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연주하듯이 문장을 쓴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이름은 진작부터 들어왔지만 실제로는 그의 책 『잡문집』 이 처음이었습니다. 그 후로 두세 권을 더 읽은 기억이 있지만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별로 저항감이 없었고 글도 그럴듯하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그가 인기 작가이어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본에서 노벨 문학상 후보로 입에 오르내린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이번 추석에 오사카 나라 교토 고베를 여행하면서 돌아오다가 오사카 공항의 서점에서 이달의 화제작이라는 칸에 무라카미의 책이 있어서 무조건 샀습니다. 책 이름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였습니다. 돌아와서 책을 읽으니까 모르는 단어도 많았지만 의외로 잘 읽혀졌습니다. 제가 별로 일본에 능통하지도 않는데도 가끔 모르는 단어는 문맥으로 ‘겐토(見当)’를 때리면서 읽으면서도 저도 놀랄 정도로 술술 읽혔습니다. 그걸 보면 무라카미의 문장이 평이하다고 할까, 별로 멋있게 쓰려고 머리를 굴린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듭니다.
다 읽고 욕심이 나서 제가 읽으면서 줄을 쳤던 부분을 번역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의문이랄까 인상 깊은 점이랄까 하는 것이 몇 가지 떠올랐습니다.
첫째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입니다. 무라카미는 자신이 일본의 정통적인 문장 쓰기와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가 첫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쓸 때 그는 우선 영어로 작품을 쓴 다음 그것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그의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무라카미는 그것이 자신의 문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이 과연 무얼 말하는지 저로서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아무튼 구름 잡는 소리 같습니다. 제가 만약 소설을 쓴다면 우선 영어로 써 봅니다. 당연히 단어실력이나 문장의 기교면이 떨어지니까 글들이 단문이면서도 쉽게 쓰겠지요. 그걸 한국말로 번역하여 작품을 완성한다? 말하자면 그런 식이라는 것일까요?
둘째는 첫 번째와 관련이 있기도 합니다만 무라카미는 자신은 음악을 연주하듯이 문장을 쓴다고 했습니다. 그는 첫 소설을 쓰기 전에 실제로 생업으로 재즈 카페를 운영해 왔습니다. 따라서 그는 재즈에 대해 상당한 조예가 있어 보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재즈의 리듬, 화성, 즉흥 연주를 글쓰기에서 살린다고 하는데 저로는 그게 뭔지 잘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재즈를 틀어놓고 그저 고조되는 기분에 따라서 펜을 쓰는 것인지 혹은 자판을 두드리는 것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습니다.
셋째 무라카미는「그럼, 무엇을 쓰면 좋을까?」라는 챕터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E.T. 영화를 들면서 ‘무엇보다 거기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은 매직(magic)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추측하건대는 소설의 작법의 요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소설의 구성은 이른바, 도입-전개-위기-절정-결말(변형된 기승전결 같지만)로 가는데 이에 대한 비법을 무라카미는 매직이라는 단어 한 마디로 단정짓고 그 이상은 저의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설을 쓰는 전문가는 논외라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소설 쓰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매직’이 그야말로 검도로 말하자면 비전(秘傳)에 해당하는 것인데 그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고 후천적으로 획득하기도 한다는 것은 어림잡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매직‘을 어떻게 구사하는가 하는 것은 정말 지난한 일입니다. 일본에는 검술에 여러 유파가 있다고 합니다. 각 유파의 종가에서는 대대로 그 비전을 전수하는데 자신의 도장에서 연습하는 제자로서는 옆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고 그 종가의 원조에게 하인처럼 들어가서 집안의 온갖 살림을 살면서 스승과 함께 호흡을 함으로써 드디어 비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매직‘을 문장으로 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 줄은 알지만 너무 간단히 ’매직‘으로 끝맺는 것에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넷째 무라카미는 일본에서는 대단히 역량 있는 작가라고 생각했으나―그것은 한편 맞는 말이겠지만―본인의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일본의 정통 문단에서는 홀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책에서 상당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처음 알고서는 조금은 당혹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무라카미의 작품의 우월성을 반드시 폄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반대하는 생각을 가진 일군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등단하면서「群像」이라는 잡지사의 신인상을 탄 것 외에는 일본에서는 별로 상을 탄 것 같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듯이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의 후보에 두 번 오른 것이 고작입니다.
무라카미는 일본 문단과는 거리가 있어 왔습니다. 비평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혹독한 입장에 계속 놓여 있었다고 그는 겉으로는 담담히 말하지만 그의 속내는 섭섭하고 불편한 기색이 보입니다. 일본의 문단, 비평가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당신의 문장은 번역조다’ ‘결혼 사기다’ ‘내용도 없는 주제에 독자를 적당히 속이고 있다’ ‘이 정도의 것으로 문학이다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외국 문학의 다시 굽기’ ‘무라카미 하루키가 쓰는 것은 결국 외국문학을 다시 굽는 것이고 그러한 것은 고작해서 일본국내에서밖에 통용되지 않는다’
일본 문단은 왜 무라카미를 대접하지 않았을까요? 아니 비난까지 했을까요?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고 순수 문학적이 아니어서? 대체 문학적이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섯째, 우리가 보통 시인이나 소설가를 머리에 떠올리면 연상되는 것이 가정을 돌보지 않고 술에 빠지고 여자에 빠지고 타락의 생활 가운데 인생의 고뇌를 쏟아내는 문사입니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런 선입견과는 다릅니다. 그를 보면 정말 모범생 같아 보입니다. 그는 하루에 매일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을 글쓰기를 하는 반면 매일 러닝도 빼먹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유독 학교생활에 대해서 말할 때는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볼 때는 뭔가 모순되는 감정이 생깁니다. 그는 학교를 열심히 하지 않은 이유를 공부보다 더 즐거운 것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특히 책을 많이 읽은 것을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와세다 대학을 7년만에 졸업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라카미가 학교는 그립지도 않고 거북하고 싫은 상대였다고 말하는 것과 착실하게 글을 쓰면서 러닝을 하는 그의 모범적인 생활의 모습과는 뭔가 잘 맷칭이 잘 안 되는 것 같이 저는 느껴집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세계에서 50개국 넘게 번역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베스트 셀러의 목록에도 오른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일본의 정통 문단에서는 거부 당하면서도 수많은 독자를 거느리는 그에게는 무언가 남다른 ‘문학적‘ 역량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언지 아직은 제게 분명한 모습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