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무위 소요
박이문의 『노장 사상』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w)의「독서론」을 인용하면서 문학적 텍스트를 읽는 전통적인 세 가지 방법을 들고 있습니다. 첫째, 기획적, 둘째 주석적, 셋째 시학적 읽기 방법이 있습니다. 기획적 방법은 그 텍스트를 통해 그 책을 만들어낸 저서 또는 사회를 밝혀보려는 것이고, 주석적 방법은 텍스트의 의미를 그 텍스트 안에서 찾아내려고 합니다. 시학적 방법은 그 텍스트가 어떤 내적 원칙에 의해 구성되었는가를 알아 보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왕멍의 이 책은 굳이 위의 방법 중에서 찾아보려면 둘째 방법 같은데 그렇다고 철저히 주석적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고 다만 『장자』의 몇 구절을 읽고 자기 나름으로 해석하고, 경험 등에 비추어서 감상문 비슷하게 쓴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장자』라고 하는 방대하고 심오한 사상을 제가 이 책을 읽고 조감하듯이 이해할 수는 없고 다만 제가 읽으면서 제 게 와닿는 몇 구절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저자는 소요유(逍遙遊)를 얻기 위해서는 철저히 고독하고 적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부양하는 가족까지 부정합니다. 그리고 소요를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열거합니다.
첫째, 회오리 바람을 타고 구만리를 솟구쳐 오를 수 있을 만큼 높은 기백과 넓은 도량이 있어야 한다.
둘째, 세속을 초월해야 한다.
셋째, 기다리는 것이 없고 작은 기준에 만족해야 하며, 모든 외물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한다.
넷째, 쓸모가 없어야 한다.
다섯째, 대도(大道)와 하나로 합쳐져 지인(至人)이나 성인(聖人), 신인(神人)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혹은 존재에 대해 초월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소요유의 제일 처음에 나오는 ‘곤붕(鯤鵬)의 얘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월적 사고를 어떻게 한다는 걸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제까지 우리가 우주, 자연에 대해 의식하여 왔던 의미차원을 바꾸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관점을 180도 전환해야 합니다. 만물을 새롭게 인식해야 우리는 장자가 요구하는 ‘초월적 사고’가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은 소요유, 혹은 자유로울지 모르나 실제로 자신에게 고난이 닥치면 그럴 수 있을까요. 소요유는 자칫 잘못하면 인생의 패배자가 자기만족을 위해서 허황된 상상을 하여 자신의 패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구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생각으로 확고히 되기 위해서는 도와 무위(無爲)와 소요에 대한 자기 나름의 철저한 사색이 뒷받침이 되고 마침내 자신의 것으로 육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자도 장자의 사상이 정신적인 만족을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실용적인 면에서는 그다지 효능이 없다는 것을 박이문처럼 실토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머리 속으로 수긍하기는 쉬워도 실제 생활에 적용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왕멍은 나의 존재의 가장 근본은 도(道)라고 했습니다. 도가 만물의 본질이자 생명의 본질 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도라는 것은 존재론을 말하고 그것은 기독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 같은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을 말합니다. 장자에게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갈 필요가 없으므로 오직 이 세상 자체가 목적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무위와 소요라는 원칙을 통하여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장자』는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 총 33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내편의 소요유(逍遙游)와 제물론(齊物論)이라고 합니다. 제물론에 의하면 물질은 소멸하지 않고 존재방식의 변할 뿐입니다. 따라서 삶과 죽음도 동등한 것이므로 만물이 시비를 따질 필요가 없는 이른바 비쟁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잊어야만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저자는 장자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역시 죽음이 우리에게 가장 공포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에 대해서 초탈하기 위한 평소의 내공으로 허정(虛靜)을 말하고 있습니다. 허정이란 ‘텅 빈 방처럼 공허함을 지니고 고요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평소에 자신의 마음 수양을 쌓아갑니다.
