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품은 밤
이오니아 제도의 거친 파도가 빚어낸 걸작,
그리스 나바지오 해변(Navagio Beach)의 절벽 위에는
오래된 전설처럼 내려오는 대저택이 하나 있다.
깎아지른 듯한 하얀 석회암 절벽과 코발트블루의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은 이 저택은, 거대하고 무거운
제라프 본부와는 전혀 다른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따스한 지중해의 햇살이
정원의 푸른 잔디 위로 비단처럼 쏟아졌다.
정원 난간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진분홍색 부겐빌레아는
해풍에 몸을 맡긴 채 기분 좋은 향기를 내뿜었고,
곳곳에 배치된 종려나무들은 한낮의 여유로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평화의 리듬을 완성하고 있었다.
상준은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현관에 들어섰다.
뺨을 간지럽히는 짭조름한 바다 냄새와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흙의 생동감.
그의 초월적인 감각이 포착하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이 내뿜는 활력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단장님.
그리고 유나 아가씨.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택의 육중한 오크나무 현관문이 열리자,
단정한 연미복 차림의 중년 신사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30년 넘게 이 저택의 역사를 지켜온 집사 안토니오였다.
그의 뒤로는 양옆으로 줄을 맞춰서 상준과 유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용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총 단장 전용 저택에 상주하며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단장을 맞이할 준비를
매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 식사는 지중해식 해산물 요리와 유나 아가씨를 위한 부드러운 크림수프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상준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절대적인 명령과 복종의 계급 세계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 받는 환대는 생경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을 간지럽히는 묘한 자극이었다.
"우와아! 아빠, 저기 좀 봐요!
백사장에 커다란 배가 있어요!"
유나가 거실의 통창을 가리키며 아이처럼 환호했다.
절벽 아래, 눈부시게 하얀 모래톱 위로
반쯤 파묻힌 낡은 난파선이 보였다.
상준은 유나의 곁으로 다가가 창밖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아마 오래전에 썩어 없어졌을 배였다.
그렇게 알고 있었고, 사라진 시기도 모른다.
부서진 판재도, 흩어진 철 조각도 없었다.
배는 마치 필요한 만큼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주변.
햇빛이 닿는데도 그림자가 이상하게 맺히는 곳이 있었다.
아주 옅은 푸른빛.
바다와 닮았지만 바다의 색은 아니었다.
물이 스며든 것도, 그늘이 진 것도 아니었다.
유나의 작은 손이 자신의 옷자락을 꼭 쥐는 순간,
상준은 상념에서 벗어나 비로소 세상의 중력을 느꼈다.
“유나야. 우리 가까이 가볼까?”
상준의 말에 유나가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안토니오 집사. 잠시 내려갔다 올게.
식사는 다녀온 다음에.”
“네 단장님.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호감형 외모와 부드러운 미소,
그리고 정중한 언행에서 진심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안토니오 집사. 볼수록 마음에 드는 사람이군.’
유나와 잠시 손을 흔들어준 후
곧바로 절벽 위에서 점프하자
유나가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꺅, 꺄아아악, 이야아아, 하하핫.”
사람이 하늘을 날고 있으니 무섭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가 보다.
“아빠 무서운데 기뻐서 좋아요.”
무슨 감정이냐. 그건.
하지만, 상준도 유나를 평가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스스로 날 수 있게 된 것이 불과 며칠 안 됐기에
가슴 터질 것 같은 스릴과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유나 앞에서 티를 내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바닷가의 시원한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천천히 하얀 백사장 위에 발을 디뎠다.
부드러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기분 좋게 감겼다.
나바지오의 백사장은 단순히 모래가 펼쳐진 곳이 아니었다.
EQI에서 최신 기술로 정화되고 가꾸어진 모래톱은
모래알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투명하게 빛났고,
발끝에 닿는 촉감은 마치 잘게 부서진 구름을 밟는 듯 포근했다.
상준은 잠시 멈춰 서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맨발로 느끼는 이 순수한 자연의 감촉은 낯설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다.
유나 역시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부드러움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모래 위에 작은 발자국을 남겼다.
상준은 가슴 깊숙이 바다의 짠 내음과 모래의 온기를 들이마셨다.
이윽고 그 푸른빛의 경계에 다다르자,
모래의 감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옅은 물안개 위를 걷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아빠, 여기 발이 안 빠져요! 저기 진짜 배가 있어!”
유나가 신기한 듯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이곳은 나바지오 해변의 푸른 영역이었다.
빨간 영역이 태고의 자연과 환경을 보전한다면,
이 푸른 영역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사라진 문화재나 상징물을
홀로그램과 분자 재조합 기술로 재현한 체험 구역이었다.
유나가 발을 딛는 순간, 모래 위로 수백 년 전 이곳에서
잠들었던 전설적인 난파선의 갑판이 솟아올랐다.
눈으로만 보는 가짜가 아니었다.
손을 뻗으면 거친 나무의 질감이 느껴졌다.
30분간은 누구나 직접 만지고 볼 수 있는 실제적인 공간이었다.
하지만 상준의 머리 위는 조금 다른 층위의 기술이 작동하고 있었다.
