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아침 햇살을 뒤로하고 상준은 유나의 손을 잡았다.
그의 복장은 수수한 면바지에 짙은 남색 코트.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이오니아 자치도시의 자부심,
이오니아 아카데미였다.
하얀 대리석 기둥이 늘어선 고대 그리스 양식과
최첨단 기술이 결합된 이 학교는 그 위용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교장실 앞은 이미 입학 상담을 기다리는
부유한 학부모들로 붐볐다.
상준은 그 줄의 맨 끝에 서서 묵묵히 차례를 기다렸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백발이 성성한 노교장
테오도로스 카라얀니스가 그들을 맞이했다.
카라얀니스는 상준을 보는 순간, 찻잔을 들려던 손을 멈췄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두 눈을 마주하니까 가슴 한구석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차상준이라고 합니다.
제 딸 유나의 입학 상담을 위해 왔습니다.”
상준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차유나 입니다.”
귀여운 배꼽인사가 분위기를 환하게 만들었다.
“자, 환영합니다.
우리 유나 양은 뒤에 선생님 따라가서 맛있는 거 먹고 있을까요?
선생님은 유나 아버님과 할 말이 있으니까 잠깐만 놀고 있어요.”
“유나 양? 선생님이랑 같이 아이스크림도 먹고
재밌는 놀이도 같이해요. 자 어서요.”
“네. 아빠 조금 있다 봐요.”
“응. 유나야. 금방 끝날 거니까. 잠시 놀고 있어.”
카라얀니스 교장은 잠시 상념에 빠졌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본 기억이 있는데…’
교장의 본능은 놓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지만,
돈에 대한 욕심이 본능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저 그런데 아버님. 그… 제가 좀 바빠서 말인데,
입학을 허락해 드린다는 가정하에 기부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네요.”
“음… 저희 이오니아 아카데미는 자치도시 1등.
본질에 대한 올바른 접근, 질문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진정한 교육의 장, 아이를 위한 부모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학교,
학교 위에 학교 ‘이오니아 아카데미’랍니다.”
교장은 목이 마른 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말했다.
“죄송하지만, 현실적으로 말씀드려서 5천 이하의 기부금으로는
입학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분들께 미안해서…”
직관적으로 욕심 많은 유형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상준은 입학 서류 대신 허공을 가볍게 응시했다.
6급까지 능력은 에너지 소비 없이 유지하는 수준이라
EQ가 즉각 반응했다.
[EQ: 마스터, 현재 AI들 관리에 신경을 쓰다 보니
마스터가 필요한 부분은 어센던트에 위임해 놓을게요.
미안해요 마스터. 애들 관리 끝나면 마스터만 바라볼게요.]
‘괜찮아. EQ가 바쁘다는데, 내가 미안하지.’
[어센던트: 단장님 EQ의 요청으로 단장님 개인 계좌에 접속합니다.]
‘응, 상황은 보고 있으니 알겠지?
바로 처리해 줘.’
용병 시절부터 쌓아온 10조 원 규모의 자산은
EQ의 정교한 알고리즘 속에서 화폐의 강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어센던트: 단장님. 학교 발전 기금 10억 크레딧 송금을 시작합니다.]
‘송금에 동의하니까 바로 보내.’
[어센던트: 네 마스터, 현재의 모든 상황이
데이터로 남겨지니까 증거가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설마 자치도시 급에서 하요에서 보내는걸 삥땅 치진 않겠지.’
[어센던트: 삥땅이 무슨 말인가요? 과거 자료에도 없는데요?
그리고 지금 그리스 계좌를 통해 기부를 마쳤습니다.]
‘27세기 것들은 삥땅을 모르는구먼…,
우리 때만 해도 척하면 척이었는데. 쯧.’
[어센던트: 네? 단장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니야. 혼잣말이야. 신경 안 써도 돼.’
[어센던트: 알겠습니다. 제가 필요하면 말씀만 하세요.]
‘응. 알겠어.’
그 순간, 카라얀니스의 개인 단말기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에는 1,000,000,000 Credits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찍혔다.
"십... 10억 크레딧?"
교장의 눈이 경련하듯 떨렸다.
