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색 아스팔트길

'쓰고 또 쓰는 것 만이'

by 현목

가파른 길에는 내공이 있다. 각도를 갖는 걸음에 붉은색이 있다. 태어나 살아가면서 평탄한 길만이 펼쳐져 있다는 건 천박한 종이의 얇음이다. 가쁜 숨결의 시작을 직박구리가 대나무의 꼭대기에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다. 직박구리의 새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지만 마음 속으로 들어오자 그것은 한줄기 빛이 되어 이끌어준다. 대나무 숲의 직박구리는 발길이 가는 곳을 예감한다. 길가의 난잡한 철쭉의 피흘리기는 내 본능을 보는 것 같아 버겁다.


비봉산이 품고 있는 고요와 침묵이 몸에 조용한 파도로 와서 부딪치고 잦아든다. 잔산(殘山)은 산의 이념이 아니라 세속의 구체적 사실이 비나 바람에 깎이어서 나지막한 산으로 바뀌는 걸 의미한다. 나르는 봉황새란 젊은 시절의 청운의 꿈이었다. 구름만 타면 기다리는 건 달무리에 젖은 따뜻한 희망이었다.

에스자 길이 인도하는 것은 산다는 건 직선이 아님을 벌써 알려줄 요량으로 흘러간다. 낡은 책장을 넘기듯이 하루를 걸었다. 발목에 잠기는 어둠이 찰랑거리는 저 세상을 두고 와야 한다. 조그맣게 트인 하늘이 내 숨길이 닿는 곳이다. 회색 길과 침침한 분홍색 길의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어쩌면 또 다른 출가이다. 세속은 내 뒤에서 침몰한다.


나의 노트북 어딘가 숨겨놓았던 비디아다르 네이폴의 충고를 찾았다. 네이폴은 1932년 서인도제도의 트리니다드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인도로부터 이주해온 브라만 계급 출신이라고 한다. 1950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영국에서 작가로서 활동하다가 2001년 노벨 문학상을 탔다.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그의 사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그는 요란스럽고 유행에 민감한 런던 문학계와는 거의 왕래를 끊은 채 극소수의 작가들과만 교류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노벨상 받았다는 세상의 허명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번잡한 것을 싫어한다.


그가 뉴욕타임스 북리뷰지와 인터뷰했다는 내용은 어쩌면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선 쓰고 또 쓰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내 안에서 나는 만족한다.”고 네이폴은 말했다.


좋은 산책자가 되기 위해서는 걷고 또 걸으면서 머릿속으로 쓰고 또 써야 한다. 기억을 더듬으면서. 몸이 걷는 것은 머리 속의 사색을 걷게 한다. 그것은 바흐의 평균율처럼 진폭이 크지 않다. 사색이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도 넘어지지 않는다. 다만 흘러가면서 구름이나 쳐다보면 풍경이 마음 속에 들어와 편안히 앉는다.

왜 쓰고 또 써야 하나.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 그것을 딱히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쓰면서 걸어야 하는 길처럼 나를 정리한다. 태어날 때부터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시간의 물결 속을 타고 흘러오고 또 흘러갈 것이다. 닿을 곳도 희망은 있지만 실재는 모른다. 그러한 혼돈 속에서 희미한 길을 비춰주는 것은 쓰고 또 쓰는 일뿐이다.


자유는 내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자유는 도덕과 연결될 때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되는 것이다. 자유 의지로 선이 아닌 것은 누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하루 아침에 될 일이 아니다.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을 그렇게 강조한 것은 칸트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무슨 천년만년을 산다고 눈을 부라리냐고 귀 옆을 지나가는 바람이 일러주고 저만치 간다.


나에게 만족한다는 것은 행복과 연결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더 나아가면 이것은 단순한 행복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전체를 관통하는 진지함과 엄숙함과 존엄이 둘러싸인다.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형편이 그런대로 살만하면 그것도 수긍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 고난이 찾아왔을 때 ‘내 안에서 나는 만족한다‘는 말은 이미 종교의 차원으로 올라간다. 다시 말해 우주를 품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직박구리여 이 한적한 산에서 친구가 되어 같이 걸어가자. 많지도 않은 친구 중에 몇몇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남아 있는 친구에게도 낙엽 같은 엽서를 가끔은 써야겠다. 이젠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서 밥이라도 한끼 먹자고 해야겠다.


에스자로 구부러지고 앞머리가 보이지 않는 것은 무한한 신비와 상상력을 우리에게 준다. 거기를 걸으면서 앞을 열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