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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꽃 Apr 08. 2024

공항에서 노숙하지 마세요

오래전 쿠바 여행기 4

   

쿠바 수도 아바나에 가려면 인천 – 밴쿠버 – 토론토 – 아바나의 경로를 거쳐야 한다. 일본을 거쳐 가는 방법, 멕시코나 네덜란드를 경유하는 방법 등도 있는데 하여간 여러 차례 갈아타야 한다. 우리는 총 비행시간 17시간, 대기시간 포함 44시간을 거쳐 정작 쿠바에서는 12박, 총 15일의 여행을 해야 했다.  

   

공항패션멋지지 않을수록 좋아

일단 인천공항에서 밴쿠버까지는 9시간이 걸린단다. 단단한 각오 속에 청바지 절대 노우~, 편안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공항에 간다. 아주 지긋지긋할 거야, 미친 듯이 무릎이 아플 거야.., 그리고 그 이후에도 두 번이나 더 비행기를 타야 할 거야~! 이렇게 각오를 해서 그런지 9시간 비행은 의외로 금방 끝났다. 4시간 간격으로 기내식이 제공되면 양계장 닭처럼 그 좁은 데서 이도 안 닦고 ‘먹고자고 먹고자고’를 한다.      

가끔 영화를 틀어보지만 에어캐나다라 그런지 자막도 없이 순전히 영어로만... 잘 안 들리는 건 이어폰이 후져서겠지? 세상에 아이들용 애니메이션인인 <미니멀즈>도 끝까지 못 보겠더라니~! 그럼 어쩔 수 없이 책을 읽는다.     


편안한 옷과 통풍 잘 되는 신발(기내에서 슬리퍼를 주긴 하지만), 자일리톨 껌과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수분이 촉촉한 얼굴 팩, 그리고 내릴 때 바를 선크림(액체류 기내 반입 규정을 꼭 살필 것) 챙겨가시라.      

밴쿠버에 도착하니 시차 때문에 점심때쯤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8시 비행기라 공항에 짐을 모두 맡기고 낮 동안 내내 밴쿠버 시내 관광이 가능했다. 물론, 미리 스톱오버 신청을 해놔야 한다.     


해 질 녘 벤쿠버 해변 야경

지하철을 타고 30분 정도 나가서 ‘그랜빌 아일랜드 퍼블릭 마켓’을 향했다. 원래 그곳이 목표가 된 이유는 해산물이 풍부한 그 ‘마켓’에 가서 구경도 하고 점심도 먹을 요량이었는데 웬걸, 작은 섬 전체가 우리 헤이리 예술마을처럼 조성돼 있다. 아들 말에 의하면 캐나다 3대 미대 중 하나라는 ‘에밀리 칼 아트+디자인 유니벌씨티’ 옆에는 한국 학생을 포함한 미대생들이 담배를 피우는 중이더라.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 빗자루를 수공품으로 만들어 파는 가게가 있는데 오직 빗자루만 판다. 정말 걸터앉으면 날아갈 것 같은, 정말 아름답게 만든 빗자루! 하지만 배가 고픈 나머지 예술품도 수공예품도 다 밖에서만 구경하고 마켓을 구경했다. 비 온 뒤 상큼하기 짝이 없는 밴쿠버에서 지하철도 타고 고가도로도 걷고 버스도 타고 게다가 잘못 내려서 친절한 버스기사 아줌마의 덕분으로 차이나타운을 지나는 또 다른 노선 버스도 얻어 타고 야경도 구경하고...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만만하게 본 공항 노숙이 문제였다.    

  

춥고 무섭고 시끄러운 새벽의 공항 

다음 날 8시 비행기라 아예 공항에서 몇 시간 노숙을 하자 했는데... 9시간 비행 이후 눕지도 못하고 또 의자에서 잔다는 게 쉽지 않다. 나와 딸은 그나마 기럭지가 짧으니까 눕다 뒤척이다 했지만 약간 과장해서 키 180cm 몸무게 90kg에 육박하는 남편은 결코 단 한 차례도 눕지 못했다. 

게다가 공항이라 쾌적할 줄 알았는데 밤이 되니 춥다. 그리고 사람이 없을 땐 한적하니 무섭기도 하다. 무서운 순간이 지나니 직원들이 다니며 정비와 청소를 하는데 ‘열라’ 시끄럽다. 전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구조물들 천정까지 청소를 하네? 화장실은 아예 노란줄을 쳐 놓고 화학약품 냄새를 풍기며 기계 솔질까지 하네? 공항이 괜히 깨끗한 게 아니구나...      


새벽이 다가올 때 남편은 “돌아올 때도 이렇게 공항에서 자야 하는 건가?” 묻는다. “그렇지. 공항에서 노숙을 한 후 11시간 비행을 해야 인천에 도착하지.”라고 내가 대답하자 자기는 절대로 이렇게는 못 산다구우~ 공항 안에는 호텔 같은 건 없느냐구~ 슬퍼한다. 그래서 그럼 와이파이가 되는 이 캐나다를 떠나기 전에(쿠바는 인터넷이 거의 안 되니) 재빨리 아주 싼 숙소라도 잡아서 돌아올 때 자고 가게 예약을 하자고 했다. 부킹 닷컴인가(이름이 왜 그래?!) 하는 사이트에서 63,000원에 2인실을 예약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노숙 한번쯤 해볼 만한 경험 아닌가? 이건 내 머릿속의 젊은 패기가 하는 말이었고 그깟 돈 10만 원 아끼려고 내가 이런 미친 짓을 했구나, 이건 50대의 내 자아가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실수는 배움일까 실패일까

다음 날 새벽, 밴쿠버에서 토론토로 약 3시간 비행, 그리고 토론토에서 아바나도 4시간 정도 비행했다. 에어 캐나다를 타는 특전 중 하나인 ‘꽁짜 투어리스트 카드’를 작성하는 시간이 왔다. Last name과 First name, 중학교 때부터 헷갈리던 그놈 때문에 사달이 났다.      