10억.
눈앞의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아무리 이오니아 명문 학교라도 딸의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는 비용으로 10억을 지출한다고?
교장은 가볍게 10억을 결제하는 금력에 대한 경외심을 느꼈다.
이 남자가 누구든, 그는 결코 거슬러서는 안 될 신과 같은 존재였다.
“헤헤헤~, 날씨가 무척 덥지요?
어이 거기 놀고 있는 코바, 뭐 하나?
아버님께 딸기라떼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
이 카라얀니스. 유나 양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아버님.”
눈이 마주친 코바는 마치 사람이 코를 파듯이
손가락을 튕기면서 AF주술사처럼 작고 빠르게 속삭였다.
꿍시렁 꿍시렁. 꿍시렁 꿍시렁.
“뭐 해? 코바. 얼른 가져다 드려!”
“예~ 사장님, 갑니다. 가요.”
“야야. 사장님 아니라고 교장이라고 몇 번을 말해.”
“아휴…, 아버님. 원래 저런 애가 아닌데,
제가 바빠서 작년 점검을 빼먹었지 뭡니까.”
“아닙니다. 다 이해합니다. 교장 선생님.”
잠시 후 생기 없는 표정으로 딸기라떼를 가지고 온 코바.
코바는 의욕이라곤 없는 상태로 초점 없이 상준을 스캔했다.
그리고는 업데이트되는 극비 목록.
“으헉!, 아, 그, 어, 아버님?
딸기 충성합니다. 사랑 드세요.
교장이 나빠요. 아버님 존경합니다.”
무심결에 코바에게 연동했는데,
욕심 많은 교장이나 이 녀석이나 성향이 비슷했다.
“아~ 예.”
상준은 이제 대답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욕심만큼 눈치가 빠른 교장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아카데미 시설을 천천히 소개해 주기로 했다.
고퀄리티 초대형 미술실,
최첨단 스카이 무용실.
그리고 넓고 정갈한 식당.
“교장 선생님. 공용 화폐인 원화로 40억, 즉 40억 크레딧을
추가로 기부할 테니, 급식은 시장에서 파는 흔한 분자 재조합
식품이나 유전자가 변형된 것들 이어서는 안 됩니다.
진짜 흙에서 햇빛 받고 자란 내추럴 그로운(Natural Grown)
제품이어야만 합니다. 소금 한 꼬집까지 말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아니 위대한 아버님께서 아이들을 위해 이렇게 크게 쓰시니
교장인 저는 성심을 다해서 따를 뿐입니다.”
키라얀니스는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마주 비벼대며 따라다녔다.
상준은 교장의 옆에서 여전히 무기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코바를 스치듯 쳐다보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 어지간히 배부르겠군.’
코바는 갑자기 몰려오는 서늘한 기운에 몸을 잠시 떨었다.
시간은 흘러 수업이 끝나고…
상준이 개인적으로 걱정했던 장면.
아이들을 데리러 온 어머니들이 정문 앞에 가득했다.
아이들은 엄마의 품에 안겨 재잘거리며 오늘 배운 내용을 쏟아냈다.
다정한 포옹, 땀방울을 닦아주는 부드러운 손길.
그 평범한 온기가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유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상준과 엘레나의 손을 잡고 있던 유나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빠..."
유나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상준을 불렀다.
"유나는 괜찮아."
상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7급으로 각성한 후, 새롭게 설치된 상태창에는
유나의 현 상태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거짓을 말하고 있음]
[심박수 빠름]
[호흡이 불규칙함 : 과한 호흡]
[스트레스 수치 상승]
“…”
저택으로 돌아와 유나를 재운 상준은 곧바로 안토니오를 불렀다.
“안토니오, 유나를 부탁하네. 나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
“단장님, 그곳에 가시려는 겁니까?”
상준은 대답 대신 코트 깃을 세웠다.
“다시 말하지만, 잘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시기를…”
그날 밤, 어센던트는 오랜만에 존재감을 과시하며 은신모드를 풀었다.
상준이 날아서 탑승하자마자 땅요를 향해 서서히 고개를 돌렸고
마하 6의 순항 속도로 느릿하게 날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