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도 육아처럼 43
어머니는 결혼하면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 당시 판잣집이 즐비했던 해방촌을 드나들며 구제활동도 힘껏 하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다가 어느덧 권사직분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왕성한 교회활동을 예고한 그 무렵 아버님이 암투병을 하게 되어 간병에 집중하느라 어떤 교회 일도 하지 못한 채 노년을 맞이했다. 그러다 보니 주일예배 참석 외에는 주중에 구역모임 한 번 정도로 한산한(수동적인? 흠.. 뭐라고 표현할지 모르겠다)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내가 아는 어머니연배의 교인(친정엄마나 우리 교회 어른들)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어서 가끔 어머니가 같은 개신교 신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장황한 형용사를 남발하지 않는 담백한 어머니의 기도를 듣거나 삶의 힘든 순간에 주님이 함께 하셨다는 신앙고백을 들으면 누구보다 순수한 신앙인으로 느껴졌다.
어머니의 교회는 차로 40분은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신혼 초에 어머니와 가까이 살 때는 우리가 모시고 다녔는데 지방으로 이사를 가고부터는 어머니도 집 근처 새로운 교회로 옮기게 되었고, 우리 아파트로 오시면서 다시 같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주변 어른들 중에는 정든 교회를 고집하는 분들이 많은데 어머니는 크게 개의치 않으셔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오랜 벗들과 함께 오손도손 신앙생활을 하는 어른들을 봬면 참 부러웠다. 어머니도 그런 공동체가 있다면 한결 건강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교회에서 운영하는 노인대학 프로그램을 신청했는데, 어머니는 한 번만 참석해 보고 결정하자는 내 간곡한 부탁에도 결국 취소하겠다고 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노인들만 우글우글 있는 곳이 싫다고, 당신은 지하철을 타도 경로좌석엔 얼씬도 하지 않으신다고... 주여! ㅜㅜ
그렇게 어머니는 액티브한 교회생활을 맛볼 기회를 영영 갖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평생 해오시던 대로 주일마다 단정하게 차려입고 예배에 늦지 않게 참석해서 낯선 교인들과 고운 미소를 나누는 조용한 종교의식을 이어갔다.
요일이나 장소 인지를 할 수 없을 만큼 치매상태가 나빠지고부터는 어머니에게 미리 전화를 걸어 교회 갈 준비를 하게 하고 모시러 갔는데, 어느 주일에 말없이 혼자 교회로 가버려서 어머니를 찾느라 온 동네를 헤맨 적이 있다. 당시에는 혼비백산이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잠깐이나마 교회를 찾아갈 수 있는 인지가 있었던 것이니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가끔은 예배시간에 졸다가 큰 소리로 잠꼬대(뇌신경 문제로 잠꼬대를 많이 하셨는데 발음뿐 아니라 동작도 생생하다)를 하신다거나 성가대 찬양을 듣는 시간에 아는 곡이 나오면 혼자 소리 내어 불러 주변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저으기 당황스러웠지만 가만히 어머니 손을 잡고 쉿! 하고 신호를 하면 곧 알아듣고 조용히 하셨다. 교회라는 현실공간 때문인지 예배 중이라는 사실은 뚜렷하게 인지하신 것 같다.
코로나 방역수칙으로 교회 집회가 불허될 때쯤엔 이미 주일이나 예배에 대한 인지는 불가능했다. 그래도 주일이니 컴퓨터 앞에 의자를 놓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자고 하면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성경책을 찾아 나오시곤 했다.
처음엔 어머니 앉은키에 맞는 작은 의자에 앉혀 드렸는데 그 의자는 등받이가 무거워서 의자를 뺄 때 조심하지 않으면 뒤로 넘어져 버렸다. 꽝! 하고 쓰러지는 의자에 우리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고서야 식탁의자를 끌어다 앉혀드리고 쿠션으로 발받침을 해드렸다. 그런데 그 정도면 안전할 줄 알았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 의자에 앉아서 깜빡 졸다가 그만 옆으로 쿵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다행히 강아지를 위한 쿠션감 있는 매트가 깔려 있어서 다치지는 않았는데 다시는 그런 불상사가 없도록 아예 소파의자로 바꾸어 앉혀드렸다.
그리하여 예배시간은 그야말로 영혼과 육신의 안식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