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할 땐 스페인어 공부 15
길을 가는데 어디선가 새된 아줌마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하지 말라고 했지. 웃어? 웃음이 나와?!"
중학교 3학년 쯤 돼 보이는 남학생 넷이 보인다. 가까이에는 40대의 한 아줌마가 화를 내고 있다. 저들이 뭘 잘못했나 싶었다. 길에서 만난 중딩들이 뭘 잘못했다 해도 그걸 야단치는 어른을 만나기 어려운 시절 아닌가. 하지만 그 남자 청소년들은 편의점에서 사온 빵과 우유 같은 걸 손에 들고 길에서 약간의 몸개그 혹은 축구하는 시늉을 하고 있을 뿐 별다른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함소리가 나니까 움찔해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내가 너 같은 걸 낳아서 ¡por que di a luz a alguien como tu!
알고 보니 아줌마는 저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자기 딸에게 소리를 지르는 거였다. 다가오는 딸아이의 발걸음이 느린 것은 뭔가 그가 하기 싫은 게 있다는 뜻,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아이가 순둥하다는 것. 그렇게 추정을 하는 것은 고1,2쯤 보이는 일반적인 여자 청소년이라면 그 상황에서 몹시 짜증을 냈을 것인데 그 아이는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학원을 (또) 빠지려 했다거나 (많이) 늦었다거나 (늘 그랬듯) 과제를 안 했다거나 (안 그래도 낮은) 성적이 (더) 떨어졌다거나 그런 거 아닐까.
왜냐하면 거기는 대치동 학원가 뒷골목이었고 시간은 방학 중 학원이 시작될 무렵 혹은 끝날 무렵이었으니까. 여기까지는 이 동네에서 '볼 수도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다음 이어지는 엄마의 말이 끔찍했다.
"내가 너 같은 걸 세상에 낳아 놓고.....!."
스페인어로 아기를 낳다가 dar la luz, 빛을 주다라는 뜻이다. 아이란 그런 존재인 것이다. 세상의 빛. 그리고 아기를 낳는 행위는 빛 하나를 세상에 내놓는 일. 스페인어에서 느낌표와 물음표를 앞뒤에 다 쓰는데 느낌표 백 개를 써도 모자랄 '아이를 낳는 일'을 그녀는 이렇게 표현했다. 누군가에게는 환희의 느낌표, 하지만 화가 난 엄마의 느낌표는 새빨갛게 달아올라 학원가 뒷골목 허공에 둥둥 떠다닌다.
격앙된 목소리가 이어지는데 논리적이지 않아 문장으로 기억할 수 없다. 앞의 말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의 내용을 정리하면 '너 같은 걸 낳아 내가 너무 속상해서 죽어버리면 넌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냐?' 이런 내용이었다.
도대체 자녀가 얼마나 큰 잘못을 하면 '너같은 걸 낳아',라고 말하며 너 때문에 죽고 싶다고 말하는 걸까. 사람을 죽게 했다거나 엄청난 빚을 졌다고 해도 자식한테 할 말은 아니지 싶은데 고작해야 공부 좀 안 했을 것 같은 어여쁜 딸에게 이 무슨 막말인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이 가장 무섭다
엄마가 속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한두 번의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춘기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무사히 아무 일 없이 자라게 하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한민국에서 '공부'를 시킨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엄마들은 공포를 느낀다. 인생에는 겁나는 일들이 많지만 내 경험만 이야기하자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었다. 내가 잘해도 반드시 잘 되리란 보장이 없는 세상인 것도 그렇지만 정말 무서운 일은 내가 혹시 잘못하고 있지나 않을까, 싶은 마음. 그 두려움은 아이를 닥달하는 쪽으로 벋어나간다.
그런 엄마 마음을 같은 엄마로서 이해 못하는 바 아니나 나는 가서 그녀(+ㄴ)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내 마음에도 느낌표가 둥둥 떠다닌다. 아무리 딸 아이가 큰 잘못을 했다 해도 낳은 건 넌데! 아이가 세상에 날 낳아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부모를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아직 10대인 자녀가 잘못을 했다면 그 절반은 당신의 몫일 텐데! 그리고 지금 당신이 내뱉은 말은 평생 아이 가슴에 남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함부로 뱉느냐고!
