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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주 Mar 09. 2022

해답은 가까이에서 보인다

치매도 육아처럼 21

 주말에 한 나절 어머니댁을 방문할 때마다 풀지 못한 의문들이 쌓여 제법 난도 높은 문제지가 만들어졌다. 문제의 정답을 알면 어머니의 다음 이상행동에 대처하기가  한결 수월할 텐데 해답지가 없으니 채점 자체가 불가능하고 이래서야 돌봄 성적을 올리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를 매일 만나면서 비로소 풀게 된 문제들이 꽤 많다.

 드디어 해답지를 내 손으로 만들기 시작. 그리고 100점을 향해 도~저언~!


문제) 왜 거실 커튼을 종일 꼭 닫아두고 계실까? 

정답) 직사광선과 먼지로부터 거실 장식품들을 보호하기 위해.

풀이) 어머니에게 물어보면 좀 전까지 열어두다가 막 닫았다고 하시거나 밖에서 누가 들여다볼까 봐 그런다고 하셨는데 집안 환기 상태를 보나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아파트 동 간 거리를 보나 오답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빛이 투과되어 집안이 밝아지도록 살짝 비치는 망사 커튼을 달아드렸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거실에 장식되어 있는 도자기나 액자, 크고 작은 장식품과 심지어 텔레비전까지 모두 신문지로 덮어두기 시작했다.  귀한 물건 다 상하게 누가 이런 몹쓸 커튼을 달아놨냐고 푸념하시면서...


문제) 유독 여름철에 두통이나 감기몸살을 호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답) 에어컨을 틀지 않고 문을 닫아두어 열사병 증세가 생긴 것.

풀이)  혼자 지내면서 전기를 절약하려고 에어컨을 쉬 틀지 못한 채 방범을 위한 문단속을 철저히 하다 보니 아무리 더워도 밤에는 모든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주무셨다. 그렇게 열대야에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아침을 맞이하니 아프지 않을 수가 없다.  아침에 어머니댁에 가서 급속 냉방으로 시원하게 해 드리면 다행히 금방 회복이 되었지만 센터 차를 제시간에 타기엔 다소 무리가 되는 컨디션이라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밤사이 에어컨이 일정하게 가동되도록 타이머 장치를 달아 놓고 남편이 밤마다 어머니가 주무시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선잠이 깬 날은 장치 자체를 콘센트에서 뽑아놓아 아들의 수고를 허사로 만들기도 했다.


문제) 세탁기 세탁물이 오염은 없어지지 않은 채 뜨끈뜨끈한 이유는?

정답) 세탁기 사용법을 잊어버려서.

풀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날락하며 보니 어머니는 세제 없이 세탁을 하기도 하고, 세탁이 자동으로 완료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작동 중에 이런저런 버튼을 눌러 세탁을 중지시키거나  전원을 꺼버린 후 세탁물을 꺼내어 건조대에 널어놓기도 하셨다. 주말에 가면 이 행동들은 이미 완료상태라 못 보았던 것이고 마침 건조 버튼을 누르게 된 경우는 열기가 식을 때까지 문이 열리지 않으니 세탁물을 꺼낼 수가 없어서 나에게 발견되곤 했던 것이다.

   

문제) 피부과에서도 속시원히 원인과 치료법을 제시하지 못했던 어머니 피부질환의 이유는?

정답) 건성 피부염

풀이) 체내 수분이 부족한 노년기에는 잘 씻고 보습을 위해 바디로션을 충분히 발라야 하는데 씻는 것도, 로션 바르는 것도 잊어버려서 피부 건조증이 생긴 것이다. 가려운 데를 긁다가 생긴 상처에 2차 감염이 일어날 때까지 방치하고 있다가 상처가 악화된 후에야 고통을 호소했고, 병원에 가서도 의사에게 산책 중 벌레에 쏘였다는 레퍼토리로 일관하니 건조증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 없이 강력한 스테로이드 연고만 처방받아 온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는 상처부위를 거즈로 덮고 반창고로 봉인해 두니 염증이 더욱 악화되기 일쑤였다.

 그러다 가까이 살면서 불그스름하게 발진이 되는 과정부터 보게 되었다. 혹시 알레르기인가 싶어서 몇몇 알레르겐 식품을 드셨을 때 어떤지 살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씻고 보습을 했을 때와 아닐 때의 차이가 있는 것을 알게 된 후 보습을 충분히 하자 어머니의 피부염은 재발하지 않았다.

 

문제) 주방가위가 항상 사라졌던 이유는?

정답) 주방가위를 재봉 가위로 오인했기 때문.

풀이) 재봉틀로 못 만드는 게 없던 어머니는 패브릭이나 각종 부자재들을 소중히 보관했는데 그중에서 가위는 위험한 물건이라 도톰한 헝겊에 싸서 안전하게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두셨다. 그런데 주방가위와 재봉 가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자 주방가위를 꽁꽁 싸서 재봉 가위처럼 안방에 들여놓았던 것이다.


