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물결
유나가 잠든 밤, 상준은 테라스 너머로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이오니아 해의 밤물결을 응시했다.
전쟁터에서 느꼈던 살기 어린 정적과는 달랐다.
생명이 숨을 고르는 듯한, 밀도 높고 평온한 고요였다.
그때, 등 뒤에서 규칙적이고 부드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든 아가씨의 얼굴이 꼭 천사 같더군요. 단장님.”
안토니오였다.
“고맙네. 한국 지부 자치도시에는 이런 말이 있지.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거라고.”
상준이 대답하며 뒤돌아보니
안토니오 곁에는 수제자 격인 젊은 집사 레오,
그리고 유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살피는
전담 메이드 엘레나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간단한 안주와
투명한 호박빛이 감도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자네들인가.”
상준은 평소처럼 딱딱한 명령조로 대하려다
이내 셔츠 단추를 하나 풀며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같이 한잔하겠나? 명령이 아니라, 청하는 걸세.”
그 말 한마디에 무거웠던 공기가 단숨에 녹아내렸다.
안토니오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맛이 깊고 클래식한
그리스 전통 술 우조(Ouzo) 한 병을 땄다.
옆에서 엘레나가 찬물을 천천히 부었고
마지막으로 레오가 얼음을 넣자 투명했던 우조가
우윳빛으로 변화하며 향이 피어오르는,
이른바 루쉬 현상이 일어났다.
테라스 한쪽에서 잔잔한 재즈 선율이 흘러나왔다.
안토니오의 세심한 선곡이었다.
“단장님께서 설거지를 하셨다는 소문이
직원들 사이에서 파다합니다.
덕분에 주방 녀석들이 자기 직장이
없어지는 줄 알고 사색이 되었더군요.”
안토니오의 농담에 레오와 엘레나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풋…”
“하하하.”
상준 역시 미소를 지으며 술을 들이켰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경험하고 싶었네.”
“이해합니다. 단장님.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한 단장님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안토니오가 화두를 던지자,
유나를 담당해서 보살피는 엘레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맞아요. 단장님 취임식 이후로 세계급 전쟁이 터져서
저희뿐만 아니라 이오니아 자치도시 시민들이 엄청난
혼란을 겪었으니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레오는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나는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 또래들은 휴머니스랑 직접 맞서 싸우자고
커뮤니티에 결사대를 조직하고 난리도 아니었죠.”
“그 투지와 용기를 허무하게 만들어서 미안하군.”
이후로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자치도시나 저택의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엘레나가 뜻밖의 한마디를 했다.
“단장님, 오늘 아가씨와 정원을 거닐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또래 아이들이 모인다는 학교에 가보고 싶다구요.
교복, 공부, 친구들과의 교류. 이런 것들을 말씀하셨어요.”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상준의 손길이 멈췄다.
학교.
그것은 제라프의 보호 구역 밖으로 유나를 내보내는 일이었고,
상준에게는 전선을 하나 더 늘리는 것보다 위험한 도박이었다.
“내 딸을 표적으로 만들 수는 없네.
이 세상엔 아직 EQI에 반감을 가진 자들이 차고 넘치지.
휴머니스는 그 대표 격이었을 뿐이야.”
상준의 단호한 말에 안토니오가 제자 레오에게
눈짓으로 술잔을 채우게 했다.
그리고는 웃음을 거두고 낮은 목소리로 조언을 건넸다.
“철통 같은 성벽은 적의 공격은 막아주지만,
자라나는 아이들의 시야까지 가두어버립니다.”
상준은 대답 없이 밤바다를 바라봤다.
안토니오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아빠로서의 책임감은 이성보다 앞서고 있었다.
“무엇보다...”
안토니오가 잠시 말을 멈추고 상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은 서로의 가족 이야기를 합니다.
아가씨가 가장 먼저 맞닥뜨릴 시련은 자객의 칼날이 아니라,
‘너희 엄마는 어디 계셔?’라는 아주 사소하고도 잔인한 질문일 겁니다.”
순간, 상준의 심장 근처가 예리한 무언가에 찔린 듯 시렸다.
“크흠, 나도 알고 있네.”
아멜리.
그 이름이 가슴속 깊은 수렁에서 떠올랐다.
안토니오의 충고는 술보다 독하게 상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엘레나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상준을 바라봤고,
젊은 집사 레오는 대화의 무게에 압도된 듯 고개를 숙였다.
음악은 어느덧 애절한 첼로 연주로 바뀌어 있었다.
상준은 마지막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술은... 자네들 덕분에 아주 달았네. 고맙군.”
상준은 다시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 뒤로 안토니오와 사용인들이 깊게 머리를 숙였다.
유나의 방 앞,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미세한 온기 속에서 상준은 멈춰 섰다.
“엄마…, 엄마 보고 싶어.”
유나의 잠꼬대는 상준의 마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달갑지 않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현실.
‘그런가…, 내가 채워줄 수 없는 빈자리인 건가?’
생각이 깊어지는 상준.
하늘 가득 한 땀 한 땀, 은하를 수놓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