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虛靜)
노장사상을 일별(一瞥)하면서 조감(鳥瞰)하듯이 독후감을 쓴다는 것은 저의 능력으로는 벅찹니다. 따라서 그저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그때 그때 일어난 저의 감상을 적는 정도로 해야겠습니다.
『장자』를 볼 때 어찌 보면 처음부터 황당무계한 곤붕(鯤鵬)의 얘기가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소요(逍遙)를 위해서는 인생에 대해서 자질구레하게 굴지 말고 스케일 크게 놀아라는 뜻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소요라면 사전적으로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소요하듯이 걸으라는 것입니다. 소요하려면 마음이 첫째 자유로워야 합니다. 둘째 심각하지 않고 가볍습니다. 셋째 마음이 즐거워야 합니다. 슬슬 거닐면서 마음이 슬프거나 괴로울 수는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일이 잘 풀리면 장자가 말하는 ‘소요’를 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던 사업이 실패하거나 죽을 병에 걸렸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생사가 오락가락 할 때 과연 장자가 말하는 소요의 심정으로 거닐 수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여기가 소요를 하는 데 있어서의 걸림돌이 됩니다.
어떻게 해야 소요를 할 수 있습니까. 저자는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보다는 어떻게 보느냐 하는 관점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소요를 하는 출발점은 인생의 구조, 틀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야만 소요를 할 수 있는 기초가 생깁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저 눈앞의 인생살이에 매달려서 하루하루 희비에 휩쓸려서 허덕입니다. 우리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을 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저자는 조삼모사(朝三暮四)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조금 흥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조삼모사를 대개는 상대가 어떤 대상을 속일 때의 사자성구로 인용합니다. 하지만 장자가 조삼모사를 사용하는 것은 그런 뜻보다는 아침에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 혹은 아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주나 그게 다 똑같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이 마지막이 더 유복하기를 원합니다. 마치 원숭이가 저녁에 먹이를 네 개 주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장자의 논리대로라면 우리의 인생이 초기에 행복하였고 말년에 형편이 어려웠거나 혹은 그 반대라고 해도 그 둘 다 결국에는 시간적으로 같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우리가 사는 시간에도 차별이 없다고 합니다. ‘저녁과 아침, 노년의 세월과 청춘의 연화(年華), 꽃처럼 아리따운 소녀와 흰머리를 얹은 주름투성이 할머니도 독립된 존재로서 저만의 위상과 매력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우리가 소요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그물 같은 속박이라고 했습니다. 욕망에 의해서 그 그물 속으로 스스로 들어간 것도 있겠고 또 인간이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 함께 사회생활을 해야 하므로 자연히 서로 속박하는 요인으로 작동합니다. 그런데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티비 프로를 보면 그 프로의 주인공은 자신을 속박하는 관계를 본의 아니게 강제적으로 끊고 산속에 들어와서 홀로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장자가 주장하는 것은 그 속박을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론은 무엇입니까. 단지 내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세상에 대한 총체적 관점을 바꿀 때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일까요.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저자는 소요유를 위한 방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삶)이란 필연적으로 유형무형의 제약과 구속을 받는 존재임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이 있은 후에 제약과 구속의 내용을 이해하고 그것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탈주, 극복, 수용 혹은 변혁― 선택하는 것이 자유의 출발입니다.’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하고 자신이 그 행복의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 것을 찾아내고 따라하려고만 합니다. 저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없습니다. 스스로 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정의한 것을 자신의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실은 더 많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저의 머리는 잠깐 멍해졌습니다. 진실로 저는 행복하려고 하면서도 제가 스스로 ‘그 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내민 답을 별다른 생각없이 받아들이고 그나마 그저 따라하려고 흉내만 낸 셈입니다.
‘변화란 대개 내 능력 밖의 일입니다.’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온갖 외부의 변화에 직면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교육은 백전불굴의 기상을 가지고 이런 변화에 지지말고 극복하여 이기라고 격려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사람을 패배자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장자의 생각은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유연하게 대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면은 변치 않는 중심사상과 신념을 가지라고 합니다.
저자의 비유가 대단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수풀에서 생존하도록 태어났다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창공 높이 올라갈 수 없습니다. 이제 나이를 많이 먹고 지난날을 돌아보니 저 자신이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될 일에 쓸데없는 힘을 들였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책읽기는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책벌레까지는 아닙니다. 그런데 저자의 말을 들어보니 제가 책읽기를 맹신하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책의 내용은 거의 진리로 받아들여서 무조건 믿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책읽기는 책을 쓴 사람의 경험을 간접 체험함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책의 문자적 의미를 전달하려고 해도 책 쓴 사람의 사상의 정수를 다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에는 여러 가지 무술의 유파가 있습니다. 거길 보면 어떤 무술의 종주가 자신의 비법을 자신의 자식에게 혹은 수제자에게 전수를 합니다. 그 도장에서 오랜 세월 동안 수련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그들도 그 무술에 정통할 수 있을 것 같은데도 그 비전은 종주가 직접 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 신비했습니다.