장자는 ‘개인의 주관적인 여유와 자유로운 소요 외에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머리에 떠오른 장면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일본 방송을 주로 보고 그나마 한국 방송을 보는 것이 어느 재방송에서 방영하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입니다. 산속에서 들어와서 혼자 사는 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첫째 여기 저자가 말하듯이 자신의 ‘주관적 여유와 자유로운 소요’ 외에는 모든 것을 끊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가정을 부양하는 책임으로부터도 도피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대개 인간이 사는 모습의 하나인 타인과의 관계를 모두 제거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어차피 생기는 갈등에 적응하지 못하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에서의 인간관계, 즉 사회성을 이루며 살아가는 데 실패했습니다.
셋째, 그들은 생존을 위해 먹을 거리를 산에서 찾고 또 그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 자연을 따라(無爲) 행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대부분(제 생각에는 90%정도?)은 그 자연 속에 들어와서도 세속에서 행하던 인위적인 행태를 보입니다. 그들이 혼자 살면서 왜 그렇게 집을 그렇게 화려하게(?) 짓는지 저는 의아했습니다. 틈만 나면 약초를 캐는 것이 생계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진정한 소요유인지는 잠시 의심하게 했습니다. 제 기억에는 단 한 사람, S대를 나온 그는 밥도 두 끼에다가 그 흔한 약초도 캐지 않고 그저 낄낄거리며 훌훌 날라다니는 것이 그 사람이야말로 장자처럼 보였습니다.
장자가 말하는 허정(虛靜)이라는 글자가 왠지 제 마음에 끌립니다. 마음을 다 비우고 고요하고 적막한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몸은 마른 고목처럼, 마음은 식은 재처럼 하라는 말이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태가 정말 일어날 수 있을까. 이게 산 송장이지 희노애락을 표현하는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허정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어쩌면 허정이 도달하고자 하는 경지가 여기가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사는 데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왕이자(王溢嘉)의 말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자신의 명상 가운데 비우고 고요해짐으로써 허정의 길을 가는 것이 어쩌면 저의 남은 인생에서 해야 할 것은 아닌가는 영감이 듭니다.
저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담담함과 고요함에서 ‘기꺼이 적막함을 감수하는’ 경지로 발전하는 것은 오늘날 중국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노장사상에서는 담담하고 고요한 상태가 되는 것을 허무하고 무위한 대도로 귀의하고 정신적 해방, 소요, 여유로움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 다시 말해 삶의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것으로 본다」
장자가 강조한 소요(逍遙), 제물(齊物), 양생(養生)의 가운데 요점은 무엇일까요? 한 개인의 내면의 자유일 것입니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도, 무위, 소요를 들고 있지만 그들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결국 인간의 욕심, 욕망인 걸로 귀결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 달리 생각하면 인간에게 욕망이 없으면 당장 생물의 기본인 생명조차 유지할 수 있을까요. 먹고 싶다는 욕망이 없다면 그의 생명은 소멸됩니다. 살면서 무언가 이루고 싶다는 욕망이 없다면 그야말로 산속에서 사는 짐승과 같은 행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우리의 욕망을 없애야 한다면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말일까요. 우리의 생물학적 요구의 수준까지 간다면 우리가 동물과 무엇이 다릅니까.
『장자』는 우리의 문화 속에서는 어떤 면에서 잘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장자가 요구하는 도, 무위, 소요는 뜬구름 잡는 소리가 됩니다. 실제로 마음 먹고 해보려고 하면 엄청난 벽에 부딪칩니다. 오히려 공자가 우리에게 권하는 인의 도덕이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쨌든 열심히 노력해 보겠다는 구체적인 길이라도 보이지만 노장사상은 실제로 행해보려고 하면 우리 앞에 둥실 떠 있는 안개처럼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 매력이 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안개가 없는 것은 아니고 분명히 있기에 우리의 몸으로 안개 속으로 들어가서 젖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