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쿠바 여행 20
다시 돌아온 아바나에서 제일 먼저 한 것은 국립 현대 미술관에 가보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쿠바 미술에 대한 별 기대가 없었다. 어쩌면 내 안에도 유럽의 미술은 뛰어나고 변방의 예술은 조악하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이 있었던 점을 인정한다. 쿠바로 떠나기 전 이미 한겨레신문에서 백민석의 칼럼을 읽은 바 있지만 내가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 쿠바 미술의 다양성을 예찬하는 그 글은 그저 ‘수사’에 불과한 것인 줄 알았다.
쿠바 국립현대미술관
나를 포함하여 쿠바 혁명에 대한 경외심을 품은 이들은 쿠바의 가난마저도 혁명의 순결성에 연결 지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쿠바 미술에 대한 높은 평가도 혁명의 일환, 긍정적 부산물로 보려는 관점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 현장에서 만난 쿠바 미술은 나를 놀라게 했다. 쿠바 여행의 다른 모든 부분들은 예측하고 상상했던 것에서 별로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예상 대로 명랑하고 따뜻했고 쿠바의 풍광은 사진에서 보던 것과 똑같았으며 그들 생활 속에서 혁명의 열매는 살아 생생했다. 체 게바라나 피델에 대한 쿠바인들의 애정과 불만도, 내가 책에서 읽은 바와 다르지 않았다. 다르지 않아서 어쩌면 ‘사실 확인’에 그칠 수도 있었던 여행에 신선함을 준 것이 바로 쿠바의 미술이었다.
재미난 삶을 지향하는 베짱이 엄마아빠를 둔 덕에 적어도 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나름대로 행복한 청소년기를 보낸 것이 우리 아이들이다. 학원을 강제로 다녀본 적도 없고(자발적으로 다닌 적은 가끔 있었다. 오래 못 가서 그렇지...) 주말이면 온 가족이 야식과 영화를 즐기며 밤을 즐기곤 했다. 방학이면 전시회며 연극을 보러 다녔고 저녁 무렵 피아노 소리와 기타 소리가 이 방 저 방에서 들리기도 했다. 그런 집에서 자라난 아이들이라 ‘미술관 투어’는 자연스럽다. 그래서인지 조금만 걸어도 고릴라처럼 팔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저질체력을 과시하던 딸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미술관을 다니면서 지칠 줄을 모른다.
혁명의 너른 품으로 품은 다양성
미술관 안에서는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었다. 대신 거금을 주고 사온 도록의 사진을 찍어 미술관의 분위기를 전해 보련다. 일단 액자의 간격이 지나치게 넓거나 비슷비슷한 그림을 걸어놓아 관객을 화나게 하는 한국의 전시관과는 다른, 양심적인 전시가 마음에 든다. 걸려 있는 그림의 양이 엄청나다. 만약 시간이 있어 하루 종일 미술관에서만 놀라고 해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유럽의 미술관에서 느끼는 북적이는 관광객의 소음도 없고 자기 문화를 과시하는 듯한 압도적 권위도 느껴지지 않는다. 전리품들이 주는 불쾌한 피해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다.
작품은 다양하다. 만약 소위 ‘사회주의 리얼리즘’만으로 꽉 찬 전시였다 해도 나름대로 신선한 경험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미술관을 ‘공산주의 국가’의 국립 미술관이라고 추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작품의 다양성도 그러하지만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쿠바의 혁명 과정에서 많은 선전과 선동이 국민들을 추동했을 터이지만, 그리고 아직도 혁명은 끝난 게 아닐 터이지만 음악이나 미술이나 춤을 혁명의 도구로 삼으려는 시도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발레를 하는 어린 여자아이들은 격정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길거리에서 라틴 재즈를 연주하는 이들은 혁명가를 부르지 않았다. 미술관에도 더러 체 게바라의 얼굴이 보이긴 했지만 만약 미술관에서 혁명을 말하고 싶어 하는 작품이 보였다면 그것은 사탕수수 농장의 농부이거나 쿠바에서 나는 열대나무로 만든 농기구 따위였을 터이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정복자들의 만행과 식민의 아픔을 담은 그림도 많았지만 그 많은 쿠바 역사 중 부분일 뿐이다. 이것은 자신감일까? 예술을 선전선동의 도구로 삼지 않아도 혁명의 당위는 삶 속에 녹아 있다는 자신감.
각자의 그림 앞에서
3층은 아마도 근현대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나 보다. 초입에서 만난 ‘토마스 산체스’라는 작가의 그림 하나에서 딸은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결국 그 그림에 꽂혀서 아트숍에 가서도 그 그림이 도록이나 엽서로 판매되는지 찾았다. 엽서가 있었지만 원화의 느낌은 아니다. 그 비싸고 무거운 도록을 산 이유도 여기 바로 그 그림이 있어서였다. 사진으로는 도저히 그 느낌이 살지 않는다. 아바나의 맑은, 열대우림의 느낌, 하늘과 호수와 숲이 어우러진 그림...