사춘기는 말썽 피는 게 당연하다 Es natural que los adolescentes, se metan en problemas
너무나 참담한 마음을 안고 집에 와서 나의 딸에게 "나 길에서 끔찍한 말을 들었어." 하고 그 상황을 들려주었다. 스물일곱 살의 어른인 딸이 나를 위로하면서 "엄만 내가 사춘기 때 온갖 말썽을 피워도 그런 말 안 했는데....." 하며 갑자기 자기 성찰 모드로 들어간다. 나의 지론은, 사춘기 때 말썽을 피우는 건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 오히려 아무 일 없(는 듯)이 지나가는 자녀가 있다면 그가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건 아닌지, 부모와 분리 작업이 제대로 일어나고는 있는 것인지 부모가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막상 본인의 일로 겪으면 그보다 힘든 일이 없다. 아들딸을 키우면서 속상했던 날들, 힘들어 밤에 잠 못 들던 날들이 적지 않았고 좋은 어른들로 잘 자란 지금에도 자녀의 문제는 모두 내가 제대로 못 키운 건지 과거가 힘들지만 말이다.
나는 "아이가 온갖 말썽을 피우든 어떻든 부모는 절대 저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지."라고 말했다. 부모뿐이랴, 친구나 부부 사이에도 아무리 열받아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이란 게 있는 거다.
이보단 좀 약하지만 거리에서 그 장면을 보기 직전에도 한 늙은 엄마의 막말을 들었다.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던 중이었다. 노모를 모시고 온 딸이 엄마 때문에 속상하다고 하소연을 한다. "엄마가 맨날, 자기는 80을 못 넘길 거라고 노래를 하는데 내가 아주 미치겠다."고. 사람들이 그 옆에 앉아 있는 할머니께 연세를 물었다. "내가 일흔여덟이야." 하신다. 아니 그럼, 이제 2년밖에 안 남으셨다는 건데, 그러기엔 너무나 건강하신데요? 하고 모두 놀란다. 목소리도 쩌렁하고 예쁘장하니 생기신, 동네에서 자주 뵙는 할머니다.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으니까 그렇지~" 그래, 어르신들이 죽음을 말하는 건 흔히 보는 일이지만 콕 찝어 '80살'을 노래 부르니 자녀들이 듣기 힘들 거다.
엄마, 죽고 싶다고 말하지 마 mama, no me digas que quieres morir
나도 아직 노년은 아니지만 늙음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아질 나이가 되었다. 80대의 양가 부모가 계시다. 멋진 늙음은 함부로 아픔과 죽음을 말하지 않는 것. 병고는 노년의 가장 큰 이슈이겠으나 100번이 아파도 함부로 아프다고 호소하지 않아야 멋지게 늙겠다 싶다.
한편 노인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냐, 엄마 아직 건강하고 예뻐, 오래오래 사셔야지, 나랑." 이런 말을 듣고 싶은 거겠지. 그게 요즘 말로 하자면 '사랑한다'는 말인 거다. 사랑한다는 말은 볼 때마다 해도 지겹지 않은 것처럼 매번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거다(하지만 딸들은 엄마가 얄미워서 그런 말을 잘 못한다. ^^).
하지만 그런 마음은 그렇다 쳐도 표현을 그렇게 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했다는 의미인 것도 맞다. 엄마들!, 늙어가는 엄마들! 그 말 듣는 자녀 마음은 얼마나 아픈 줄 아슈? 뭐? 마음 좀 아프라고 그랬다고? 전생의 원수 혹은 빚쟁이가 부모 자식으로 만난다더니, 그리고 이 생에서 지은 섭섭함들이 세월 지나 나오기도 한다더니 그꼴인가. 그래도 엄마로부터 '죽고 싶다'는 말을 듣는 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아픔으로 상처받는다오.
그러니 나를 포함해 이땅의 엄마들아, 죽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함부로 그 말을 내뱉지 마시라. 특히 자식 앞에서는 절대, 절대로(엄마, 듣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