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이름의 무게

화이트 헤븐

by 훌륭하다


화이트 헤븐.


지구의 소음이 소거된 진공의 성역과 같았다.


AID 7급 초월자의 의지가 빚어낸 황금빛 파동이


벽면을 타고 흐르며, 외부의 시간조차 거부한 채


고요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그 정적의 중심에 낡고 투박한 기계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상준은 그 낡은 캡슐 앞에 섰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수만 명의 생사를 결정짓던


그의 손이 차가운 금속 표면 위에서 갈 길을 잃고 배회했다.



그때, 캡슐 하단에 눌어붙은 먼지 사이로


빛바랜 인식표 하나가 상준의 시야에 들어왔다.



[식별 번호: 01] [성명: 차유나]



“차... 유나.”



상준의 입술이 경련하듯 떨렸다.


휴머니스의 목을 치고 기지를 파괴하며 전설을


써 내려가는 동안, 정작 그는 자신의 핏줄이 가진


이름 석 자조차 가슴에 새기지 못했다.



물론 자신의 탓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기에는


이 작고 낡은 캡슐은 상준의 가슴을 그 무엇보다 무겁게 내리눌렀다.



상준은 무거운 납덩이를 매단 듯한 기분으로


캡슐 유리에 이마를 맞댔다.



캡슐 안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생명의 진동을 포착했다.


생체 리듬을 인식한 상준의 내면은 더욱 참담하게 무너져 내렸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피를 흘렸는가.’



아마돈 코어가 내뿜는 찬란한 황금빛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더러운 오물처럼 느껴졌다.



“... 아빠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었군.”



그의 자조 섞인 목소리가 백색의 공간에 공허하게 흩어졌다.


7급의 권능으로 세상을 재편할 수는 있어도,


잃어버린 10년의 다정함을 되돌릴 방법은


우주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치이익-



상준의 떨리는 손가락이 최종 해제 버튼을 눌렀다.


캡슐을 봉인하던 냉각 가스가 안개처럼 쏟아져 나왔다.


10년간 박제되었던 시간이 해동되며 발생하는


비릿한 금속 향과 미지근한 온기가 공간을 채웠다.



투명한 유리 덮개가 천천히 열리자,


그 안에서 실금 같은 숨을 내뱉는 작은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준은 숨을 멈췄다.



7급의 신체는 산소가 없어도 수 시간을 버틸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숨 쉬는 법조차 잊은 듯했다.



파르르, 아이의 속눈썹이 떨렸다.



상준은 자신의 거친 손을 아이의 뺨 근처에 가져다 대다가,


혹여나 자신의 손에 묻은 씻기지 않은 핏비린내가


아이를 더럽힐까 봐 다시 거두어들였다.



하지만 그 본능적인 망설임을 깨뜨린 것은 아이의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 으음.



작은 신음과 함께 유나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10년의 어둠을 뚫고 나온 눈동자는 맑고 깊었으며,


그 안에는 상준의 일그러진 얼굴이 거울처럼 비쳤다.


유나는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한참 동안 상준을 바라보았다.



상준은 심장이 터져 나갈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아이가 자신을 거부한다면, 혹은 두려워한다면?’


하는 걱정들이 끊임없이 내면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이의 작은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 아빠...?



그 짧은 부름에, 상준의 오만했던 영혼은 완전히 바스러졌다.


그는 아이를 품에 안는 대신,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려


딸의 작은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보석 같은 아이는 상준이 아빠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유나의 손등을 적셨다.



“그래... 유나야. 아빠다.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못난 아빠가 왔다.”



상준은 캡슐 앞에서 울다가 웃으며 선조들이 금기시했던


특정 털이 자라나는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지이이잉.



화이트 헤븐의 육중한 격벽이 열렸다.



대기하고 있던 제라프의 간부들과 의료진은 일제히 숨을 멈췄다.


부서진 아머 사이로 드러난 상준의 품에는,


세상의 모든 빛을 모아 빚은 듯한 작은 아이가 안겨 있었다.


상준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유나에게 전달되는 아주 작은 충격조차 아마돈 코어의 파동으로 상쇄해 가며...



“단장님….”



리나가 다가와 입을 열려했으나, 상준의 눈빛을 보고 이내 멈췄다.


상준의 눈은 여전히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환희가 뒤섞여 있었다.



상준은 유나를 의료 침대에 눕히는 대신,


자신의 겉옷으로 아이를 감싸 안은 채 본부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그에게는 딸과의 재회만큼이나 미뤄둘 수 없는 ‘빚’이 있었다.



중앙 광장에는 생존한 제라프 대원들과 포박된 포로들이 집결해 있었다.


하지만 광장은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승전의 함성 대신, 무겁고 습한 정적이 광장을 짓누르고 있었다.



상준의 시선이 대열을 훑었다.


한때 익숙했던 얼굴들이 보이지 않았다.


지상의 전투, 그리고 강철 성소의 지하 층계마다 산화해 간 수많은 전우들.


