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준이의 부반장선거
48화 준이의 부반장선거
준이가 저학년일 때 나는 준이에게 반장 선거에 나가보라고 여러 번 등을 떠밀었다.
경험 삼아 한 번 해보라고 실패해도 괜찮다고 그런 말들을 꽤 그럴듯하게 늘어놓았다.
하지만 준이는 늘 같은 대답이었다.
“난 할 줄도 모르고, 할 이유도 없어.”
그 말이 어찌나 단호하던지 더는 밀어붙이지 못했다.
고학년이 되면서 나는 오히려 조심스러워졌다.
아이들이 조금씩 날카로워지고 서로의 다름을 장난처럼 건드리는 시기.
준이의 어눌함이 누군가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나서지 않는 것도 용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런데 6학년이 된 어느 날 준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엄마, 나 부반장 해볼까?”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반장도 아니고 부반장이라니 그 미묘한 현실 타협이 더 놀라웠다.
이유를 묻자 준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 애한테 멋진 남자이고 싶어.”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세상 모든 동기 중에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예측 불가능한 동기.
짝사랑.
준이가 2학년 때부터 짝사랑하다 결혼 포기까지 했던 친구와 같은 반이 된 것이다.
준이는 공약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기대했다.
‘친구들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선생님을 도와 깨끗한 교실을 만들겠습니다’ 같은 어디서 본 듯한 모범 답안들.
그런데 종이를 들여다보는 순간 나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했다.
교실에 텃밭 만들기
돌도끼 만들기 체험
자연 관찰
“이게 뭐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교실에 텃밭이라니 상추라도 키우겠다는 건가.
돌도끼는 또 뭐람.
6학년 부반장 공약에 구석기 체험이 들어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런 거 말고, 친구들 돕겠다고 써야지.”
나는 최대한 현실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보려 했다.
하지만 준이는 고개를 저었다.
“못하는 걸 한다고 하면 거짓말이야. 나는 이건 할 수 있어.”
그 말이 이상하게도 더 믿음이 갔다.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는 고집.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조금은 꾸며도 될 텐데 이 아이는 끝까지 자기 방식이었다.
선거 당일 나는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혹시 한 표도 못 받으면 어쩌지.
자기 이름도 못 쓰는 건 아닐까.
아이들 앞에서 상처받고 울지는 않을까.
별별 걱정이 다 들었다.
그리고 하교 시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준이의 어깨가 유난히 올라가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떨어졌다면 축 처져 있어야 정상 아닌가.
“됐어?”
내 질문에 준이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응, 떨어졌어.”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여?”
준이는 신발을 벗으며 씩 웃었다.
“6표 받았어.”
순간 나는 멈칫했다.
여섯 표.
그 숫자가 준이에게는 어떤 의미일지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후보가 다 여학생이었거든. 나만 남자였어.”
준이는 마치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처럼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우리 반 1등 남자 같아. 좀 멋진 것 같아.”
그 말에 나는 결국 웃음이 터졌다.
세상에 낙선하고 이렇게 당당한 후보가 또 있을까.
여섯 표로 ‘1등 남자’라는 타이틀을 만들어내는 이 놀라운 해석 능력이라니.
준이는 이어서 말했다.
“2학기에 또 나갈까?”
그 눈빛은 이미 반쯤 당선된 사람의 그것이었다.
나는 그날 밤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늘 아이에게 ‘현실적인 선택’을 가르치려 한다.
더 많은 표를 받을 수 있는 공약
더 안전한 길
덜 틀릴 방법.
그런데 준이는 달랐다.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도전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솔직하게 내걸었고 결과마저 자기 방식으로 해석해 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처받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상처받을 틈을 주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떨어졌다’는 사실보다 ‘6표를 받았다’는 사실을 더 크게 보는 마음.
그 여섯 표 속에 담긴 자기 존재의 증명. 누군가는 그 공약이 웃겼을 수도 있지만 또 누군가는 그게 재미있어서 혹은 진짜 같아서 한 표를 던졌을 것이다.
나는 그 여섯 명의 아이들이 고마워졌다.
그리고 조금 부끄러워졌다.
아이를 지켜주겠다는 이 유로 나는 너무 일찍 안전한 길만 권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상처받지 않게 하겠다는 마음이 도전할 기회까지 막고 있었던 건 아닐까.
준이는 그 뒤로도 가끔 생각나는지
“엄마 교실에 텃밭 만들면 진짜 재밌을 텐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제 그 말을 말리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뭐 키울 건데?”
그러면 준이는 진지하게 대답한다.
“수박이랑, 토마토. 그리고 당근도.”
교실 바닥을 뒤집어 당근을 심을 생각을 하는 아이.
돌도끼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당당히 내거는 아이.
짝사랑 하나로 세상에 도전장을 내미는 아이.
그 아이는 오늘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라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성장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