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쿠바 여행 22
우리는 이 ‘싸돌아댕기기’가 재미있었다. 한국에서는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자전거 타는 것도 다 싫어하는 내가 지치지 않고 잘도 걸어 다녔던 것은 일도 안 하고 살림도 안 해서일까, 아니면 여행 오기 직전 ‘30프로 세일’로 산 새 운동화 때문일까? 아바나 프라도 주변을 하도 걸어서 뒷길을 다 외우게 된 덕분에 우리는 그 길에서 가장 물과 맥주가 싼 슈퍼마켓도 알아냈고 쿠바식 콩엿과 땅콩잼을 파는 길거리 음식점 아줌마와 대화도 나누었다. 아바나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산타클라라와 뜨리니닷의 유기농 텃밭도 야채시장도 그렇게 만나보았다.
살사도 싸구려 피자도 뒷골목에 다 있다
이생에는 골프나 요트나 서핑, 수영, 스키 같은 ‘익스트림’한 스포츠를 즐길 일이 아무래도 없을 것 같다. 춤을 추거나 기구를 타거나 패러글라이딩을 해볼 일도 별로 없을 것 같다. 계급적 경계를 느끼게 하는 그런 스포츠나 각종 즐길 거리를 죄악시하는 청춘을 지나온 탓에 노는 거라고는 술 마시고 썰 풀기, 술 마시고 기타 치고 노래하기, 영화 보고 나서 술 마시면서 영화 평하기, 술 마시면서 드라마 보기, 맛있는 음식 해서 술안주로 먹기... 뭐 이런 게 다인 줄 아는 저렴한 영혼들이라... 패러글라이딩 같은 것도 한번 해보고 싶지만 그건 혹시 호기심과 대범함을 타고날 기회가 되면 다음 생에... 섹쉬하게 살사 스텝 한 번 밟아 보고 싶지만 그건 혹시라도 좀 더 늘씬하고 날렵하게 태어나게 되면 다음 생애에....
우린 지갑과 여권 주머니를 옆구리에 비스듬하게 차고 납작한 운동화에 헐렁한 남편 점퍼를 입고 뒷골목을 기웃거리는 이 여행이 싫지 않다. 아직은 뒷골목 진흙을 밟아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우리의 젊음(?)에 스스로 안도한다.
T3 버스를 타고 산 까를로스 까바냐 요새로
지난번에 못 타본 T3 버스를 타고 드디어 까를로스 요새에 가보았다. 아바나 부근에는 몇 개의 요새들이 있다. 요새에서 보는 포격식이 유명하다지만 저녁에 큰돈 내고 가야 하는 코스인데다가 돌아오는 길이 난감해서 포기했다. 그런데 이런 방법이 있었네?
원래는 이 버스의 코스도 잘 모르고 아바나 외곽을 멀리 돈다고만 알고 있었다. 이 버스는 일단 말레꼰을 따라 해저(?) 터널을 건너 아바나 밖으로 나간다. 지난번 T1 버스를 탔을 때 티켓을 못 받았던 기억이 나서 꼭 표도 챙기고 책에 쓰여 있는 대로 아무 데나 내렸다 탈 수 있는지 꼭 확인하자고 다짐했다. 우리가 정거장에서 기웃거릴 때 이것이 바로 그 우리가 찾던 T3 버스라고 알려준 활기차 보이는 아가씨(아줌마?)가 있었다. 복장이 너무 동네 애기엄마처럼 평범해 보여서 그이가 차장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조금 있다 차에 올라 요금을 걷는다.
이 버스가 책에 나온 대로 한 번의 티켓팅으로 맘껏 갈아타도 되는 게 맞는지 꼭 물어보자고 둘이 머리를 맞댄 후 내가 영어로 문장을 만들고 있는 사이 풀씨가 외계어로 ‘갈아타도 되는지’ 물었다. 그녀는 한국어와 영어가 묘하게 섞인 풀씨 말을 다 알아듣고 놀랍도록 유창한 영어로 아무 정거장에나 내렸다가 다음 차를 탈 수 있다, 대신 티켓을 보여줘라, 고 안내한다. 아, 나의 선입견이여. 그녀의 수더분한 인상을 보고 그냥 지나가는 쿠바 아줌마라고 생각했는데... 그이는 아주 유능한 손길로, 그리고 말빨로 손님들에게 다정하게 안내도 하고 돈도 걷고 앞주머니에서 표를 착착 꺼내 오늘의 날짜를 적어준다.
날씨가 정말 좋다. 쿠바는 비가 잦다. 거의 매일 흐렸, 아니 구름이 많았고 하루 한 번쯤 비가 오곤 했다. 하지만 하늘 전체가 흐리거나 공기가 부연 것이 아니라 많은 구름 사이로 맑디맑은 하늘이 파랗게 숨어있는 식이다. 하지만 이날은 정말 날씨가 좋았다. 파란 하늘 끝에 정말 새하얀 뭉게구름이 ‘뭉게~뭉게~~, 뭉게~뭉게~~’ 걸려 있다. 버스가 바다로 나가자마자 요새에 다다른다. 두말할 것도 없이 첫 번째 정거장에서 바로 차에서 내렸다. 다시 타면 된다는데 무슨 걱정인가. 요새 안까지야 요금 때문에 못 들어가겠지만, 어떠랴, 나는 어차피 바닷가에 자리 잡은 요새의 자태를 보고 싶었던 거지 그 안에 어떤 미로와 어떤 무기들이 있는지를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아바나 해안의 경비, 바다의 아름다움과 모순되는 긴장의 역사 따위는 관광의 시선에 다 묻혀버린다. 어찌 보면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던, 쿠바 해안에서 있었던 미국과의 분쟁의 역사 따위도 이 아름다운 풍광 속에 묻히는지도 모른다. 지형적인 이유 때문인지 해수욕장과는 달리 물결이 유난히 거칠긴 하다. 그런 삼엄한 광경 옆으로 요새 안을 개조해 만든 식당 앞에서 들려오는 ‘관타나메라’는 묘하게 평화롭고 흥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