반면 남편은 조금 오래된 그림을 한참 들여다본다.
19세기 그림인데 어두운 배경에 미사라도 드리고 있는지 여인의 눈매가 참 고즈넉하다. 종교적인 색채가 있는 그림들도 많다. 아바나의 숙소 바로 옆에도 성당이 하나 있어 그것을 랜드마크 삼아 돌아다녔는데 종교를 믿는 이들이 많아 보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굳이 종교를 터부시 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우리는 여행을 다닐 때마다 하던 대로 산타클라라의 한 교회에 들어가 작은 초를 세우고 왔다. 일본에 가서도 신사에서 그랬고 바티칸에 가서도 그랬다. 명동에 가면 명동성당에 들러 성모마리아 상 옆에 천 원짜리 초 한 자루를 켜고 잠시 서 있다가 온다. 서 있는 동안 생각에 잠긴다. 기도란 기복이 아니므로 대개 기도는 ‘반성’ 일 때가 많다. 어쩌다 삶에 돌고 돌아 또 어느 지구의 한 모퉁이에 잠시 서서 나를 돌아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때로는 절, 때로는 성당, 때로는 모스크에서 내가 만나는 게 ‘신’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인간의 논리로 해석되지 않는 엄청난 기운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이 어떤 이름의 신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스스로 작은 존재임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고 세상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낮술도 마다 않는 쿠바노들
미술관 절반을 둘러보고는 로비의 커피숍에서 진한 에스프레소와 햄버거를 즐겼다. 맥주도 판다. 여기 사람들은 낮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즐긴다. 쿠바에 의문을 느끼는 것 중 하나가 그것이다. 정치적으로만 엄격하고 생활의 느슨함에는 허용적인 것일까? 술이나 음악을 즐기는 태도에는 여유가 넘친다. 흔히 남미 쪽이나 더운 나라 사람들이 느긋하고 흥겨운 기질을 가진 데 반해 바지런하게 일하지는 않는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쿠바는 묘하다. 아바나의 중심가 오비스뽀 거리를 걷다가도 일하는 차림으로 낮부터 맥주를 마시고 있는 젊은 사람도 많이 보았지만 쿠바인들이 일을 제대로 안 하고 게으름을 피운다는 말을 들은 바 없다. 그 두 가지가 공존하게끔 하는 모종의 연결고리가 분명 있을 터이다.
미술관에 오면 아트숍에서 작은 공책 하나라고 사가고 싶어진다. 어떤 것은 무척 상업적인 물건도 많지만 그곳 아니면 살 수 없는 것들도 많다.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서는 게르니카가 인쇄된 까만 풀씨 티셔츠를 샀다. 바르셀로나의 까사 밀라 아트숍에서는 가우디의 선처럼 자유분방한 스카프를 샀다. 하지만 쿠바의 아트숍은 소박하다. 구비된 상품이 책자와 그림엽서 정도이다. 그래도 우리는 여기에서 돈을 많이 썼다. 세 식구가 한 끼 먹을 때도 30 쿡 정도를 넘기지 않는 우리가 50 쿡 짜리 도록도 사고 8 쿡 짜리 욕실 커튼도 샀다. 욕실 커튼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을 만큼 과감하고 아름다운 누드화이다. 이런 종류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 나도 그 아름다움에 혹할 정도였다. 쿠바와 우리나라가 교역을 한다 해도 다시 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쇼핑을 정당성을 스스로에게 강조했다.
쿠바에서 무엇을 사 올까?
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 럼주, 시가, 그리고 유기농 설탕...
쿠바는 살 것이 별로 없는 나라다. 체 게바라 얼굴이 그려진 셔츠 몇 장 선물용으로 사가고 싶어 하던 풀씨도 결국 티셔츠를 사지 못했다. 품질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물용으로 산 럼주와 시가 정도가 다였고 남은 쿠바 페소를 다 쓰려고 좋아하는 부카네로 캔 맥주 두 개를 샀다가 그만 캐나다 입국할 때 수하물에 넣는 걸 깜빡해 공항 쓰레기통에 버려야 했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동생이 쿠바 설탕을 사 오지 그랬냐고 한다. 그래, 쿠바 설탕... 세계 최고의 사탕수수 농업국인데, 품질이 뛰어난 유기농 설탕을 에스프레소에 듬뿍 넣어 얼마나 많이 마셨는데, 우리는 설탕 사 올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우리 집은 설탕을 거의, ‘전혀’에 가까울 만큼 거의 안 먹는다. 그래서이기도 했을 것이지만 이 여행이란 게, 여행 가이드북에 자꾸 의존하게 되는 게 병폐다. 책에 쓰여 있는 곳을 가려고 하고 책이 안내하는 곳에 가서 음식을 사 먹으려 하니 새롭고 멋진 것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쿠바에 가실 분들, 큰 슈퍼에 가면 유기농 설탕을 사 오시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