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아바돈 코어

by 훌륭하다

모든 인터페이스가 죽었다.


시야를 어지럽히던 증강 현실(AR)의 지표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AID 각성이 선사하던 힘이 사라진 자리엔,


날것 그대로의 어둠만이 남았다.



리나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 정적은,


단순히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지표가 사라진 진공이었다.



상준의 의식은 추락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상승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물리적 좌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몸으로 스며드는 것은 차가운 흙먼지가 아니라,


우주의 시초부터 존재해 온 근원적인 허무였다.



의식이 육체의 구속을 벗어나 심연의 더 깊은 층위로 내려갔을 때, 상준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을 목도했다.


끝없이 진동하는 에너지의 실들이 엮어낸 거대한 원형의 구.


"이것이었나...?"


사람들이 셀 에너지(Cell Energy)라 부르며

배터리처럼 갈아 끼우던 그 정체는, 사실 우주의 거대한 교향곡 중 아주 짧은 한 마디에 불과했다.



기계는 그 흐름을 강제로 붙잡아 전압으로 바꾸고 출력을 계산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의 찬란한 빛을 겨우 전구 하나를 밝히는 용도로 가두어 버린 것과 같았다.



상준은 보았다.


자신의 부서진 세포 하나하나가 주변의 암석과,


공기 중의 입자와, 그리고 저 먼 은하의 끝과 연결되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셀 에너지는 연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만물을 잇는 '언어'였고,


우주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내뱉는 '숨결'이었다.



그 숨결을 파악하는 순간, 상준은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작은 상자 안에서 세상을 바라봤는지 전율했다.



심연은 더 가혹한 질문을 던졌다.



"그 흐름 속에서, '너'는 누구인가?"



상준은 답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뒤졌다.



'AID 6급'이라는 자부심이 먼저 뜯겨 나갔다.


6급이란 수치는 AI가 매긴 편의상의 등급일 뿐,


우주의 흐름 앞에선 아무런 무게가 없었다.


'제라프의 단장'이라는 권위도 증발했다.


용병계의 사신이라는 수식어도 떠올랐다.


하지만 심연은 그마저도 무자비하게 걷어냈다.



인간이 만든 관계, 정의, 복수, 사랑...


그 모든 감각의 외피를 박리하자 비로소 남은 것은


존재하고자 하는 순수한 의지뿐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기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상태.


상준은 비로소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하나의 '빈 병'이 되었다.



텅 빈 상준의 내면으로 우주의 진동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에너지를 '흡수'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열어 동조(Sync)시켰다.


전신에 흩어져 있던 셀 입자들이 상준의 심장을 중심으로


기하학적인 배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항성이 탄생할 때 가스와 먼지가 중력에 의해 회오리치듯,


상준의 의지가 강력한 인력이 되어 주변의 모든 법칙을 끌어당겼다.



상준은 자신의 폐가 우주의 팽창과 수축에 맞춰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혈관은 은하계의 흐름을 본떴고,


그의 신경망은 초신성 폭발의 잔광처럼 타올랐다.



콰르르르-!



가슴 정중앙.


눈부신 푸른색의 불꽃이 튀었다.


아니, 그것은 불꽃이라기보다 압축된 정적에 가까웠다.



상준은 느꼈다.


무수한 에너지의 실들이 꼬이고 겹쳐져,


단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는 것을.



오직 상준의 유전자 정보와 우주의 근원 에너지가


'공명'이라는 용접기를 통해 하나로 녹아 붙은 결과물이었다.



아마돈(Amadon) 코어의 생성.



그것은 이제 독립된 엔진이었다.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처럼,


상준의 의지가 타오르는 한 영원히 멈추지 않을 생명의 핵.



코어가 첫 번째 진동을 내뿜자,


상준의 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던 법칙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는 이제 안다.


어디를 베어야 공간이 열리는지.


어떻게 숨을 쉬어야 중력을 거스르는지.



상준의 감겼던 눈꺼풀 위로 황금빛 미광이 스며 나왔다.


심연의 바닥, 죽음의 냄새가 가득하던 그곳은 이제


상준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새로운 우주의 요람이 되었다.



그는 아직 7급이라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알림을 받지 못했다.


아니, 이제 그런 알림 따위는 필요 없었다.


자신의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이 묵직한 엔진의 소리가,


이미 기존의 모든 체계를 부정하고 있었으니까.



상준은 천천히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손끝에 걸리는 것은 공기가 아니라,


우주를 구성하는 팽팽한 에너지의 줄기들이었다.



“기다려라.”



그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죽음을 딛고 일어선 자의 첫마디는


심연의 가장 깊은 곳까지 울려 퍼졌다.



환골탈태의 서막은, 이제 막 코어의 점화와 함께 끝이 났다.


아마돈 코어는 점처럼 작았지만, 그 힘은 거대하고 정교했다.