문제) 가끔 눈이 판다처럼 시커멓게 되었던 이유는?

정답) 아이라이너 대신 사인펜을 사용함.

풀이) 피부 노화로 눈꺼풀이 처지니 눈을 또렷하게 보이게 하려고 눈 화장을 하셨다. 그런데 아이브로우 펜슬, 사인펜, 색연필의 용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수성 사인펜으로 화장한 날은 판다가 되고 말았다.


문제) 두유를 냄비에 담고 끓이는 이유는?

정답) 전자레인지에 간편하게 데우는 방법을 잊어서

풀이) 따뜻한 두유를 마시고 싶을 때 컵에 부어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쉬운데 전자레인지가 존재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해 냄비에 붓고 인덕션에 데우는 방법을 쓰셨다. 그런데 보글보글 끓다 못해 넘치고(냄비에 붓다 보면 양이 적다 느끼시는지 꽤 많은 양의 두유를 국처럼 끓이심) 불 끄는 것을 잊어버려 냄비가 타는 지경에 이르렀다.


문제) 오징어 땅콩볼 과자가 땅콩과 과자로 분리되어 있던 이유는?

정답) 과자 부분이 껍질인 줄 알고 일일이 벗겨내기 때문.

풀이) 어머니는 각종 과일과 야채의 껍질이나 씨앗은 손톱만큼도 허용하지 않고 말끔히 제거하고 드셨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든 식품에 적용하기 시작하셨나 보다.  통아몬드도 과도로 어렵게 어렵게 외피를 긁어내고 드시더니, 오징어 땅콩 볼도 과자는 벗겨내고 땅콩만 드시다가 남은 것은 그릇에 담겨있고 과자는 졸지에 껍질 신세로 전락하여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문제) 즐겨 드시던 유제품과 치즈가 줄어들지 않고 늘 그대로인 이유는?

정답) 냉장고 문에 별도의 매직스페이스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

풀이) 꺼내 먹기 쉽게 우유나 요구르트, 치즈 같은 것을 버튼을 누르면 열리는 별도의 냉장칸에 보관했는데 그 공간의 존재도, 여는 방법도 모르게 되어 드시지 못한 것. '우유와 치즈를 드시고 싶을 땐 이 버튼을 누르고 꺼내세요'라고 버튼 옆에 메모를 붙여 놓았지만 오래지 않아 문자에도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어머니에게 문제를 풀라고 하면 과연 몇 점이 나올까?ㅎㅎㅎ

  

  이밖에도

  세제를 밀가루로 오인하고 냄비에 담아 끓이다가 주방 전체를 강력 세척한 적도 있고

 한겨울인데 욕조에 찬물을 가득 받아놓고 어찌할 바를 몰라 오들오들 떨고 있기도 하고, 한여름엔 뜨거운 물을 가득 받아 온 집이 열대우림이 되기도 하고

 방문을 잠그고 깊이 잠드는 바람에 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하고

 냄비에 끓여 둔 두유가 더운 여름밤을 지나며 청국장으로 변해 있기도 하고

 충치 치료하며 금 보형물 끼워놓은 것을 이쑤시개로 집요하게 파내어 화장지에 곱게 싸놓기도 하고(반짝이는 것이라 잘 싸 두셨으니 참 다행이었다^^)

 상처에 붙인 재생 반창고를 떼어다가 멀쩡한 피부에 옮겨 붙이기도 하고

...

 가까이 살지 않았다면 바로 해결하기 어렵고 그로 인해 어떤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 몰랐을,

'이제라도 가까이에 살길 잘했다!' 안도하게 되었던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지만 비슷한 패턴을 분석하며 자신감을 갖고 한 문제 한 문제 차근차근 풀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시간 답을 찾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다음 문제에 도전해본다.


문제) 치매환자를 더 이상 혼자 살게 하지 말아야 하는 시기는 언제일까?

정답) 의, 식, 주 어느 것 하나라도 혼자서 원활하게 해결하지 못할 때

풀이) 의- 계절에 맞는 옷, 몸에 맞는 옷을 입지 못할 뿐 아니라 세탁도 잘하지 못하는 상태/ 식- 햇반과 라면을 드시는 빈도가 많아지고 냉장고에 상한 음식이 쌓이는 상태/ 주- 집을 찾지 못하는 일이 생기거나 현관 열쇠 또는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는 일이 잦아지는 상태가 되면 더 큰 위험에 빠지기 전에 보호 가능한 거리에서 돌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작성한  답안에 동그라미가 쳐질지 빗금이 쳐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경험을 근거로 소신껏 작성한 답안이 누군가에게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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