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구원했던 것은 무언가를 쓰는 행위였다.

by 김까치

취업이 안 되던 시절에 사이비에게 전도 당할뻔 한 적이 있었다. 나아가 공무원 도전에서 실패한 뒤 슬픔에 빠져 지낸 시절도 있었다. 그 시절을 어떻게 보냈던 것인지 기억이 잘 나지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멍을 때려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무언가를 돌이켜 생각해보는 것은 과거 속으로 돌아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만 떠올리게 하니까.


하지만 기록을 한다는 것, 무언가를 적는다는 것, 그 적는 행위를 통하여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분리되는 경험을 한 뒤부터는 전혀 그러한 것들이 고통스럽지가 않다. 과거의 나 또한 나이고, 현재의 나또한 나이고, 미래의 나이지만 결국 과거는 지나갔기에 과거이고, 현재는 지금을 살기 때문에 현재이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인 것이니까. 하지만 글쓰기라는 것이 하얀 백지에 무언가를 쓰는 것이기에 그 행위 자체는 막연함과 두려움을 유발하는 듯 하다.


그 막연함과 두려움은 때로 낯선 환경에 내가 놓이는 것이 불안할 수도 있고, 내가 해야할 일에 대해 회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내가 오랜 글쓰기를 하면서 알 수 있는 것은 시간은 바람과 같아서 붙잡지 않는 한, 잡아둘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순신 장군도 난중일기를 쓰셨다고 생각하고, 유성룡 대감도 징비록을 쓰셨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여기서 아이러니한 부분은 두분 다 전쟁 속에 있었다는 것이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인데 기억을 하기 위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장군이고, 학자이기 전에 사람이고 사람이라면 고통스러움에 대해 피해야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고통 속에 들어가는 선택을 함으로써,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써 활동했었고 사회적 현상에 대한 진실된 통감을 ‘나라의 잘못이다’, ‘왕의 잘못이다’라고 하며 자신을 갉아먹는 행동에서 벗어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나는 그래서 기록함으로써 괴로웠던 과거를 지나가고, 또 그 과거와 똑같은 상황이 처해지면 그 과거 기록을 돌아봄으로써 현재의 위기를 모면한다. 어쩌면 ‘운명’이라고 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글쓰기 역시도 내가 피할 수 없는 것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글쓰기도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다.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에는 말도 있고, 말이 어려우면 마음으로 표현하는 것도 있으니까. 하지만 마음으로 표현하는 것은 ‘나는 니 마음을 다 알고 있어~’궁예로 알기 어렵기에 행동으로 표현해야 그 마음의 표현이 진실한 것인지, 진실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있는 것 같다. 쓰다보니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껴보니 역시 글쓰기에서 멀어질 수가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