욕망에 대해서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귀가 따갑게 들어옵니다. 불교에서도 인생의 삼독이라고 해서 탐진치(貪瞋癡)를 드는데 그중에서도 첫 번째가 욕망입니다. ‘욕망은 삶의 의지의 다른 표현입니다’라고 저자가 말했듯이 우리는 욕망이 없으면 하루라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상반된 가르침이 있습니다. 야망을 가져서 이 한 세상을 사는 동안 자신이 욕망한 바를 크게 이루라고 격려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될 수 있는 대로 욕망을 버리라고 충고합니다. 이 두 가지의 길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히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살아갑니다.
욕망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본능적 요구에 의한 자연적 욕망과 다른 하나는 문명적 욕망, 즉 부와 명예, 권력 등이 있습니다.
문제는 돈입니다. 돈은 위에 든 욕망의 대부분을 만족시켜 줄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현들은 돈이 주는 욕망의 만족을 끊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하라고 하지만 실생활에서 그 조언을 따라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만족을 모르면 삶이 힘들어진다’라는 저자의 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자신의 분수를 알고 족함을 아는 것이 쉬울 것 같아도 산속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닌 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안 갈 수가 없고 또 경쟁에서 이기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인생을 살면서 성공하면 성공한 대로 실패하면 한 대로 그것은 인생의 한 단면이고 우리가 가야 할 그 길은 그 길이 어떤 것이더라도 성실히 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문제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을 지켜 내는 것, 홀로 있어도 유쾌한 내면, 장자 식으로 말하면 소요유를 지켜내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이룰 수 있을까요. 자신이 부단히 사색하면서 그 길이 옳다는 신념을 길러내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의 정신은 지정의(知情意)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정은 감정 분야로서 왠만한 사람은 감정을 잘 제어하지 못합니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화이트 헤드는 ‘우리 일상의 90퍼센트는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감정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감정은 세 가지 요소를 구성됩니다. 첫째 자극원 둘째 당사자의 주관적 느낌, 셋째 그에 따른 생리적 현상입니다. 그러면 감정을 어떻게 관리하면 좋을까요. 여기서 우리의 원칙은 될 수 있는 대로 감정 반응은 적을수록 좋다고 하는 것이 장자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면서 희노애락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그가 냉혈적이라고 보고 같이 사귀기를 꺼려합니다. 어느 것이나 적절한 것이 좋은 것인데 그 조절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자의 말 중에 정말 눈이 띄는 말이 있습니다. 감정을 일으키는 자극원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일단 멈춤’을 하라고 합니다. 저의 앞에 차가 갑자기 끼어들었다면 즉각적으로 ‘개새끼’라고 육두문자를 할 게 아니라 그런 반응을 하지 말고 일단 멈추고 그 다음에 반응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극에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힘을 기르는 마음의 수양으로 연결된다고 했습니다.
장자가 말한 지락무락(至樂無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큰 즐거움이란 쾌락이 없는 것이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어렴풋이 짐작은 하겠는데 그것을 향하고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기에는 저에게는 너무나 큰 산이기에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고요의 삶을 살다간 장자처럼, 진짜는 내면의 고요입니다.’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요즘 저는 이상하게 마음의 고요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오래전부터 저의 서재의 벽에 꼭 붙여놓고 싶은 글귀가 있었습니다. ‘窓明人靜’ 송시열의 초상화에 있는 자경문(自警文)에 나오는 말입니다. 창은 밝고 인적은 드물다(고요하다). 또 하나는 근래에 노장사상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허정(虛靜)입니다. 우연히 둘 다 고요할 정이 들어 있습니다. 사실 다른 종교, 기독교에서도 평안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것은 마음이 요동치지 말고 고요하라는 말과 거의 같다고 봅니다. 이 두 글귀를 조만간 제 서재에 걸어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서예를 처음 배우면서 사부로 모신 三如 선생이 저의 부탁을 쾌히 들어주시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내면이 고요한 사람은 흔들림이 없다고 했고 그것이 장자가 주장한 고요하라고 합니다. 대체 어떻게 해야 고요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저의 관심을 끄는 부분인데 애석하게도 ‘고요는 구하거나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제자리에 놓는 작업입니다’라는 저자의 조언은 저로서는 잘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는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 고요한 마음의 지향점은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거울은 고요한 연못처럼 사물을 비추기만 하고 사물이 사라지면 비어집니다. 거울은 동요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평안을 깨뜨리는 것은 우리 속에 너무 많은 자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자아를 없애는 무아의 경지가 마음의 고요를 지키는 요인이라고 강조하지만 그것은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길 같습니다. 장자는 이런 경지를 좌망(坐忘)이라고 했습니다. 에베레스트처럼 높은 곳에 있는 진리이기에 엄두도 나지 않지만 어쨌든 말은 맞는 것 같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죽음일 것입니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면 그에게는 인생에서 갈등할 일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거울이 자신의 내면을 지키고 있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면 자연적으로 즉각 반응하는 오열과 허무감, 상실감입니다. 이것을 장자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장자는 죽음도 고요하고 심지어 유쾌하게 받아들입니다. 장자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장자는 만물은 하나라고 했습니다(제물론). 따라서 죽음은 자연스러운 자연의 생명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히 두려워하거나 비통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의 시작을 위한 준비’라고 했으나 과연 우리 같은 범인이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는 합니다.
장자의 사상은 분명히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실천하기에는 많은 사색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