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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주 Sep 27. 2021

짜증이 슬픔을 밀어냈다

큰언니의 장례식이 있던 날

 적어도 격주에 한 번은 글을 올리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무려 60일'이 넘도록 글을 올리지도 쓰지도 못했다. 혼자 속으로 약속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공공연히 말했더라면 더욱 부끄럽고 송구한 일이 되었겠다.


 7월에 마지막 글을 올리고 며칠이 지났을 때 일러스트 의뢰가 들어왔다. 8월 한 달은 전념해야 하는 일이어서 브런치 글은 한 달만 미루기로 했다. 그런데 일을 마무리할 즈음 청천벽력 같은 사고가 일어났다.

 사랑하는 내 큰 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흘 만에 하늘나라로 떠나게 된, 말도 안 되는...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거짓말같이 느껴지고 어쩔 도리 없이 눈물만 쏟게 만드는 사고가...

 

 큰 언니는 나와 같은 띠. 열두 살이나 차이가 나다 보니 언니에 대한 기억의 시작은 언니가 결혼을 하던 시점부터이다. (언니는 대학을 다닐 때부터 자취를 했기 때문에 그 이전의 모습은 내가 어려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형부를 소개하던 날, 초등학생인 나와 동생을 데리고 장난감 가게에 데리고 가 예쁜 미미인형과 옷장을 사주었는데 계산하는 형부 옆에서 수줍은 얼굴로 행복해하던 언니가 또렷이 기억난다.  언니는 결혼 후 먼 지방에서 두 조카를 낳아 길렀고 조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지구 반대편 나라로 가서 살다 10여 년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으니 자주 보지 못하고 지낸 시간이 훨씬 길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어릴 때 함께한 기억이 별로 없는데도 어찌 된 영문인지 나는 언제나 언니를 그리워했고 헤어지는 것을 슬퍼했다. 중학교 때 창작곡 경연대회가 있었는데 내가 출품한 노래 제목은 '언니 생각'이다. 곡이 단조롭기도 하지만 진심을 담은 노래라 아직 기억하고 있다.

 1절은 

 맑은 가을 하늘 울긋불긋 단풍잎

 철새들도 고향 찾아 다시 오는데

 코스모스 활짝 핀 날 온다 하고선

 코스모스 다지는데 왜 안 오시나

 2절은..

 중략(어디 노래집이 있을 텐데...)

 둥근달 몇 번 져도 아니 오시네


  몇 년 전,  불현듯 생각나서 언니에게 이 노래를 불러 주었을 때  

"야~~~~ 뭐야~~~~" 하며 재미있어하면서도 눈가가 촉촉해졌었는데... 

  유난히 감동을 잘하고 그것을 200퍼센트 표현하는 언니였다. 그 모습 자체로도 매력이 있었지만 함께 그 감동 속으로 스며들게 만드는 특별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아무리 찾아내려 해도 흐린 얼굴이 없는, 언제나 해처럼 밝고 따뜻한 에너지를 만들어 내던 언니를 이제는 볼 수 없게 돼버렸는데 사방에 코스모스는 흐드러지게 피었고 보름달도 무심히 떠올랐다...


어머니가 애창곡 '섬마을 선생님'을 부르면 언니는 팬클럽 회장처럼 열렬히 호응해드렸다.

 언니의 부음을 들은 날, 어머니를 센터에 보내드리자마자 서둘러 역으로 가 부산행 열차를 탔다. 

 불과 4년 전, 나와 3살 터울인 언니가 말기암 진단을 받은 지 8개월 만에 하늘나라로 떠나고 텅 빈 얼굴로 그 세월을 지나온 엄마 아버지를 뵈러...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가슴에 가장 의지하고 자랑스러워했던 큰 딸을 묻어야 하는 부모님을 어떻게 뵐지 나도 자신이 없었다.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불편한 몸으로 언니의 마지막 호흡이 머물렀던 병원의 장례식장에 가시겠다는 것을 겨우 만류한 상황이라 잠깐이라도 곁에 있어드리고 싶었다. 