그들의 자리는 주인 없는 총기와 찢어진 부대 마크만이 대신하고 있었다.



상준은 하요 광장 한가운데 솟아오른 거대한 위령비 앞에 섰다.


유나는 아빠의 목을 꼭 껴안은 채,


낯선 풍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나야, 저분들을 봐라.”



상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7급의 의지가 실린 목소리는 스피커를 통하지 않고도 모두의 뇌리에 직접 박혔다.



“너를 지우려던 세상에 맞서, 너를 되찾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 기사들이다.

네가 오늘 처음 본 이 하늘조차, 저들의 피로 닦아낸 것이다.”



유나는 아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향해 작은 손을 흔들었다.


그 천진난만한 몸짓에, 강철 같던 요원들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상준의 눈이 이번에는 리나를 향했다.


EQ의 CF 모듈 입력장치를 이용해 셀 에너지를 이미지화하고 싶다고.


고개를 끄덕인 리나가 땅요의 코바에게


대용량 CF모듈을 가져오라고 오더를 내리자


어센던트 1기가 즉시 땅요에서 코바를 태우고 다시 올라왔다.



상준은 모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론적인 것은 모르지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아마돈 코어가 고동치기 시작했다.


코어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 입자들이 나비 떼처럼 날아올라 광장을 메웠다.


그것은 전사자들의 유해 속에 남아있던 셀 에너지들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EQ : 데이터 싱크로율 99% — 모듈의 데이터를 구현합니다.]



엑소퀀트의 상태창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일상으로의 복귀를 알리는 신호 같아서


상준의 마음이 점차 안정되었다.



광장 곳곳에서 빛의 기둥이 솟구치더니,


죽어간 전우들의 형상이 홀로그램처럼 하나둘 나타났다.


마치 사라질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그들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밝고 환한 미소를 얼굴에 그리고 있었다.



“우리는 전우를 잊지 않는다.”



상준의 선언과 함께 황금빛 잔상들이


경례를 건네며 대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예식이 아니었다.


죽은 자들에게는 명예로운 안식을,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앞으로 지켜야 할


이유를 각인시키는 초월적인 의식이었다.



그 광경을 제라프 감옥의 통창으로 지켜보던


아멜리 뒤부아는 멀리서 조용히 읊조렸다.



“상준 씨… 유나를 잘 부탁해요.”




EQI 최고 위원회.



“메를린 릴리 위원장님. 이제 휴머니스 없어졌으니,


딸과 함께 나바지오 저택에서 지내겠습니다.”



“지금까지 고생한 단장에게 그 정도 혜택은 줘야지.


재택근무라 생각하고 편하게 쉬게. 단, 간부회의는


꼭 참석하도록 하고.”



“네. 위원장님. 어차피 어센던트x가 항시 대기하고 있을 테니


비상시에는 2시간이면 지구 어디든 출동가능 합니다.”



“단장님, 아직 휴머니스 잔당 소탕과


본부 재건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에잉 이 사람. 놀러 갈 거면 같이 가던가.”



제라프 1 팀장 민준과 A.S.A 대장 랜돌이 거의 동시에 말해놓고


서로 머쓱해서 시선을 마주치다가 웃어버렸다.



상준은 품 안에서 쌔근쌔근 잠든 유나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동안 밀린 숙제를 하러 간다. 아빠 노릇이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무거운 임무 말이다.”



상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자, 회의실이 환하게 빛나는 것만 같았다.



“아!, 위원장님 지금 공석인 벨라스와 카엘럼 본부장은


어쩌실 생각이신지 여쭤봐도 됩니까?”



“그거야. 도시 장처럼 벨라스와 카엘럼 간부들 중에서


세계인 투표로 결정할 생각이네.”



“제 생각에는 심층 대응부(D.C.D)와


그 둘 기관 인원을 인사교류 했으면 합니다.


이 기회에 고인 물들을 순환 시켰으면 해서요.


코바들도 동조해서 스파이 짓에 가담한 것을 보면,


초지능 AI나 사람이나 매 한 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이기 전에 섞어놔야 할 것 같아요.”



“숙고해서 생각해 보지, 현재 공개 기관의 본부장이 자네뿐이니.


별일 없다면 자네의 의견이 곧 정책으로 이루어질 거야.”



“감사합니다 위원장님.”



EQ : 마스터!, AI들을 제대로 관리 못해서 죄송합니다.


요즘 신세대 AI들이 보통이 아니라서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다 EQ. 이 세상에서 너만큼 바쁜 AI가 어디 있겠니.


너는 그 자리에서 변하지 말고 네가 할 일을 해라.”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전후 처리에 더욱 고생하실 테니,


더 길게 말하지 않고 가겠습니다.


그리스 저택에서 머무를 생각이니, 시간 되시면 놀러들 오세요.


그럼…”



상준의 신형이 황금빛 궤적을 그리며 하늘로 솟구쳤다.


목적지는 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그리스의 나바지오 해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