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ramscist Dec 03. 2023

우리는 '서울의 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헬조선'을 읽는 문화-코드

영화 <서울의 봄>이 코로나 사태 이후 불황을 면치 못하던 한국 극장가에 모처럼 훈풍을 몰고 온 모양새다. 더불어 출연 배우들에 대한 평가 역시 호평 일색이다.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를 생각하면 한국 사회가 상당한 진보를 이룬 것은 분명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군대를 동원해 자국민을 살해했던 서슬 퍼런 정권 탄생의 비화를 적나라하게 스크린에 담아낼 수 있는 시절이 도래했으니, ‘표현의 자유’라는 차원에서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진보를 이루어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데 나는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자유’라는 측면에만 초점을 맞춰 한국 사회가 ‘진보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작금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혹시 우리는 ‘서울의 봄’이라는 역사의 질곡에 아직도 갇혀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뭔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이다.

      

아마도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 대다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를 곱씹을 것이다. ‘그래 우리는 해냈다. 그 무도하고 폭압적인 전두환 정권을 마침내 우리는 몰아낸 것이다!’ 이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민주주의의 쟁취’에 한껏 도취해 영화관을 나설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를 한국 사회가 소비/소화하는 방식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회자되고 있는 본 영화에 대한 평가를 보면, 그저 흥행 정도(관객수)에 주목하거나, 연기자들의 호연에만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서울의 봄>이 소재로 삼고 있는 쿠데타에 의한 5공 정권의 탄생이 갖는 함의는 그저 관객수와 연기의 수준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평가야말로 한국 사회가 자신의 역사적 질곡을 얼마나 안이하게 소비하는 데 머물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안이한 소비 방식에 의해 자신들의 ‘해방’을 얼마나 얕은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구분 그리고 정당성의 문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가 상당한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국민감정의 저류에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그것의 성취라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 독재 정권을 몰아내고 민주화를 성취해냈다는 쾌감과 자부심이 영화 흥행의 핵심 동력인 것이다. 한데 우리는 이 시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해 만끽하고 있는 ‘민주화’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자문해 보아야 한다.

     

결론부터 말해보자면, 한국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민주화’는 실상 ‘민주주의화’가 아니라 ‘자유주의화’에 가깝다. 다시 말해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자유주의’를 ‘민주주의’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고, 영화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를 바라보면서 깊이 고민해야 문제 역시 이것이다.

     

우선 자유주의라는 개념을 살펴보자. 자유주의의 핵심은 말 그대로 ‘자유’이며, 그 자유의 구체적인 내용은 ‘각 개인의 행복 추구의 자유’이다. 물론 헬레나 로젠블랫 같은 학자들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자유주의를 가리키는 용어 ‘리버럴리즘(liberalism)’은 근대 이전 ‘타인과 공동체를 배려하는 공동체 윤리’와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었다(헬레나 로젠블렛 지음, 김승진 옮김,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 니케북스, 2023).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로크 등에 의해 자유주의는 ‘개인의 재산과 행복 추구에 관한 자유’로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자유주의는 실상 로크의 개조를 거친 이후의 자유주의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자유주의의 핵심은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 재산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옹호’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자유주의와는 분명히 다른 개념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유가 아닌 ‘평등’이며, 평등한 권리를 가진 ‘인민의 통치’가 민주주의 개념의 핵심이다. 물론 이러한 특성을 가진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깔끔하게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역시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각기 동등한 권리를 가진 정치적 주체를 기본 단위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구별되는데,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달리 개별적인 행복 추구의 권리보다는 공동체, 즉 ‘공적인 것’의 ‘사적인 것’에 대한 우위를 대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민주주의는 불가피하게 ‘독재’ 혹은 ‘결정’의 순간을 수반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이유로 자유주의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공적인 차원을 위해 사적인 차원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리와도 갈등을 빚을 수 있는데, 만약 공동체의 생존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 민주주의는 ‘사적인 것을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다수결에 의한 결정마저 제압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 요컨대 민주주의에는 사적인 것에 대한 공적인 것의 우위라는 ‘난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별한 상태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제는 해당 문제를 언급하는 것조차 지겨운 일이 되었지만, 우리 사회가 오늘날 대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문제는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만약 이 문제를 다수결로 처리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영원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서울에 가장 많은 인구가 몰려 있는 상황에서 해당 문제를 다수결에 부친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가장 많은 다수를 포함하고 있는 서울 중심의 해결책만이 도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자유주의를 민주주의로 착각하고 있기에, 사적인 차원의 이해관계를 보전하는 방식에만 골몰할 뿐, 사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공적인 ‘결정’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민주주의는 역설을 품고 있고 그러한 이유로 민주주의에는 그 본래적 의미와는 모순되는 ‘독재’/‘결정’의 순간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민주주의에는 자유주의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합리적 이해타산을 넘어서는 ‘정당성’의 문제가 포함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사적인 것에 대한 공적인 것의 압도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만약 자유주의가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끊임없는 토론과 협상만이 반복된다면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없다. 또한, 끊임없는 토론과 협상이 결국 사적인 이해로 귀결되어 버릴 경우, 공적 권력은 사적 이해를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 하기에 민주주의가 정말로 공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권력의 ‘정당성’이 요청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울의 봄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질곡     


민주주의에 내재된 역설, 즉 공적인 것의 실현을 위한 독재/결정의 순간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정당성’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는 차원에서 영화 <서울의 봄>을 바라보면 ‘서울의 봄’이 남겨놓은 질곡은 그야말로 심각한 문제가 된다.     


