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사상』 박이문

무위자연(無爲自然)

by 현목


『노장 사상』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신선한 발상에 눈이 번쩍 뜨이고 뭔가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도 또한 있었습니다. 어쩌면 제 인생을 다시 사는 신천지가 제 앞에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 두근거렸습니다. 하지만 책의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노장이 주장하는 얘기가 실제 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조금씩 생겨났습니다. 좋게 말하면 그것은 인생을 달관한 사람의 얘기지만 나쁘게 말하면 실제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 기인의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노장사상을 설명하는 책들은 대개 『도덕경』이나 『장자』에서 우리가 흔히 대하는 원문을 풀이한 주석을 읽고 그때그때마다 자신이 느끼는 점을 적어가는 것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노장사상』은 저자가 밝혔듯이 노장사상이라는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저자는 철학으로서의 도(道), 종교로서의 무위(無爲), 이념으로서의 소요(逍遙)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노장사상의 구조를 파악합니다. 읽으면서 저자의 독창적인 생각의 전개에 나름 많은 동의를 갖게 됩니다만.


노자나 장자라고 한다면 어렸을 때부터 주위에서 막연히 들어온 인물들입니다.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정확한 뜻도 모르지만―무위자연(無爲自然), 곤붕(鯤鵬) 이야기, 호접지몽(胡蝶之夢), 상선약수(上善若水), 장자가 자기 부인이 죽자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는 얘기 정도입니다. 유교인 공자와는 대립적인 사상이지 않나 하는 막연한 생각뿐이었습니다.


우선, 도(道)라고 하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길이라는 이미지가 있고 다음은 진리, 또 더 나아가 종교적으로 깊이 깨우친 이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노장이 말하는 도는 그것을 넘어서 도는 존재론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존재는 객관적으로 있는 우주와 자연과 나의 육체와 비물질적인 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인식합니다. 노장은 이 언어를 통해 매개된 존재는 진정한 그의 모습이 아니라 왜곡된 모습이라고 합니다. 모든 대상은 언어로 불려졌을 때 이미 그 진정한 대상의 모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대상을 언어라는 개념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 개념으로 들어온 대상과 실제 우리 밖에 있는 대상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이건 칸트도 같은 생각입니다.


플라톤, 힌두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의 이원론입니다. 즉 물질적 존재와 그러한 존재를 의식하는 의식, 혹은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노장사상은 물질적 존재를 의식하는 의식 자체도 포함하여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는 일원론의 존재론을 주장합니다. 나를 중심으로가 아니라 나의 외부에 있는 존재 자체로 보면 우주-자연-육체와 그것을 의식하는 나의 의식과 언어와 의미체계를 다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차원과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의미 차원을 두 가지 동시에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전체 존재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존재 안에 다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장이 말하는 일원론의 존재론입니다. 반면에 데카르트나 사르트르는 의식으로서의 인간의 의미차원을 고집함으로써 이원론에 집착합니다.

노장은 언어로 인식되지 않는 존재가 진정한 존재라고 하고 그것은 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노장사상에서 무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언어 이전의 존재를 말합니다.


노장사상이 종교로서의 무위를 어떻게 보느냐를 보겠습니다. 기독교에서의 예배나 기도, 불교에서의 선과 같은 수준의 실천적 덕목으로 노장사상에서는 무위를 듭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를 실천하는데 무위로써 행한다고 합니다. 무위란 무엇일까요? 무위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의 의식으로 생성해 낸 인위적인 것, 즉 문화적인 것과 정반대의 것을 행합니다. 그것을 무위라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동안 생기는 우환들의 치료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의식이 없으면 몰라도 의식이 있는 한 철저한 무위의 행동 원칙이 실제로 가능한가요? 완벽한 무위의 행동을 취하는 순간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은 아닌가요?


실생활에서 정말 노장이 말한 대로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예컨대 암에 걸려서 인위적인 것을 배척한다고 해서 수술이나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무위하면서 하나의 전체의 존재에 합일한다고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과연 온당하고 노장은 그러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노장 식으로 말하자면 자연과 대립적인 이른바 문화생활을 포기하고 거의 자연적인 짐승처럼 살아야[=무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도에 이르고 자연이라는 전체에 일치가 되는 삶이 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게 과연 성립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까? 다른 예를 든다면, 7전8기하여 기어코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내는 일은 자연스러운것인가, 무위인가, 인위인가요? 세상에서는 그런 백전불굴의 투쟁심을 찬양합니다. 실천적 규범으로써 노장에서 상선약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학 시험, 사법 시험, 취직, 자동차 면허 시험에 열 번을 떨어졌는데 불굴의 투지를 가지고 달려드는 것은 물살을 헤치고 올라가는 행위로써 그런 행동을 상선약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그 상황에 맞추어 가는 것이 물이 낮은 곳을 찾아가는 것과 유사한 것은 아닐까요?