뭐가 성이고 뭐가 이름이냐에 대한 신중한 토론을 마치고 남편은 정성껏 자기 것을 작성했고 나는 딸냄 것을 쓰기 시작했는데, 일필휘지... 너무 신속하게 일필휘지하다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엄훠~! 나 틀렸어!” 라며 카드를 보여주자 긍정 에너지 100%에 어지간해 남을 비난할 줄 모르는 천사 같던 남편이 나에게 눈을 부라리며 그걸 틀리면 어떡하냐고 야단을 친다. 


얘는? 뭘 어떡해, 다시 쓰면 되지 뭐. 딸의 것은 새로 쓰기로 하고 딸냄의 틀린 이름 위에 두 줄을 긋고 그 위에 내 이름을 썼다. 누가 봐도 완전 틀린 비자 카드이다.      


투어리스트 카드는 출국할 때 반쪽을 내야 하므로 절대 틀리지도 말고 잃어버리지도 말라고 많은 블로거들과 여행사에서 누누이 일렀건만. 그런 것 있지 않나, 너무 큰 실수(그래봤자 25달러짜리 실수지만)를 하고 나면 자포자기의 초탈지경이 되는 거? 난 까짓것, 이런 심정인데 남편이 초조해하더니 이거 입국할 때 걸리면 어쩔 거냐, 승무원에게 물어보자, 새 종이 달래자, 안 주면 어쩌지...? 난리다. 그리고 절대로 영어로 뭐 물어보고 그러는 사람 아닌데 결국은 승무원을 불렀다. 새 종이를 달라니 안 된단다. 그럼 어쩌냐고 또 간절한 눈빛을 하고 물어본다. 승무원은 나랑 비슷한 눈빛을 하고(눈 반쯤 뜨고 ‘뭐 어쩌겠니’, 이런 표정으로) “괜찮겠지, 뭐. 괜찮을 것 같은데?” 이렇게 말했(단)다. 그래, 입국할 때 뭐라 하면 25달라 내고 새 종이 받아 쓰지 뭐...   

   

완전 틀린 투어리스트 카드하지만

물론 다행히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여행이란 게 말없이 누군가를 따라만 다니면 재미가 없기도 하지만 이렇게 한 과정 한 과정을 ‘수행해야 할 미션’으로 치러야 하는 것도 사실 피곤하다. 공항에 가서 표를 찾고 게이트를 찾아가고 짐을 부치고 찾고 숙소를 찾아가고 버스를 놓치지 말아야 하고... 만약 긴장을 놓치면 일정이 꼬일 수도 있는, 마치 시험을 치르는 것 같은 과정. 젊은 시절이라면 실수 자체가 재미있고 성취감도 느낄지 모르지만 이 조마조마함이 불편한 걸 보면 나는 어쩌면 늙기 시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번 여행의 심각한 교훈 중 하나가 나의 늙음의 징후를 감지한 것이다. 물론 나쁘지만은 않다. 자신이 자신의 성장 상태를 정확히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스물다섯 살 때, 내가 스무 살도 안 된 것 같은, 즉 매우 미숙한 상태라는 생각에 몹시 불안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에도 늘 나의 정신연령은 남보다 10년 정도는 늦된 것 같다. 남들이 슬슬 세상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던 40대 초반, 극도의 불안감으로 세상에 맞서는 게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쿠바 여행을 하던 그 해 나는 한국 나이 51세였다. 여자로서는 중년이 아니라 노년을 준비할 때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철딱서니 없는 기획과 구상을 할 때가 많다.      


늦게 철들었는데 이제 동전 글씨가 안 보이다니

그러니 이렇게 가끔 내 나이를 인지하는 ‘사건’이 생기면 다행이다 싶다. 나도 이제 철들 때가 되었다. 여행이 ‘이봐, 자네는 이제 늙기 시작하는 거라고.’ 라고 인지시켜줄 때마다 이번 여행에서는 이걸 얻어가야겠다, 는 생각이 들곤 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밀린 ‘응답하라 1988’을 보니 19화에서 치타 여사가 52세에 갱년기를 맞아 전전긍긍하는 장면이 나온다. 머지않아 내게도 닥칠 갱년기, 저토록 감정의 기복이 심해질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조금의 비애는 느낄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도 동전에 쓰인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돈 계산할 때마다 큰돈을 내서 동전이 쌓이고 쌓여 주머니마다 불룩하게 동전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딸아이가 앉아서 이건 2쿡, 이건 0.25쿡이야, 하고 알려줘도 글자가 잘 보이지 않으니 동전의 존재감이 와 닿지 않더라. 


‘총명(聰明)’이 귀 밝고 눈 밝은 거라며? 세상에 시력 2.0 가까이 육박하던, 생전 안경 한 번 써 본적 없던 나의 맑던 눈은 지난 2, 3년 새 급격히 노안이 오고 있다. 점점 공부 욕심은 더 많아지는데 눈은 어두워지고, 잘못 관리하면 실명이 올 수도 있는 어설픈 지병도 있다. 스물아홉일 때도, 서른아홉, 마흔아홉일 때도 단 한 번도 서러웠던 적 없던 나였지만 그런 나도 이제 늙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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