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없이 일정하게 걸어야 한다
위로 올라가려면 언제나 첫발이 필요하다. 오른발을 올려놓으려니 185개의 계단이 앞으로 쫙 펼쳐진다. 왼발에 걸린 체중이 진정한 나를 보여준다. 나의 전체가 거기에 몰려 있다. 힘을 넣는 오른 무릎은 일의 성사의 지렛대이다. 허벅지의 근육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다리가 내 몸무게를 지탱해야 한다. 인생길에서 나를 짓누른 몸무게는 무엇이었을까. 내 몸이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려고 하는 시지프스의 바위인 것이다.
계단을 오르는 일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를 요한다. 오름의 성급한 성취는 자신을 난조에 빠뜨린다. 할 수만 있다면 느리게, 그러나 쉼없이 일정하게 걸어야 한다. 일평생 걸어오면서 이런 보조를 취했던가. 젊어서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헉헉거리며 달려왔다. 그러다 보니 진창에 빠지기도 했고 뒤돌아 가서 내가 가야 할 길을 다시 찾아서 다시 걸은 적도 있었다. 느리지만 신념을 가지고 걷지 못했다. 그나마 위안을 삼고 싶은 것은 너무 큰 과오는 아니었다는 것, 그러니 지금의 밥 먹고 비바람 막는 거처에서 살아가는 데 그다지 지장이 없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말대로 삶의 쾌락인 셈이다.
겨우내 마른 잎사귀를 누렇게 하고 끝까지 붙이고 있었던 떡갈나무의 잎사귀가 이제 봄이 되어 무성하기 시작한다. 떡갈나무는 어린 잎으로 떡을 싸먹는다고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참나무과의 수목 중에서는 잎이 제일 크다. 거꾸로 된 달걀형의 잎의 가장자리에 물결무늬가 있다. 세상과 맞닿아서 시달리고 난 아픈 상처의 흔적일까. 나뭇잎의 반짝이는 초록 윤기가 살아가는 여유이다. 도토리는 청설모와 다람쥐의 먹이가 되고, 도토리묵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또 다른 이름인 가랑잎나무의 가랑잎이 왠지 서글픈 비움을 생각나게 한다.
오른쪽 어깨 너머로 보이는 강씨 사당(祠堂)의 기와집과 초록의 잔디밭이 기웃거린다. 왼쪽의 충의문(忠義門)에는 정적이 덮고 있다. 숨죽이고 쌓여 있는 갈색의 솔가리를 밟는다. 소나무가 남긴 것은 사라져가는 향기뿐이다. 살아가는 동안 소나무는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이념을 솔잎에다가 새겼다. 영혼과 신과 우주를 그리워했지만 이제 남은 것은 낙하의 쓸쓸함 뿐이다. 소멸하는 육신과 생전에 만든 향기를 누군가 밟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솔가리의 마음을 이해하리라.
어둠을 대나무 줄기 사이 사이에 심어둔 대나무 숲을 보면 마음 한구석의 어둠을 보는 것 같다. 그 위에 이제는 닳아서 흔적조차 구별하기 어려운 무덤이 널부러져 있다. 그 옆 텃밭에서 일하던 늙은이가 언젠가부터 보이질 않는다. 아마도 그는 요양병원엘 갔거나 아니면 저 솔가리처럼 어딘가 누웠지도 모를 일이다. 돌보는 후손도 없는 무덤을 위로하는 것은 풀잎의 초록이다. 데모크리토스가 저 무덤을 보았으면 무어라 했을까. 그는 이미 원자로 회기했다고 했을까. 정신은 원자에서 나온 것이니까 육체가 사멸하면 정신도 원자로 돌아가는가, 아니면 정신은 원자에서 나와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정신이 지배하는 세계는 따로 있는 것인가. 나의 허망한 상상을 풀잎이 알고 있는지 몸을 흔들고 있다.
분홍색 꽃, 하얀색 꽃, 산지사방으로 갈라진 가지들, 암갈색 가지들의 거치른 피부가 파란 하늘에 박혀 있다. 하얀 속으로 물줄기가 올라가고 있다. 겨우내 한기에 움츠린 마음이 이제 햇빛에 웃고 있다. 발밑에 흙더미 속에 초록풀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매화는 제 영혼을 이제 저 하늘로 날려보낼 준비를 한다.
분홍은 흰색에 익사하기 직전이다. 향기가 지조를 풍긴다. 꽃망울이 터지면 기품이 나올 것이다. 봄은 매화를 화선지에다 먹을 가지고 그렸다. 매화는 겨우내 분홍빛을 움켜쥐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정적만을 품고 있다. 그리움은 안개로 둘러싸고 있다. 바람은 매화 주위로 어슬렁거리고 음력 2월이 되자 매화는 기지개를 켰고 분홍과 흰색을 쏟아냈다. 꽃이 떨어지는 날은 매화에게 겨울이 있어야 했던 이유를 안다. 허전한 마음을 채워야겠다. 술 한잔이 생각난다.
옆을 지나치는 등산객의 “안녕하세요” 인사말이 내 귀로 걸어 들어오면서 따뜻하다. 우물쭈물하다가 답례도 못한 것이 계면쩍다. 아까부터 한두 방울 내리던 비가 후두둑거리기 시작한다. 갑자기 나뭇잎들 위로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된다. 터널로 들어가는 가차열차처럼 계단 길은 가물가물 숲으로 사라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