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이 시작되고 있는 지금,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모 의대생 게시판에 패륜적인 글들이 올라와 화제가 되고 있다. ‘조센징들 다 죽어라’, ‘조센징들 다 죽어 없어지는 꼴을 보고 싶다.’ 가히 자멸적이기까지한 이 글들을 보면서 나는 화가난다기보다는 차라리 두려움이 느껴졌다. 내가 분노가 아닌 두려움을 느낀 이유는 이러한 패륜적인 글들에 대한 사회/민족의 반응이,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또 다시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채, ‘그저그렇게 흘러가 버릴까봐서’다.
어느 때부터인지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지만 – 나의 느낌적인 느낌으로는 세월호 사건 전후인 것 같다 – 한국은 자기 파괴적 분노로 가득 찬 사회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저 선은 넘을 수 없다’라는 최소한의 금기, 도덕, 윤리와 같은 것들이 모조리 파괴되고, 쉽게 입밖에 내기 힘든 감정의 가장 밑바닥에나 존재할 법한 더러운 쩌꺼기들을 마구 뱉어내는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한데 이러한 현상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회를 자멸시키는 언어가 난무해도, 아무리 참혹한 말을 뱉어내도 한국 사회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것을 잊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어제와 같은 삶을 이어가면서 무엇인가가 바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라면, 한국 사회는 매우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회다. 우리는 앞서 언급한 자멸적인 말들을 들으면서 괴로워한다. 하지만 금세 잊고 또 다른 사건에 의해 그러한 괴로움을 다시 겪는다. 하지만 이러한 반복적인 괴로움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근본적으로 고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언론 매체를 통해 끔찍한 사건·사고에 관한 뉴스가 매일 전달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한국인들은 그저 ‘그것이 내 이야기가 아니기를’ 빌 뿐이다.
한국 사회가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것은 패륜적인 사건과 말에 대한 반응이 일회적이고 표층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한국인들은 어떤 사건이 터지면 ‘제도적 방비’를 부르짖는다. 제도를 고치고 법률을 고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제도 정비’를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도와 법률을 아무리 고쳐도 그것을 준수할 생각이 없는 한, 더욱 변태적인 사건들이 벌어질 뿐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엔 법률이 난무할 뿐, 그것을 준수해야 한다는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
강제를 수반하는 법률이 아닌 그것을 준수하는 태도로서의 규범이 부재하다는 지점에 이르게 되면 결국 우리는 해당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의 됨됨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도대체 이 사회는 인간을 어떻게 육성·교육해 왔길래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나오는 것이다. 한데 이러한 질문에 이르러 한국 사회를 바라 보면, 우리는 매우 부끄러우면서도 당연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국 사회의 교육, 특히 인문학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최고의 성적으로 대학에 들어간 이른바 사회의 ‘엘리트’가 저토록 저열한 말을 내뱉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인은 태어난 후 누구나 빠짐없이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는 약 12년 동안 의무 교육을 받는다. 누구나 인정하듯 이 12년 동안 모든 교육의 목표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다(이제 이 목표마저 수정되었다. 모든 교육의 목표는 ‘의과 대학’에 가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대학’에 이르는 것이 교육의 최종 목표이기에 모든 것은 수단화된다. 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내용이라도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쓸모 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때 대학은 수단화된 교육을 바로 잡는 성숙의 시공간이 되어 주었다. 1970년대생들까지는 어느 정도 그 느낌을 갖고 있을 텐데, 대학을 다니는 동안 한국인은 국가와 민족, 개인과 집단, 윤리와 도덕 등에 대한 ‘개똥 철학’ - 이러한 표현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얼마나 그러한 가치들을 우습게 봤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 을 읊는 것을 배웠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불완전하게나마 인간이 무엇인지, 도덕이 무엇인지에 관한 개념을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한국에서는 대학마저 취업을 위한 시공간이 되어 버렸다. 이제 대학 교육마저 수단화되어버린 버린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의대생이라는 이 시대 최고의 엘리트들 – 여기서 이 엘리트라는 표현은 결코 긍정적이거나 우호적이지 않다 - 이 ‘조센징 다 죽어라’와 같은 자멸적인 말을 뱉어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이들이 내뱉는 패륜적인 말들에 짐짓 놀라는 척하지만, 실상 이들을 키워낸 것은 한국 사회 자신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인바,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 아닌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한국은 패륜적이다 못해 자멸적인 인간을 키워내는 사회가 된 것일까? 나는 그것이 이 시리즈의 제목인 ‘인문학을 버린 나라/인문학이 버린 나라’에 있다고 본다. 제목을 통해서 곧바로 드러나듯 이 나라는 ‘인문학을’ 버린 나라이자, ‘인문학이’ 버린 나라다. 한국 사회가 인문학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인문학 역시 한국 사회를 버렸다. 서로가 서로를 버린 것이다. 인문학의 근본적인 기능이 인간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사회가 인문학을 버리고 인문학이 사회를 버린 상황 속에서 제대로 된 인간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한국은 인문학을 버렸고, 인문학은 한국을 버렸을까? 이 시리즈의 내용은 바로 이러한 물음에 대한 탐색이다. 인간사의 대부분은 역사적 인과관계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가 인문학을 버리고, 인문학이 한국 사회를 버린 데에도 나름의 역사적 과정과 맥락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생겨난 모종의 현상은 그에 따른 ‘후과’를 만들어낼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