현실’에서 잘 작동하지 않는 모습을 마주하고 나서는,

스스로에게 이런 말까지 하게 됐다.


“운영에 특화된 고객 입장에서 보면,
인하우스 경험 하나 없는 나는
어쩌면 사기꾼처럼 보일 수도 있겠는데…”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이 싫어져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에 비해 내가 해내고 있는 것이 부족하다고 느껴져서 더 괴로웠다.


애써 팀원들과 설계한 제도가 현장에서 잘 운영되지 않는 장면도 답답했다.

‘좋은 제도’라고 믿고 공들여 만든 것들이, 막상 회사 안에서는 이렇게 말랑하게 변하곤 했다.


“일단 이번에는 이렇게만 적용해 볼게요.”

“지금은 너무 바빠서요, 나중에 좀 정착되면 그때 제대로 해보죠.”

“우리 회사 문화에서는 이 부분은 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제도 설계와 운영 사이에는 늘 간극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왜 안 되는지’를 제도의 문제로만 볼 수 없었다.

조직, 문화, 운영 방식, 리더십, 사람의 습관…
내가 직접 겪어보지 못한 것들 위에 솔루션을 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일은 더 많아졌고 성과를 잘 내고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내 일에 대해 의심이 많아졌다.


그때 한 헤드헌터에게 연락이 왔다.

“제로베이스 상태에서 인사제도를 기획·설계·운영해야 하는 중견기업이 있습니다.”


성장 속도가 빠르고, 인사제도는 거의 바닥부터 다시 만들어야 하는 회사.
흔히 말하는 ‘정갈한 HR 커리어’를 쌓아온 사람보다는,
조금 더 거친 성장통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 어울릴 것 같다고 했다.


보통 피플리더라고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인사팀장의 이력과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설명과 함께,
그 헤드헌터는 내 상황과 성향을 오래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고 직속 상사가 될 분과의 인터뷰가 잡혔다.


지방에서 고객사 미팅을 마치고 올라오는 길,
늦은 시각에 시작된 인터뷰는 두 시간을 훌쩍 넘겼다.


회사의 성장 과정, 지금 겪고 있는 문제들,
앞으로 만들고 싶은 조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안에서 HR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 진짜 고생하겠다.
그런데… 진짜 빠르게 클 수 있겠다.”


그날 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컨설턴트로서의 커리어를 잠시 멈추기로 마음먹었다.


사기꾼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을 오래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은, 그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내가 그동안 해 온 일들이 실제 조직 안에서 어떻게 부딪히는지,
그 충돌의 현장을 몸으로 겪어 보고 싶었다.


지금은 다시 컨설턴트 자리로 돌아와 있지만,
그때 인하우스 피플리더로 보냈던 시간은

내가 정의하는 HR의 역할을 훨씬 더 단단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 글은 그 이야기의 시작이다.


다음 글에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그 중견기업 안으로 들어가
내가 처음 마주했던 풍경들, 제도보다 빠른 성장, 사람보다 앞서가는 숫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당황하고 방황하고 혼란스럽던 나 자신에 대해 이어서 써 보려 한다.


그 과정들 속에서

“HR은 해달라는 일 처리하는 부서가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고 성장의 방향을 짚는 역할이어야 한다”

는 확신이
어떻게 조금씩 더 단단해졌는지 함께 나눠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