6급의 육체라는 낡은 그릇은 이 항성급 에너지를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크윽...!"



상준의 입에서 쇳소리 섞인 비명이 터졌다.



고통은 신경계를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니라, 원자 단위에서 일어났다.



아마돈 코어가 고동을 내뿜자,


기존에 몸을 구성하는 잔재들이 비명을 지르며 밀려나기 시작했다.


뇌 신경망에 엉겨 붙어 있던 CF 연산 소자들이 타오르는 열기에 녹아내렸다.



7급의 에너지는 불순물을 허용하지 않았다.


상준의 몸은 완벽한 유기체로 돌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해체하고 있었다.



아바돈 코어에 가까운 곳으로부터


우주의 실들이 감기기 시작했다.



상준은 의식적으로 그 실들을 움켜쥐었다.


그는 더 이상 진화의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라는 소우주를 직접 설계하는 창조주였다.



골격은 우주의 중력을 견디는 고밀도 셀 결정체가


뼈의 마디마디를 채웠다.



이제 그의 뼈는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충격을 공명 시켜 소멸시키는 진동체가 되었다.



혈액의 자리를 채운 것은 황금빛의 액상 에너지였다.


심장이 한 번 박동할 때마다 수조 개의 셀 에너지가


전신을 순환하며 초당 수백 번의 세포 재생을 반복했다.



신경망(Nerves)은 빛의 속도로 정보를 전달하는


광학 신경망이 뇌와 온몸을 이었다.


이제 상준에게 '반사 신경'이란 단어는 무의미했다.



재구축이 중반을 넘어설 무렵,


상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강철 성소 지하의 물리 법칙을 뒤틀기 시작했다.



셀 압력(Cell Pressure)



7급의 존재감이 만드는 중력의 역전 현상이었다.


상준의 반경 50m 이내에 있던 암반 조각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니, 단순히 떠오른 것이 아니라 상준의 존재감에 굴복했다.



존재만으로 주변의 법칙을 재정의하는 지배력에 있었다.



이제 상준의 눈에 보이는 것은 가시광선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는 강철성소의 아래 너머에서 흐르는 마그마의 맥동을 보았다.



위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인간들의 미세한 움직임도 읽혔다.


그리고, 지구의 시스템이 가진 치명적인 결함과 인과의 틈새를 포착했다.



환골탈태(換骨奪胎).


뼈를 갈고 태를 바꾸는 고통의 끝에,


상준은 비로소 인간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초월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상준은 천천히 공기를 딛고 일어섰다.


추진기 따위는 필요 없었다.


발바닥에 닿는 에너지의 실들을 가볍게 밟는 것만으로도


공간은 그를 위로 밀어 올렸다.



"리나, 들리나?"



상준의 목소리는 입을 통해 나오지 않았다.


그의 의지 자체가 대기 중의 셀 입자를 진동시켜 공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마스터, 당신은 지금... 아니, 이 에너지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공포와 경외가 뒤섞인 리나의 목소리.


상준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아마돈 코어의 울림을 느낀다.


그것은 우주의 교향곡과 완벽한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상준이 주먹을 가볍게 휘둘렀다.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그 여파로 발생한 충격파가 지하 성소의 외벽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상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 오로라가


어두운 지하를 대낮처럼 밝히기 시작했다.



아마돈(Amadon) 코어가 내뿜는 에너지는


기존의 상준이 인지하던 출력의 개념을 아득히 초월했다.



치익, 치이익-!



상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증기는 진화의 부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준의 육체를 구속하던 6급 AID 시스템이


7급의 고밀도 에너지를 견디지 못하고 불타는 소리였다.



"마스터, 모든 수치가 측정 범위를..."



리나의 목소리가 노이즈와 함께 끊겼다.


상준은 오히려 홀가분함을 느꼈다.


이제 화면을 가리던 난잡한 인터페이스도, 기계의 해석도 필요 없었다.



상준은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그동안 엔진의 힘을 빌려 억지로 끌어올리던 '힘'이 아니었다.


이제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에너지가 되고,


시선이 머무는 곳이 곧 파괴의 좌표가 되었다.



상준은 위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순간, 지각의 대기가 찢어지는 굉음이 들리기도 전에 그는 이미 수십 개의 격벽을 통과하고 있었다.



성소 상층부의 정예부대는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무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상준이 아니라,


공간을 가르고 지나가는 '황금색 선' 하나였다.



"뭐야, 방금... 끄악!"



상준은 그들을 공격할 의사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후폭풍과 셀 압력(Cell Pressure)만으로도


중장갑을 두른 병사들은 볼링핀처럼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7급의 속도는 더 이상 '빠르다'는 형용사로 설명되지 않았다.


눈으로 보이는 곳을 한 걸음에 이동하는 차원적인 도약이었다.