 만석의 열차 객실에서 속수무책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 한 장으로 틀어막으려 애를 쓰고 있는데 어머니 센터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센터 어르신 한 분이 조금 전에 코로나 확진 통보를 받아서 센터 어르신 모두 PCR 검사 후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아.........

 객실에서 나와 흔들리는 통로에서 통화를 하는데 정말 앞이 캄캄했다.

 

 딸은 2학기 개강일이라 풀타임 수업을 들어야 해서 어머니를 돌볼 수가 없었고 나는 바로 돌아간다 한들 오후 서너 시는 돼야 할 텐데..

 보통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언니들에게 SOS를 하지만 지금은 모두 장례식장에 있으니 어쩌나..

 남편은 몇 달 전에 해외 발령을 받아 머나먼 땅에서 백방으로 방법을 찾느라 안간힘을 썼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열차가 대전역에 멈추어 섰다. 

 큰언니가 살던 곳이고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던 곳. 부산에서 모임이 있을 때면 같은 열차를 예약한 언니가 성심당 빵과 커피를 한 아름 안고 우리가 앉은자리를 향해 춤추듯 다가오던 곳.

 전화가 조금 빨리 왔더라면 생각을 가다듬고 대전역에 내려 장례식장으로 발걸음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황하는 사이 열차는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짜증.

 이 모든 상황이 아무 잘못도 없는 어머니 때문인 양 짜증이 폭발했다. 

 그리고 단숨에 나의 슬픔을 밀어냈다.

 그때 나의 감정 회로에는 '짜증'외에 다른 것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당장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이 기막힌 상황은 시작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만약 어머니의 PCR 검사 결과가 양성반응이 나온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치매환자이니 나도 함께 생활시설에 입소해야 할 것이고(그날 아침 어머니는 아무 증상이 없었기 때문에 입원 치료도 안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했다. 정확한 과정은 나도 모른다) 검사 결과가 음성이라 해도 센터 상황에 따라 2주 격리를 해야 할 수도 있는데 밀접접촉자인 나도 격리해야 하면 장례식에 참석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만 격리하고 나의 외출은 허용된다 해도 외부인이 어머니를 돌볼 수 있는 상황인지도 미지수. 센터에 문의를 해보아도 매뉴얼을 구청에서 알려주는 것이라 역학조사 결과가 나와봐야 안다는 답답하고 막막한 응답뿐이었다. 

 다행히 나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그날은 센터에서 5시까지 긴급 돌봄을 해주시기로 했지만 나는 부모님과 멀찍이 앉아 점심식사만 겨우 함께 하고 부랴부랴 상경해야 했다.

 살아있는 딸의 온기로 충분히 안아드리기는 커녕 부모님께 걱정거리만 하나 더 얹어드리고 열차를 탔고

엄마의 붉은 눈과 아버지의 내려앉은 어깨가 눈에 가득 차올라 젖은 손수건으로 꾸역꾸역 틀어막아야 했다.


 그날 밤, 아무 계획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붙들고 끙끙대고 있는데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던 셋째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네가 할 일이 있어. 내일 입관인데 큰언니 머리에 두를 레이스 스카프가 필요해. 상황 알겠지?"

 레이스 스카프를  '미사포 같은', '얼굴은 보이게' 등등으로 설명했지만 주문은 길지 않았다.  

 사고 때문에 큰언니의 모습 그대로 보낼 수 없게 되었으니 예쁜 가리개가 필요하다는 걸 금방 알아챘다.

 예쁘게 단장하는 것을 참 좋아했던 언니... 다른 사람처럼 변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을 거야...

 눈물을 닦고,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패브릭 상자에서 희고 넓은 레이스를 골라 정성껏 스카프를 만들었다.