유나가 난파선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어센던트의 외갑에서 분리된 블랙나이츠 2기가 은신 모드로 내려앉았다.
블랙나이츠의 초지능 AI는 유나가 체험 중인
이 공공 시스템에 즉각 접속했다.
혹시 모를 시스템 오류로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갑판의 강도를 보강하고 유나의 움직임에 맞춰
실시간으로 물리 엔진을 최적화했다.
아이에게 가장 안전한 놀이터로 변모한 것이다.
상준은 내심 만족했는지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파선 체험을 마친 상준과 유나가 저택으로 돌아오자,
안토니오와 사용인들이 여전히 따뜻한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단장님. 유나 아가씨. 즐거운 시간 되셨습니까?
이제 저녁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안토니오가 앞장서서 육중한 다이닝 룸의 문을 열자,
시원하게 뻗은 통창 너머로 붉게 물들어가는
나바지오의 석양이 가장 먼저 그들을 반겼다.
중앙의 긴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이미 완벽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하얀 자수보 위로 은은하게 빛나는 촛불과
정갈하게 놓인 식기들.
그리고 코끝을 간지럽히는 갓 구운 빵의 고소함과
신선한 해산물의 향취가 다이닝 룸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유나는 처음 보는 화려하고 따뜻한 식탁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상준의 손을 꼭 쥐었다.
"우와아... 맛있는 냄새가 나요!"
"유나 아가씨를 위해 준비한 특별한 메뉴들입니다.
어서 앉으시지요."
안토니오가 유나의 키에 맞춰 의자 높이를 조절하자,
상준 역시 그 옆자리에 몸을 실었다.
가끔 이런 아날로그 방식의 의자가 감성을 자극한다.
전장에서는 서서 전투 식량을 쑤셔 넣거나
차가운 금속 바닥에 앉아 한 끼를 때우는 게 일상이었던 상준이었다.
핸즈 프리나 전자동 방식의 편안함도 좋지만,
자신을 위해 정성껏 마련된 자리에 앉는다는 것.
그 사소한 행위가 상준에게는
묵직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상준은 테이블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용인들의 따뜻한 눈빛을 읽었다.
그들의 미소에는 명령에 의한 가식 대신,
새로운 주인을 향한 순수한 환대가 깃들어 있었다.
"그럼, 감사히 먹도록 하지."
상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나는 기다렸다는 듯 수저를 들고
재잘재잘 오늘의 무용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백사장의 부드러움부터 난파선에서 만난 푸른빛의 신비함까지.
사용인들은 아이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재잘거리는 아이의 목소리와 식기가 부딪치는 맑은 소리,
그리고 창밖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어우러져
나바지오 대저택의 첫 번째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었다.
상준은 그들의 눈빛에서 따뜻한 유대감을 읽었다.
식사를 마친 후, 상준은 주방으로 향했다.
안토니오가 놀란 얼굴로 그를 따라왔다.
"단장님, 부족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직접 설거지를 좀 하고 싶군.
오랜만에 손으로 뭔가 해보고 싶어서 말이야."
상준의 말에 주방의 사용인들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안토니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총단장이 설거지를 하는 진풍경.
거친 비누 거품 속에서 상준은 전투 슈트 대신,
앞치마를 두른 평범한 가장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고, 유나는 새하얀 침대 위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준은 유나의 방으로 들어서며 벽면에 달린 조명 스위치를 눌렀다.
차가운 백색광 대신, 아늑한 주황색 불빛이 방 안을 감쌌다.
그리고 상준이 꺼낸 작은 장난감 하나.
그것은 우주선 시점에서 우주를 탐험하는 홀로그램 무드등이었다.
방 천장과 벽면에 은하수가 펼쳐지고 수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거대한 유성우가 스치듯 지나쳐가고,
행성들 속에서 유영하는 환상적인 우주탐험이 유나의 방에 재현되었다.
“와아! 아빠, 나 진짜 우주에 온 것 같아요!”
유나의 눈은 별빛처럼 반짝였다.
뭐가 그렇게도 궁금한 게 많은 건지.
‘천진난만하고 앙증맞은 귀여운 입술로
같은 질문을 100번이나 반복하다니.’
적절한 타이밍에 동화책으로 화제를 전환하는 데 성공한 상준.
유나의 옆에 앉아, 안토니오가 미리 준비해 둔 동화책을 펼쳤다.
책 속의 캐릭터들이 작지만 실제처럼 튀어나와
정해진 이야기대로 움직였다.
처음 보는 신기한 동화책에 집중하던 유나는
어느새 새근새근 꿈나라를 찾아갔다.
상준은 잠든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혹시나 유나가 깰까 봐 나무늘보처럼
밀리미터 단위로 천천히 침대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상준.
상준은 믿음직한 침대를 보며
신뢰가 간다는 음성으로 유나의 방을 채웠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너만 믿는다.’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유나의 곁을 빠져오는 데 성공한 상준은
소리 없이 승리의 포즈와 포효를 하며 방문을 살짝 닫아주었다.
‘더없이 완벽했다.’
아버지가 되어가는 첫 번째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