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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Oct 01. 2024

나니까. 나답게. 나라서. 나대로.

마음 살리기 프로젝트

사는 내내 지긋지긋하게 이어져 오던 지리한 싸움을 그만 두기로 했다. 오늘 나는 40년 동안 있는 힘껏 쥐고 있던 두 손에서 무겁고 낡은 칼과 방패를 내려놓고, 나의 온 몸을 짓누르던 갑옷도 풀어 내려놓고, 싸우던 상대들에게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한 후, 뒤돌아 발걸음을 떼어 놓으며 이제까지의 나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 싸움터에서 퇴장... 하려고 했는데, 

출구가 어디지?


나는 엄마의 열등감과 두려움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고, 세상이 들이대는 잣대와 싸우고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엄마와 세상에게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나 자신과도 열렬히 싸우고 있었다. 상대는 모두 강했고 완고했고 잔인했다. 싸울수록 나만 점점 지쳐갔다. 결국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나는 엄마와 세상이 원하는 그 어떤 것도 엄마와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치만큼 해낼 수 없었다. 엄마와 세상이 내 가슴에 아무리 많은 열등감을 심는다 해도, 나는 그걸로는 몇 발자국 나아가지 못한 채 그저 아프기만 했다. 나 라는 사람에게 열등감은 그다지 좋은 연료가 아니었던 것이다.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싸움터에 내몰리다 보니 싸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싸우는 게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항상 더 잘하지 못하는 걸 미안해 하고 속상해 했다. 엄마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양에 안 차는 딸' 이었다. 엄마와 세상이 '이렇게 느껴야 해' 라고 하는 그것을 느끼느라 허둥댔고, 나의 느낌이 엄마와 세상이 보기에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마음 깊은 곳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내가 느끼는 나 스스로의 자연스러운 감정은 엄마와 세상의 관점과 양립하기 어려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부하고 또 거부했다. 사실 이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만성적인 고통이 견디기 힘들자 나는 어느새 나의 마음을 마취시켰다. 나도, 내가 한 일도 모두 모자르다는 죄책감은 일종의 마취제로서의 역할을 했다. 


싸움이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고서야 나는 나 자신의 느낌만이 나를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연료라는 걸 깨달았다. 무엇을 하든 '하고 싶어서' 해야 했고, '그걸 하는 게 기뻐서' 해야 했다. 문제는 나의 느낌과 나 사이에 긴 세월 동안 쌓아올려진 만리장성 같은 벽 이었다. 벽에 아무리 귀를 대고 '뭐라고요? 하고 싶은 게 뭔가요? 무언가를 정말로 기쁘게 했던 적이 있나요?' 소리쳐 봐도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내가 정말로 어떻게 느끼는지가 감지가 안 되었다. 엄마와 세상으로부터 주입된 '이렇게 느껴야 맞는 느낌' 이라는 관념이 씻어낼 수 없는 진흙처럼 나의 온 몸을 덮고 있었다. 


그런 나의 내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지금의 나의 상태에서 내가 나와 연결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가 있다면 그건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요리를 맛있게 해주고 싶을 때나 남편이 어딘가 아파해서 도와주려 할 때 나는 가장 쉽게 나의 마음과 직감에 연결되곤 했다. 반대로 누군가로부터 관심이나 인정 등을 받고 싶을 때나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무시할 때 나는 쉽게 지쳐 버렸고 나의 마음과 센스로부터 평소보다도 좀 더 둔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두려움은 나의 진짜 마음이 아니라는 전제다.)

바깥에서 안으로 밀어야 열리는 문이 있고, 안에서 밖으로 밀어야 열리는 문이 있는 것처럼, 혹시 마음의 문은 사랑을 밖으로 주어야 열리도록 되어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부터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하루를 살면서 하는 모든 행동들을 사랑의 동기에서 해보기로 했다. 겉보기에는 내가 하는 행동들이 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마음 속에서는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쪽에 서보기로 한 것이다. 

내가 전에 브런치에 올려왔던 모든 글들이 실은 글을 좀 쓴다는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은 동기에서 비롯되고 있었다는 게 이제야 보였다. 오늘의 이 글은 나처럼 열등감 많은 부모 밑에서 자라나 세상의 잣대에 다다르려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나도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알리고 어쩌면 변화의 씨앗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대충 생각없이 걸었던 나의 걸음걸이도 건강한 에너지로 세상에 활기찬 영감을 주기 위해 굽었던 등을 세우고 배에 힘을 주고 발꿈치를 들며 걷기 시작했다.

남편이 식사 준비를 해주면 요리를 해준 남편에게 그 기쁨을 배로 돌려주기 위해 음식의 맛을 진지하게 느껴서 그 소중함을 알아주고 나의 감상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저 해야 된다는 이유만으로 해왔던 바닥 청소도 남편에게 집의 쾌적함을 선물해 준다는 마음으로 기쁘게 했다.

생활하며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함을 선물하는 마음으로 대했다. 그 동안 내가 다른 이들을 대했던 태도의 밑바탕에는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이 깔려 있었다는 걸 깨닫고 놀랐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는 기본적인 루틴마저도 상쾌하고 정돈된 모습으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하기로 했다. 언젠가부터 샤워는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싫다는 두려움으로 했고, 머리 말리는 과정은 예쁨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하고 있었다.


타인을 사랑하겠다는 이 시도는 나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싶은, 완전히 나를 위한 동기에서 시작했다. 나의 마음과 연결되어 나의 욕구와 느낌을 자유롭고 원활하게 느끼기 위해서다. 나를 위하기 위해 타인을 위한다는 게 아이러니 같으면서도 맞는 방향 같기도 하다. 

일단 해보면서 나의 내면에 변화가 있는지를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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