 6 자매를 의미하는 진주 구슬 6개로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달고 깨끗이 씻어 다림질하며 울다 웃다 언니를 보낼 준비를 했다.   다음날 일찍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조카에게 완성된 스카프를 전하면서  혹여 장례식에 못 가더라도 스카프에 내 마음 실어 보낼 수 있어 다행이다 생각했다.


 새벽까지 뒤척이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센터 대표님께 온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보호자님, 검사 결과 어르신과 직원 전원 음성이래요. 오늘 하루는 소독 때문에 휴원 하지만 직원들은 출근하니까 특별히 어르신은 센터에서 돌봐드릴게요. 걱정 말고 장례식에 다녀오세요. 기다리실 것 같아 제일 먼저 전화드렸어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제의 짜증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취업준비로 바쁜 시조카도 내 소식을 듣고 언제라도 달려와준다고 해주어  감정 회로는 감사모드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열차표를 예매하고 장례식장으로 향했지만 입관이 끝난 후라 내가 만든 스카프를 머리에 곱게 두른 언니의 마지막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입관예배는 드릴 수 있었고 발인예배와 하관예배까지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장례식을 무사히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큰언니가 없는 세상은 낯설기만 하다. 

 진작 끝냈어야 했던 일러스트의 남은 작업에 몰두하며 가까스로 버티긴 했지만 내 슬픔에 겨워 어머니에겐 웃음기 하나 없이 기계적으로 퉁명스럽게 대하고 있던 어느 날 저녁, 방금 씻기고 잠옷을 입혀드렸는데 어느새 잠옷을 벗고 두꺼운 카디건을 두 개나 껴입고 땀을 흠뻑 흘리고 계셨다. 9월이라도 창을 닫으면 꽤 더운데 어머니는 창문을 꼭꼭 닫으시니 땀이 날 수밖에... 게다가 피부 트러블이 있어서 땀이 나면 발진이 생기니 다시 씻기고 오일로 보습을 해야 한다. 순간 화가 치밀었다.

 "어머니!!! 실컷 씻고 갈아입은 옷을 왜 또!!!"

무섭게 쏘아붙이고 우악스럽게 옷을 벗겼다.

깜짝 놀라 내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던 어머니가 나를 보며

 "때릴 거야?"

 라고 물었다.

 "뭐라구욧? 때리다뇨! 내가 때릴 사람으로 생각되세요?"

 나는 더욱 불같이 화를 냈다.

 다시 땀을 닦고 잠옷을 입혀드린 후 안녕히 주무시란 인사도 없이 분한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방문을 닫고 나오는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마나 위협적으로 느꼈으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자신보다 한 척은 큰 덩치를 하고 미간의 선명한 팔자 주름에 거뭇거뭇 기미로 어둡기 그지없는 얼굴로 노려보았으니 오죽하셨을까!     

 딸에게 고해성사하듯 고백하고 내일부터 친절히 대하겠다고 선언했다.

 요즘 이 선언을 자주 한다. 효과가 길지 않아서 그렇다. ㅜㅜ


 이러니 '무려 60일'간 브런치 글을 쓰지 못하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나간 관찰기를 이어 쓸 수 있었겠는가... 아니, 브런치 글을 계속 쓰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마음을 기억해내고 기록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고 다 가식적인 것 같고...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 관찰기를 쓰면서 나를 객관화할 수 있었다.  그 당시는 모르고 지나쳤던 감정까지도 정리할 수 있었는데 결국 어머니의 관찰기는 나 자신의 관찰기이기도 한 것이다. 

 기대하건대 기록을 통해 나는 정돈되고 좀 더 자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진심을 담아 어머니를 인격적으로 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선순환이 되지 않을까? 

 제발 그리 되기를 나는 소망한다.

 그래서,

 어머니와 옆라인에 이웃하며 살던 시간을 건너뛰어 합가 한 지 1년 반이 훌쩍 지난 오늘의 이야기를 불쑥 전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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