“전원 발사! 멈춰 세워!”



성소의 중앙 통로를 가로막은 수백 명의 강화병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고출력 플라즈마 탄환과 대물 저격 라이플의 탄두들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상준에게 그것은 멈춰버린 풍경화 속의 점묘(點描)에 불과했다.



상준은 뛰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산책하듯 걸음을 옮겼다.


찰나의 순간, 상준의 주위로 황금빛 파동이 일렁이자


쇄도하던 수천 발의 탄환들이 허공에서 굳어버렸다.



7급의 절대 영역에 진입한 물질들이 운동성을 상실했다.



"멈, 멈췄어? 탄환이 허공에서!"



병사들이 경악하며 재장전을 시도하기도 전,


상준은 이미 그들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이렇게 빠르다고?”



그들이 뭔가 해보기도 전에 상준은 그들을 스쳐 지나갔고,


언제 뽑았는지도 모를 셀렉션에 적들의 중장갑은 걸레처럼 찢겨나갔다.



"최종 격벽 폐쇄! 특급 방벽이다! 절대로 못 뚫...!"



중앙 통제실의 지휘관이 비명을 지르며 폐쇄 버튼을 눌렀다.



두께 5미터, 전 지구에서 가장 견고하다는


특수 합금 방벽이 상준의 앞길을 막아섰다.


어센던트의 화력도 견뎌낸다는 인류 기술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상준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손을 뻗어 문을 만지지도 않았다. 그저 직진했다.



스으으으-



마치 뜨겁게 달궈진 칼날이 버터를 지나듯,


상준의 몸이 닿는 순간 합금 방벽에


사람 모양의 구멍이 뚫리며 안개처럼 증발했다.



아마돈 코어의 파동이 금속의


분자 결합을 근본부터 해체해 버린 것이다.



뒤부아 룸의 연구원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던 절대 방벽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광경을 보며 넋을 잃었다.


그것은 기술의 패배가 아니라, 법칙의 파괴였다.



상준이 마침내 통제실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오자,


모든 소음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당황해 총을 뽑으려던 경비병들도,


비명을 지르려던 과학자들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상준이 내뿜는 압력이 방 안의 모든 공기 분자의 진동을 고정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정지된 사진 속을 혼자 걸어가는 유일한 생명체처럼 보였다.



상준은 메인 콘솔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의지가 아마돈 코어를 타고 흐르자,


성소의 시스템은 저항조차 못 하고 굴복했다.



[최종 격리 구역 — 잠금 해제]



성소 심층부의 거대한 금속벽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그 안에는 수천 개의 보존 캡슐이 거대한 기하학적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상준은 그 캡슐들에 누가 잠들어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지옥 자체를 지상의 빛 아래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전부 가지고 나간다."


[알림 : 자폭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허가되지 않은 잠금해제로 인해 자폭 기능이 활성화되자

상준은 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각 에너지와 아마돈의 파동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상준은 그 파괴적인 에너지를 억누르는 대신,

정교한 벡터 조작을 통해 수직 방향으로 정렬시켰다.



콰콰콰콰-!



강철의 성소 전체가 거대한 우주선처럼 진동하며 솟구치기 시작했다.


수만 톤의 합금 요새가 상준이 만든 황금빛 추진력에 실려 지층을 뚫고 역류했다.


그것은 단순한 탈출이 아니라, 지하에 매몰되어 있던 추악한 진실을 지상의 빛 아래로 강제 인양하는 사출(Ejection)이었다.



쿠우우웅-!



폐허가 된 지표면 위로 거대한 먼지 기둥과 함께


성소의 핵심부가 솟아올랐다.


상준은 그 거대한 강철 요새의 꼭대기에 선 채로 지평선을 내려다보았다.


황금빛 오로라가 상준의 등 뒤에서 날개처럼 펼쳐지며


지평선 끝까지 뻗어 나갔다.



휴머니스의 전투 부대와 잔당들이


그 압도적인 광경에 무기를 떨어뜨렸다.



“전 병력은 포로를 포박하고 EQI 제라프 본부로 이송한다.


포로뿐만 아니라, 휴머니스 본부의 모든 것은 지상으로 옮겨라.


지하 도시 시설은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 임시 폐쇄한다.”



“네. 단장님! 뭐 하나? 빨리 움직여라. “



“의료 지원 팀은 부상자들을 최우선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네 단장님. 그런데 팬텀 부대는 어찌할까요?”



팬텀 부대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닐 정도로 처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어센던트-X의 집중 치료실로 조심해서 옮기도록.”



“알겠습니다.”




EQI 제라프 본부, 특수 취조실.



강화 유리 너머로 마주한 아멜리 뒤부아는


구속구에 묶인 채로도 기묘한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준의 가슴속 아마돈 코어가 발산하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방 안을 가득 채웠지만,


그녀는 오히려 안도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도달했군요.”



