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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Apr 16. 2024

엄마의 사랑에 불순물이 많았음을 인정하다

들깨메밀국수

아무리 하루하루를 감사히 여기고 신나게 살려고 노력해 보아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너무 깊은 곳에 있어서 내가 쉽사리 들여다볼 수 조차 없는 나의 마음 속 어딘가에는 아픔 덩어리가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생겨난 아픔인지, 어떤 종류의 아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항상 내 안에 있었다. 이 아픔으로 인해 나에게 암이 생겨났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너무 깊은 곳에서 내 안에 존재해 온 이 무언가가 과연 치유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이었다. 


어느 날 만난 한 권의 책에서 이런 나의 마음을 보지 않고도 알고있는 듯한 글을 만났다. 


'엄마는 당연히 나를 사랑했을거야'라는 보편적 지식으로 나를 이해시키며 분명 사랑받은 딸이라 생각하는데, 왜 내 안에서는 이렇게 갈등과 고통이 끊이지를 않는 걸까요? '우리 부모님은 삶이 힘들어서 그랬지, 나를 사랑하지 않은 순간은 한번도 없었어' 라고 의식은 나를 설득하고 서사를 부여하지만, 내 깊은 곳의 무의식은 왜 이토록 많은 회한과 정돈되지 않는 감정의 응어리들로 나를 괴롭히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심층의 진실과 의식의 언어로 나를 설득시킨 진실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박우란 저> 중에서



나는 정말 엄마가 한 순간도 빠짐없이 나를 사랑했다고 믿었다.

어릴 때 많이 때리고 나서 벌거벗긴 채로 집 밖으로 내쫒았을 때도,

십대 때 내가 더 공부하지 않는다고 심하게 팼던 수많은 순간들에도,

나를 앉혀놓고 아빠에 대한 원망 보따리들을 풀어놓았던 순간들에도,

내가 실패했을 때 나를 품어주지 않은 채 눈을 내리깔았던 순간들에도,

잘못에 대해서는 경멸하는 말투로 비난을 해서 나에게 깊은 수치심을 주었던 패턴도,

......

엄마가 그 때들 조차도 속으로는 나를 사랑했다고 믿었다.


체벌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잘 몰라서 그랬던 거지. 

아빠 원망을 하면 나에게 상처가 된다는 걸 몰랐던 거지. 

나를 때려서라도 공부시키는 게 나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내가 실패할 때마다 항상 그랬던 건 아니야. 꼭 안고 품어준 적도 많았잖아. 

잘못에 대해서 인격적으로 소통하는 법을 몰랐겠지. 

엄마가 나를 위해 헌신해주고, 나를 위해 웃어주고, 나로 인해 기뻐해준 시간들이 대부분이잖아. 엄마의 나를 향한 사랑은 절대적이야.


이 믿음을 도무지 놓고 싶지가 않았다. 놓으면 엄마가 나를 사랑했던 순간들까지 모두 없어져 버릴 것만 같기도 했고, 항상 내 편이 되어주고 나를 위해 버텨주고 고생해준 엄마에게 미안한 것 같기도 했다. 엄마의 사랑은 마치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땅 같이 느껴졌기 때문에, 이걸 부정하면 내가 떨어져 죽을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문제는 이 믿음을 붙들고 있는 한 나는 언제까지고 아플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었다. 

나에게 상처준 행동들까지 엄마의 사랑이었다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감수해야 했다. 


사랑의 속성 자체를 어느 정도 왜곡해야 했고,

받은 상처에 대해서 끝없이 아픔을 느껴야 했고, 

뭔지 모르게 앞뒤가 안 맞아 혼란스러워서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고, 

내심 엄마가 미웠다. 엄마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보니 내가 느끼는 미움을 계속해서 외면해야 했는데, 그게 또 나를 아프게 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기 어렵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 엄마가 준 상처가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믿는 한 나는 그 기억로부터 해방될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렸다. 

엄마가 때로는 사랑이 아닌 감정을 나에게 가졌다는 걸 인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노랫말처럼,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인정한다고 받아들이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흘렀다. 왜 우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그냥 엉엉 울음이 터져 나왔다. 7년 전 죽은 엄마를 아직도 놓지 못하고 꼭 붙들고 있었다는 게, 엄마의 마음을 인정하자 비로소 느껴졌다. 꽉 쥐었던 손에 힘이 풀리듯 마음에 긴장이 풀렸다. 이제야 엄마에 대한 진정한 애도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자라면서 애정 결핍이었던 나의 엄마가 나를 통해 자신의 감정적 욕구를 해소하며 살았다는 걸 인정했다.

엄마가 아빠와의 관계에서 느끼던 불만족이 힘들어 나를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했다는 걸 인정했다.

엄마가 나를 편애했다고 해서 나를 더 사랑한 게 아니었음을 인정했다.

엄마가 자신의 두려움을 나를 학대함으로써 해소했음을 인정했다.

애뜻해 보였던 엄마와 나의 밀착 관계가 실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인정했다. 

엄마가 자신의 내면의 상처 때문에 나를 건강하게 사랑할 수 없었다는 걸 인정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했었다는 것도 인정했다. 

내가 엄마로부터 받은 그 모든 것들이 엄마의 최선이었음을 인정했다. 



암 수술 받았던 자리가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어 조금 무서웠다. 가래 냄새가 역하게 올라왔다. 몸살 기운이 있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나의 내면에서 어떤 지각변동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나의 마음이 제로베이스가 되고 있는 게 아닐까. 


"있는 그대로 사랑해." 

거울을 보면서 나에게 말해 주었다. 엄마로부터 순수한 사랑을 받지 못했어도, 내가 나를 사랑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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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깨 메밀 국수 >


삶아서 찬 물에 비벼 씻은 메밀 국수면에다가

소스(간장, 식초, 설탕, 조청) 넣고

들깨 가루, 다진 파, 김 넣고 

들기름 얹어주기.


만들기는 참 간단한데 고급스러운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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