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창가의 건란 화분은 은성한 파키라 잎 아래의
다육이와 꽃기린과 선인장 뒤에 숨어 있다 뜬금없는 부피가
오히려 없는 존재이다 겨울을 견디고 나온 춘란의 격조를
발로 차고 잎도 상스럽게 거칠고 직선으로 쑥 올라와 버렸다
어느 날 연갈색 꽃대가 올라오자 뻣뻣하고 촘촘한 난잎은
입을 다물고 고요 속으로 내려갔다 꽃술대를 감싸고
있는 연두색 꽃잎 세장은 삼각형을 만들면서 지난 날을
돌아보고 있는 중이다 꽃술대에 붙은 입술꽃이 도르르
말고는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한다 명품에도 끼이지 못하는
지라 시답지 않게 생각하며 나는 코를 무심코 갖다 대었다
조금은 매운 듯하면서도 시원하고 달콤한 향기는 코를 지나
내가 닫아 놓은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를 건란처럼 잊고 있었다. 아버지를 건란의 향기에
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남에 내려와서 돈도 빽도 학벌도
없이 말단 공무원으로 생계를 꾸렸다고 엄살 부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와이로(賄賂)‘ 먹으면서 자식들을 키웠다 나를
키운 것은 아마도 ‘와이로’의 힘이었을 것이다
산자락을 돌아가는 기차의 기적소리처럼 사라지는 늦여름에
난데없이 건란의 난향이 내 머릿속 어느 기억 속을 헤치면서
아무 상관도 없는 아버지를 떠올리게 할까 나는 건란한테
미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