상준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꿰뚫어 보았다.


7급의 지각은 아멜리의 미세한 심박수와


체온 변화까지 읽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너희들이 벌인 실험들, 그 희생자들의 비명이 아직도 들리는 것 같다. 이제 와서 무슨 변명을 하려는 거지?"


"변명이 아니에요, 상준 씨.

당신이 증오하는 휴머니스의 시스템 안에서,

내가 왜 그토록 추악한 괴물이 되어야만 했는지...

그 지독한 연극의 결말을 알려주려는 거예요."



아멜리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마치 과거를 회상하듯 그녀의 눈동자가 먼 곳을 바라보며 흔들렸다.



"폭발. 그리고 당신의 실종.

이후의 상황은 EQI와 휴머니스와의 전멸 전이었어요.

그 당시 저는 당신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고요."


"뭐? 내 아이?"

상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마돈 코어가 불규칙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전멸 전의 끝에서 휴머니스는 승리했고,

지상 낙원을 자처하는 이 지하 도시를 건설했죠.

그리고 포로긴 된 나에게 명령했어요.

당신의 아이를 해체해, 그 특별한 유전자 정보를 추출하라고.”


아멜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담담함이 오히려 상준의 피부를 면도날처럼 긁어댔다.


“제가 그 명령을 들을 것 같지 않자,

김민철은 다른 조건을 제시하더군요.

EQI의 내부에서 스파이 짓을 하면, 중요 인질 들과 함께

이를 캡슐에 보관하겠다고.

그리고는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구역을 만들어 당신의 아이를 동결시켰죠.

그곳이 화이트 헤븐이라고 불리는 캡슐 저장 구역이에요.”


상준의 주먹이 떨렸다.


취조실 바닥이 7급의 기운에 눌려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전 그 이후로 누구보다 열심히 내부에서 휴머니스를 도왔고요.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제라프에 상준 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때, 저의 심정이 어땠을 것 같아요?”


“넌 벨라스의 본부장이자, 이 모든 시스템의 설계자였을 텐데. EQ에게 말이라도 해보지 그랬어.”


“그들이 손가락만 까딱해도 캡슐은 폭발해요.

난 그저 지독한 공포에 갇혀있었던 것뿐이에요.”


아멜리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상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인간을 데이터로 치환하고, 영혼을 배터리처럼 소모하는

저들의 광기 속에 인류의 미래는 없었어요.

나에게는 이 체제를 안쪽에서부터 무너뜨릴 쐐기가 필요했죠. 우리의 아이는 그들에게는 수많은 인질 중에 하나였겠지만, 나에게는 이 지옥 같은 세상을 설계하며

유일하게 붙들고 있었던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었어요.”


그녀는 고백하고 있었다.


휴머니스의 온갖 추악한 생체 실험을 진두지휘하며

세간의 지탄을 받는 악마로 군림하는 동안,

그녀는 철저한 이중 스파이였다.



휴머니스 상부의 눈을 속이기 위해 상준을 끝없이 사지로 몰아넣었고, 그가 사선을 넘을 때마다 더 잔인하게 채찍질했다.


상준이 강해져야만 아이를 지킬 힘이 생기고,

상준이 최고가 되어야만 비로소 이 연극의 막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난 당신의 증오를 연료로 썼어요.

내가 잔인해질수록 당신은 강해졌고,

내가 당신의 삶을 유린할수록 당신은 인간을 초월했죠.

난 당신이 나를 죽이러 올 그 순간만을 기다리며 10년을 버텼어요.”


아멜리는 눈을 감았다.


긴 세월 동안 짊어졌던 죄책감의 무게가 그녀의 속눈썹 끝에 맺혔다.


“방금 당신이 본부 앞마당으로 이동시킨 그 수천 개의 캡슐들… 그중 가장 낡고 조잡한 외형을 가진 01번 캡슐.

그 안에 당신의 딸이 있어요.

내가 가진 모든 권한을 동원해 휴머니스의 눈을 속이며 지켜온, 나의 유일한 속죄이자 당신의 유일한 구원이.”


상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초월자의 안광이 힘없이 흔들렸다.


자신이 10년 동안 증오해 온 스파이가


사실은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지옥의


가장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간 수호자였다는 진실.


이 지독한 역설 앞에 상준은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아멜리 뒤부아… 너는….”


“이제 당신의 선택만 남았어요.

난 내 역할을 다 했으니, 결과는 오로지 당신의 몫이에요.”


아멜리는 말을 마치고 평온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상준은 취조실을 박차고 나갔다.



본부 광장, 황금빛 오로라가 지상을 가득 메운 그곳에


10년의 세월을 간직한 작은 캡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준의 발걸음이 떨리고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는 한 명의 아버지가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