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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꽃 Feb 27. 2024

봄과 태양 에너지

우울할 땐 스페인어 공부 2


입춘을 헤아려 기다렸다. 왜인지는 비밀이다. 사주명리학에서는 음력 새해 첫날도 아니고 ‘입춘’을 새해의 시작으로 본단다. 그날이 입춘인 줄도 모르고 ‘뭔가 봄기운이 느껴진다’고 남편에게 말했는데 휴대폰을 보던 남편이 ‘어머, 오늘이 입춘이네?’ 한다. 드디어 입춘, 좋은 새해이기를 간절히 기원해 보았다. 유난히 정직하게 머리보다 빨리 절기를 알아챈 나의 몸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운 새 해이기를.     

창밖을 보는데 알지 못할 어떤 희망 같은 게 느껴진다. 뭐 딱히 그럴 객관적인 이유가 없는데? 좋은 일도 없고 통장을 스쳐 지나간 월급은 벌써 바닥이 났고 나의 저질체력이 회복될 만한 특별한 보양식을 먹은 것도 아니고... 그런데도 빨래를 꺼내러 간 베란다에서 갑자기 ‘살아야겠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푸왂~! 치솟는다. 세상에, 그게 바로 봄기운이었던 것이다!     


최근에 나탈리 앤지어의 <원더풀 사이언스>를 읽고 있다. 과학 에세이를 좋아한다.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 각각의 <코스모스>를 읽으며 행복해했고 김상욱이 쓴 글들을 읽다가 지하철 창 밖의 한강을 문득 보게 되었을 때 뭔가 세상이 합리적인 아름다움의 질서를 갖고 돌아가는 느낌이 들어 편안했다. 과학책 가득 지식이 들어 있지만 나야 뭐 그걸로 시험을 볼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지식 자랑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므로 정말 무용하게, 오직 재미로만 읽을 수 있다. 아마 <원더풀 사이언스>에서였던 것 같은데 태양이 우리 지구 생명체들의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것, 식물의 잎들, 땅의 기운, 동물의 몸체를 이루는 단백질 등등 모든 생명에게 에너지를 준다는 것, 태양은 젊은 별은 아니지만 아직 우리에게 50억 년 이상 살아갈 만한 빛과 볕을 주리라는 것, 그런 내용을 읽었다.    


고작 8분 거리의 태양  

태양은 다른 행성이나 항성들보다는 지구와 매우 가까운 별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태양 빛은 고작 8분 전의 것이란다. 태양은 지구로부터 1억 5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지만 상대적으로 특히 심리적으로 참 가깝고 다정한 별인 것이다. 태양이 엄청난 열을 방출하여 나같이 하찮은 생명체에게도 따사로움을 주긴 하지만 솔직히 거기서 에너지가 나온다는 걸 ‘체감’한 적은 별로 없다. 좋아하는 상추나 배추를 들기름 듬뿍 치고 깨소금 솔솔 뿌린 된장에 푹 찍어 맥주와 함께 먹으면서도 이 배추는 태양 에너지로 이토록 달콤하게 잘 자랐다, 이런 생각까지 해본 적은 없음을 고백한다.


심지어 먹을 것들 말고 바로 ‘태양빛’ 그 자체가 내게 힘을 준다고 느낀 일도 별로 없다. 낮에는 직장 건물 안에서, 밤에는 침대 안에서 주로 생활하는 겉바속바(겉도 바삭 속도 바삭하게 건조한) 번데기형 인간인지라 오히려 빛이나 볕보다는 습기가 절실한 나는 스스로 전생에 이끼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한다. 내가 만약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길 줄 아는(다음 생엔 꼭 그리 살아보고 싶다!) 활동적 존재였다면 바닷속에서 헤엄치며 바라본 남태평양 물빛 너머의 태양빛을 생명의 빛으로 절감하는 경험을 해볼 수 있었으리라. 그런 경험이 거의 없었던 내가 바로 엊그제, 아, 정말 태양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이렇게 사람이 갑자기 살고 싶어지기도 한다는 걸 온몸으로 실감했던 것이다.     


나의 태양아

태양은 스페인어로 솔 sol, 선글라스는 gafas de sol, 그래, 이탈리아 노래지만 ‘오 솔레 미오(O Sole Mio)’의 ‘솔레’와 친척이다(라틴어 계통에는 비슷한 단어가 많다. 프랑스어로 태양은  Soleil이다). 

나에게도 솔레 미오가 있다. 아니, 스페인어로 미 쏠, 즉 ‘나의 태양’ 말이다. 

남편을 나 스물 그 스물하나였을 때 대학에서 만났다. 그때도 그는 해님 같고 햇살 같은 청년이었다.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친구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나와 함께 한 40년 가까운 세월 내내 그는 나와 가족, 나의 원가족과 친척, 친구들 모두에게 햇살이었다. 엄마의 경제 방침에 따라 늘 춥게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 그와 결혼을 한 이후로 우리 집은 항상 밝고 따뜻했다. 사주명리학 공부를 하다 보니 남편은 5월의 갑목 일주를 지닌 ‘태양’ 같은 사람이란다. 그래서 이 사람은 늘 그랬구나...   

  

나의 태양 같던 남편이 지난 주 이명 때문에 뇌 MRI를 찍고 나오면서 어지럽단다. 조영제 바늘을 뺀 팔뚝을 누르고 있는 남편에게 병원 정수기 물 세 컵을 연거푸 먹였다. 덩치 커다란 곰인형 같이 생긴 남자에게 조그만 여자가 물을 먹여주는 모습을 뒷자리 노부부가 오래 바라본다. 뭐하는 짓들이여, 가 아니라 그래, 그게 부부니라, 이런 눈빛으로..... 그는 몇 년 전부터 머리속에 자리잡은 종양 하나가 혹여 자라지는 않는지 해마다 이걸 찍어야 한다.  

“당신이랑 같이 와서 그런가? 오늘 더 어지럽네....” 

부피로는 내 두 배는 될 이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린다. 그래, 우리 태양계에서도 태양은 결코 젊은 별이 아니란다. 앞으로 남은 세월은 50억 년밖에 안 된다나. 그러나 비록 내 어깨에 기댈지언정 힘들어서 내 손을 꼭 쥐고도 못 일어날지언정 당신은 영원한 ‘솔레 미오’다. 노 뿌에도 비비르 씬 띠 ¡No puedo vivir sin ti(난 당신 없인 살 수 없어)!     


밤의 인간, 오늘부터 태양을 숭배하기로 

늘 나 스스로를 밤의 인간, ‘끼에로 마스 라 노체 께 엘 디아 Quiero más la noche que el día (난 낮보다 밤이 더 좋아)’ 유형 인간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이제부터 기꺼이 태양신께 감사의 마음을 바치려 한다.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살아가는 일에 감사하리라. 불안도 알지 못할 곳에서 오지만 살고 싶음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온다. 아니, 알지 못할 곳이 아니라 너무나 분명한 원천, 끊임없이 헬륨과 수소의 폭발로 핵에너지를 방사하면서도 방사능만은 지구까지 보내지 아니함으로써 우리 지구 생명체를 안전하고도 힘차게 살아가게 해주는 태양신, 헬리오스, 이 과학적이며 신비로운, 과학적이어서 더 신비로운 생명신께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힘을 내서 올 한 해도 살아보련다, 숫타니파나의 기원(祈願)을 빌려, 나뿐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여, 살아있으라, 살아있으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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