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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주 Jan 23. 2024

장롱을 보고 냉장고라니?!

치매도 육아처럼 35

 우리 집과 어머니 집의 냉장고는 똑같은 모델이었다.

 꽤 오래전, 어머니가 새로 산 우리 집 냉장고를 보시고 마음에 들어 했는데 마침 몇 개월 후에 어머니도 바꾸게 되었을 때 같은 제품인데도 더 싼 값에 살 수 있어서 기뻐한 기억이 생생하다.


 합가를 하면서 어머니 냉장고는 다른 가족이 쓰게 되었고 우리 냉장고만 주방에 남았다.

 그런데 그 냉장고가 어머니 치매증세가 악화되었음을 알려주는 바로미터가 될 줄이야..




 어머니는 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주방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냉장고 앞에 멈추어 서서 당신 몹집보다 커다란 냉장고를 쓰다듬기도 하고 살며시 열어보기도 하더니 이내 수심 깊은 얼굴로 원망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도대체가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니 글쎄? 이게 내가 시집올 때 비싸게 해온 장롱인데 말이야, 여기다가 이렇게 반찬을 넣어놨으니 좋은 옷에 냄새가 배게 생겼어. 이제 옷을 넣기도 어렵겠네, 쯧! 세상에 멀쩡한 장롱을 이렇게 못쓰게 만들어놨으니 원!"


 처음엔 진짜 장롱이라고 생각하는지 긴가민가 의심스러운 정도여서 적당히 넘기려고 했지만 며칠째 반복되자 지쳐버린 나는 그 상황을 어머니의 집요한 도발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뭐든 트집 잡고 싶은 게 분명해.'

 '당신 소유물임을 주장하며 헤게모니를 쥐고 싶겠지!'

 '아니, 내가 미더우면 장롱에다 반찬을 넣었다고 한들 그러려니 하시지 않겠어?'


 내 안에 상시 매복 중이던 고부갈등유발 특수공작원에게 단단히 포섭된 나는 전투태세를 가다듬고 십자포화를 퍼붓기 시작했다.


 "어머니 이건 냉장고잖아요, 보세요 이렇게 속이 차가운걸요!"

 "여기 읽어보세요! LG전자, 에너지효율등급 2, 냉장온도, 특급냉동, 냉동온도!"

 "아니 무슨 장롱에 전기코드가 있겠어요?"


 또박또박 스타카토로 끊어가며 부드럽게 말하지도 않았으니 공격적으로 느껴질 만도 한데 어머니에게 타격감은 1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더 확신에 찬 얼굴로


 "무슨 소리야? 냉장고라니? 내가 그런 것도 구분 못할 줄 알고?"


 오 마이갓!

 진심으로 냉장고를 장롱이라 믿고 계신 게 아닌가. 어머니 치매증상이 악화된 것이 분명했다.ㅜㅜ


 그렇다면 재래식 공격은 의미가 없다.

 다른 전술로 급히 전환, 내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누가 봐도 냉장고임을 알 수 있도록 해보았다.


 공문서 느낌이 팍팍 나게 진한 고딕체로

 

 문을 자주 열면 냉장고가 고장이 납니다. - LG전자 서비스센터


 라고  출력을 해서 냉장고 전면에 붙여 두었다.

 어머니는 소리 내어 천천히 한 글자씩 읽어보시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뒤돌아서서


 "저게 내 장롱인데 쯧.."


 문자 해독 따로, 생각 출력 따로 신공의 치매용병술...


 급기야 냉장고 전체에 시트지를 붙여 위장해보기도 했다.

시트지를 붙이는 과정
붙이고 보니 제법 마음에 들었던 은폐용 리폼 냉장고


 어머니가 주간보호센터에 가 계신 동안 시트지를 사다가 감쪽같이 붙였더니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괜한 번거로움과 수고 따위 아랑곳 않고 과연 어머니의 반응이 어떨지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두둥~ 어머니가 보시고도 언급이 없어서 대성공인가 했는데 어느새 힐끔힐끔 눈길을 보내며


 "저게 내가 시집올 때 해 온 장롱인데..."


 실. 패. 다.


 딸은 시트지 색을 빨강으로 했어야 했다고, 흰색에서 회색은 바꾸나 마나라고, 지금이라도 다시 바꿔보라고 했다.

 살짝 그래볼까 싶었지만 인테리어에 진심인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벽지색이랑 너무 찰떡인 데다 시트지값도 치킨 세 마리는 족히 시켜 먹을 수 있는 액수였기 때문에.


 결국 유들유들 미끌미끌한 총알을 혀끝에 장전하고 장기전에 돌입했다.


 "이건 내 장롱인데...(이하 동일 레퍼토리)..."

 "그럼 어머니방에 다시 들여놓을 테니 어느 자리가 좋을지 좀 봐주실래요?"

 "......"


 "이건 내 장롱인데...(이하 동일 레퍼토리)..."

 "그러게요, 어쩌다 장롱에다가... 죄송해요! 음식 넣을 데가 없어서 그랬어요. 어머니가 냉장고 한 대 사주시면 안 돼요?"

  "......"


 방에는 이미 붙박이 장과 다른 가구로 가득 차 있어 공간이 없고, 수중에는 동전지갑조차 지니지 못한 어머니는 그저 대략 난감..


 어느 때부턴가 장롱 이야기는 냉장고 구석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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