민주주의와 정당성의 문제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서울의 봄’, 즉 쿠데타에 의한 전두환 정권의 탄생은 한국 사회의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보수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전두환 정권의 탄생과 그것이 자행한 광주 학살은 보수 진영에게 ‘친일’이라는 혐의에 더해 ‘자국민 살해’라는 멍에까지 씌워 놓았다. 주지하듯 한국의 보수 진영은 ‘친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바, 전두환 정권에 의해 보수 진영은 매판이라는 혐의와 함께 자국민을 살해했다는 씻을 수 없는 원죄까지 짓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매판이라는 콤플렉스와 자국민 살해라는 원죄를 감추기 위해 더욱더 북한이라는 대외적 위기와 포퓰리즘적 처방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정당성이 없는 세력이 민주주의라는, 정당성을 핵심 동력으로 삼고 있는 정치 체제를 운용하려다 보니, 한국의 보수 세력은 ‘정당성의 부족’이라는 자신들의 태생적 문제를 감추기 위해 북한을 동원하거나, 대중의 심기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단기적인 처방(“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그럼 돈을 줄게”와 같은 수준의), 즉 자유주의적인 처방을 내놓으면서 그것을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포장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심지어 ‘전두환 이후’의 보수주의는 박정희가 가지고 있던 거의 유일한 장점, 즉 ‘카리스마적 지배’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모든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전두환보다 우월한데, 박정희의 쿠데타와 전두환의 쿠데타는 그 정당성이라는 맥락에서 판이하기 때문이다. 전자의 쿠데타는 ‘민주주의의 무력감(장면 정권의 무능)’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후자의 쿠데타는 ‘민주주의에 대한 폭압(심지어 살해)’이라는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그 지향점의 차원에서도 양자는 구분된다. 박정희는 ‘공적인 것에 의한 사적인 것의 압도’를 어느 정도 실천한 반면(새마을운동,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전두환은 자신의 치명적인 원죄 탓에 오직 포퓰리즘적인 차원(이른바 3S(screen, sex, sports)과 같은 대중영합적 조치)에서만 대중을 설득하려 했다.     


전두환 정권이 가진 태생적 한계, 즉 정당성의 결여는 진보 진영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놓았다. 주지하듯 1980년대를 가득 채웠던 구호는 ‘독재 타도’다. 한데 1980년대를 주도했던 ‘*86세대’는 독재를 타도할 줄만 알았지, 민주주의에 독재/결정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하기에 이들은 ‘박정희=전두환’이라는 공식을 설정한 상태에서 박정희와 전두환을 구분하거나, 전자로부터 ‘공적인 것의 우위’와 같은 요소를 추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들의 이러한 반편향성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더욱 극명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 독재가 사라졌으니 모든 것은 개인화, 파편화되어야 했다. 혁명의 시대가 끝났으니 ‘혁명의 대오’는 흩어져야 했고 각자 능력에 맞게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었다. ‘포스트 모던’과 자유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우리는 정말 서울의 봄에서 벗어난 것일까?     


오늘날의 상황, 즉 자유주의를 민주주의로 착각하고 그 결과 사적인 차원의 이해관계가 공적인 결정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영화 <서울의 봄>의 상영은 매우 심각한 문화적 징후로 읽혀야 한다.     


‘서울의 봄’은 한국의 보수와 진보 모두를 진흙탕으로 빠뜨려버린 사건이었다. ‘서울의 봄’에 의해 한국은 ‘결정’ 없는 민주주의, 혹은 민주주의라는 간판을 내건 자유주의에 중독되고 말았다. 보수 진영은 자신의 원죄를 가리기 위해 냉전이라는 구닥다리 수법을 계속해서 구사하는 한편, 포퓰리즘이라는 마약 – 박정희조차 사용하지 않았던 - 을 대중들에게 투여하기 시작했다. 정당성을 상실한 보수 세력은 국민들에게 ‘자신들을 믿고 당장의 어려움을 견디면서 따라 달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자국민을 살해한 전력이 있는 정권/세력을 누가 믿고 따른다는 말인가?     


하지만 보수 세력에 저항했던 이른바 진보 세력마저 결정 없는 민주주의라는 함정에 빠져버렸다는 점에서 시대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 버렸다. 보수 진영이 효과 빠른 마약을 팔고 있고, 시절마다 반복되는 4/5년짜리 선거판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진보 진영 역시 효과 빠른 약을 처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서울의 봄’이 만들어 놓은 아사리판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4/5년마다 나라가 뒤집히는, 장기적인 전망이 없는 ‘단기 민주주의’에 더해, 정당성이 없는 (그리고 이제 국정 운영 능력마저 상실한) 보수 세력이 내놓는 대중영합적 정책 그리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진보 세력이 뒤얽히는 정치판은 이제 막다른 길목(민족의 자멸)으로 치닫고 있다.     


하기에 영화 <서울의 봄>은 더없이 징후적이다. 심지어 그것을 소비/소화하는 방식마저 징후적이다. 본 영화의 관객수와 배우의 호연이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영화 흥행의 열매는 모두 제작사와 감독 그리고 연기자가 가져가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관객들은 ‘재밌다’, ‘연기가 좋다’, ‘한국 민주주의 만세’ 정도에서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화'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머리를 짓누르는 ‘서울의 봄’이 남겨놓은 질곡은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서울, 아니 한국에 봄은 올 것인가?     

작가의 이전글 의대 광풍: 그 구조와 내면성에 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