노장사상에서는 인간의 우환은 외부의 조건에 있지 않고 단지 우리 내부, 즉 우리가 판단하는 생각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승적 관점이 아니라 높은 산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듯한 대승적 관점을 가질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것은 말이 쉽지 자신에게 우환이, 고통이 다가왔을 때 현실을 회피하고 다만 자신의 마음으로 부인함으로써 그 문제를 단순히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오랜 내공을 쌓은 장자는 몰라도 저자 거리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에게 강요할 수 있는 그런 문제일지 의심스럽습니다.


종교가 요구하는 기쁨은 일반 생활의 시시한 데서 얻는 기쁨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인간의 조건을 버리라는 말이 됩니다.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요? 가능하다고 해도 인류의 겨우 소숫점 이하의 몇 퍼센트만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고 평범한 사람은 고작해야 머리 속에서 동의나 하고 실제의 실생활에서는 언제나 허당이 되어 좌절감만 안고 살아가는 셈입니다.


인간의 삶이란 결국 무엇인가요. 태어나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은 자연과 대립하고 자연을 욕망의 도구로서 사용하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이 자신의 한평생 동안 하는 짓입니다. 시간이 차면 그는 기력이 없어서 그 욕망을 달성하려고 해도 할 수 없어서 육체와 의식이 태어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식을 가지고 자연을 지각하여 자연을 의미로서 표상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의미차원에서 자연과 대립하여 존재합니다.


자연과 인간과의 거리, 즉 존재차원과 의미차원과의 거리의 틈을 메꾸려는 인간의 욕망이 예술 활동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무위를 실천하는 방안으로 시 혹은 예술을 말하는데 시와 예술을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누구나 일상 생활에서 무위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 혹은 방향을 제시해 줘야 하는데 그것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노장은 소요유(逍遙遊)를 또 하나의 행동 원칙으로 제시한다고 했습니다. 저자에 의하면 소요유는 가치를 가리키는 이념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 노란색이 있는데 자기는 노란색을 좋아하므로, 욕망하므로 선택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념이란 옳다 그르다는 진리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면 노장이 행동 원칙으로 소요유를 들고 있다는 말은 그것이 진리라는 말이 아니라 한 개인의 선호, 욕망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이 세상을 고통으로 보고 기독교는 이 세상을 타락된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떠나서 열반이나 천국을 열망하며 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즐길 수가 없습니다. 반면 노장은 이 세상밖에 없으므로 그들은 이곳에서의 삶을 즐겨야 합니다. 즐기는 방법으로 노장은 소요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관계되는 선호의 문제가 됩니다.


기독교나 불교가 인생을 비극이라고 보는 반면에 노장은 인생을 희극이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즐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살면서 생기는 걱정, 고통, 우환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의식하는 욕망에 그러한 사건들이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욕망을 없앤다면 이른바 그러한 걱정, 고통, 우환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장은 이런 욕망을 버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노장이 소요를 말하는 이유는 노장이 삶을 어떤 목적이 있는 수단이 아니라 삶 자체가 목적이므로 삶을 즐기자는 생각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소요가 이념이 되는가요? 노장사상은 존재론적으로 삶을 일원론으로 보기 때문에 소요유는 가치라는 이념보다는 무위와 같은 수준의 행동 원칙은 아닐까요.


노장은 소요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인생에 대한 관점을 소국적에서 대국적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고 합니다. 노장은 지락(至樂)만이 인생의 가장 가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이 소요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마지막에 가서 정말 어떤 면에서는 맥이 빠지는 반전을 보입니다. 그는 이제껏 노장 사상이 기존의 기독교, 불교, 힌두교, 플라톤의 사상과는 다른 과히 혁명적이라고까지 말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배경의 이론을 논리적으로 힘들여 전개해 나왔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거의 마지막 부분에 와서 만약에 노장이 주장하는 것들을 문자 그대로 실행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면서 그렇게 될 경우 세 가지의 경우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첫째, 문화의 모든 이기를 버리고 거의 원시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를 통해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오류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둘째, 반문화적 삶, 즉 반인위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위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을 극단적으로 억제하고 자연적인 삶을 영위하라는 것이 구체적인 일상생활에서 가능할까.

셋째, 우리의 관점을 180도 전환하여 우리의 삶이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높은 산에서 인생을 내려다 보듯이 하면서 그것조차 낙으로 삼고 소요하라고 한다.


저자는 이 책을 마치면서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립니다.

「노장의 삶에 대한 혁신적인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려 할 때, 그들의 가르침은 결국 쓸모없다. 그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인, 즉 사실과 맞지 않은 인간관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예상했던 결말과 다르기에 솔직히 어안이 벙벙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노장사상을 도, 무위, 소요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노장사상의 구조를 논리적으로 분석했는지 의아합니다. 노장사상은 머리 속으로는 수긍이 가고 멋있는 발상이라고 생각되지만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하는 점에 도달하면 갑자기 길을 잃어버리는 느낌이 듭니다. 저자는 노장의 사상이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으므로 반대한다는 입장을 돌아섰다는 말인지 헷갈리기까지 합니다. 절대적 진리라기보다는 각자가 가진 철학, 종교, 이념에 대한 반성 자료로서 노장사상은 작동한다는 저자의 말이 옹색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노장사상이 2천년 넘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왔다면 무언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핵심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