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결착

by 훌륭하다


수직 샤프트를 타고 내려가는 낙하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거대한 기계 괴수의 아가리 속으로 제 발로 기어 들어가는 투신(投身)이었다.


아래쪽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농밀한 죽음의 기척이었다.


이내 도착한 그곳은 도시가 아니었다.

거대한 공동.


기계 장치들이 살아있는 내장처럼 얽혀 맥동했다.

천장에는 수만 개의 케이블이 핏줄처럼 엉겨 붙어

에너지 코어를 움켜쥐고 있었다.


기계와 생체 조직이 뒤섞인 기괴한 강철의 성소.


그 중심, 은백색 옥좌에 김철민이 앉아 있었다.

그의 뒤편으로 열두 명의 그림자.

드라간을 포함한 휴머니스 친위대 12인 전원이었다.


상준이 발을 들이는 순간, 공간의 압력이 수십 배로 증폭됐다.


질식할 듯한 중력의 파도.

셀 에너지를 활성화해서 겨우 상쇄할 수 있었다.



김철민이 입을 열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상준. 부품들을 풀어준 보람은 있었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래서 더 소름 끼쳤다.


그의 곁에 칠흑의 흑연처럼 매끄러운 존재가 서 있었다.


“이 아이를 만드는 데 수만 마리의 알파를 갈아 넣었지.”


김철민이 옥좌에서 턱을 괴었다.


하이 에피머. 실패를 딛고 태어난 정점이다.”



파괴적인 전투생명체.

에피머 진화의 끝.

하이 에피머(High Ephemer).


놈의 눈동자에는 오직 살상만을 위해 정제된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다.


“팬텀, 제라프! 친위대와 침식된 자들을 맡아라.”


상준이 에너지 빔을 뽑았다.

푸른 뇌전이 튀었다.


“하이 에피머는 내가 깬다.”


명령과 동시에 성소는 거대한 도살장으로 변했다.

자칼과 팬텀 팀원들이 친위대와 충돌했다.


드라간의 거대 도끼는 지면을 사정없이 박살 냈고,

친위대원들이 뿜어내는 주술 스킬이 성소의 공간을 조각조각 찢어발겼다.


제라프 대원들에게 이곳은 재앙이었다.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침식된 자들.

벽과 천장으로 밀려오는 에피머의 파도.


자칼조차 세 명의 친위대를 상대로 BS(신내공)를 한계까지 쥐어짜며 버텼다.


위층에서 지원 병력이 급하게 내려오며 겨우 전선을 유지하는 처절한 사투였다.


상준이 폭사하듯 쇄도했다.

초속 200m 이상의 가속.


지면이 폭발했다.


강철 기둥들이 충격파에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콰아앙-!



에너지 빔과 하이 에피머의 손톱이 충돌했다.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놈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었다.


상준의 반응 속도를 완벽히 따라붙었다.



“하이 에피머라… 강하군.”



상준이 낮게 읊조렸다.


놈의 손톱이 상준의 뺨을 스치며 제복 깃을 찢어 놓았다.


0.1초만 늦었어도 경동맥이 날아갔을 터였다.


상준이 AID 스킬로 몰아붙이면, 놈은 거대한 늑대로 변신하며 변칙적인 궤적으로 빠져나갔다.


두 존재가 격돌하는 반경 50m 이내는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금역이었다.


AID와 AF의 에너지가 부딪히며 발생하는 보랏빛 번개가

주변의 모든 것을 분해하고 있었다.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 김철민이 옥좌에서 일어났다.


꽤나 버티는군. 하나 더 만들어주지.”


그의 말이 신호탄이었다.


전장을 누비던 수천 마리의 에피머와 알파들이 갑자기 서로를 물어뜯었다.


희박한 성공률을 물량으로 찍어 누르는 광기였다.



콰득, 콰드득-!


뼈가 부러지고 살이 엉겨 붙는 소름 끼치는 소음.


성소를 가득 채운 비명.


피 칠갑이 된 거대한 10개의 고치가 형성됐다.


EQI 병력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전우의 희생을 담보로 화력을 쏟아부었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서

하이 에미퍼 한 마리가 더 생성되었다.


두 번째 하이 에피머.


“하나로도 벅찬데... 두 마리라고?”


자칼의 목소리에 절망이 서렸다.


두 마리의 하이 에피머가 상준의 사지를 찢기 위해 도약했다.


서서히 조여 오는 살기의 그물.


상준의 눈동자가 투명한 청색으로 물들었다.


“리나, 어센던트-X의 모든 봉인을 해제하고 셀 에너지를 대인모드로.”


[리나: 마스터! 자폭 행위입니다! 신경계가 타버릴 위험이...]


“셀 에너지를 나에게 최대로 주입한다. 즉시 진행해!”



파지지직-!


상준의 등 뒤에서 푸른 날개 같은 에너지 잔상이 폭발했다.


AID 6급의 한계를 넘어 7급의 영역을 엿보는 초월적 출력.


감각이 극도로 예리해졌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느려졌다.



상준이 움직였다.


달려드는 첫 번째 놈의 머리를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대로 강철 바닥에 처박았다.



쿠우웅-!



바닥이 수 미터 함몰되며 괴수의 머리가 산산조각 났다.


이어지는 두 번째 놈의 참격.


고개를 살짝 비틀어 피함과 동시에, 응축된 1.5m의 에너지 빔을 휘둘렀다.


수평으로 그어진 일섬.


하이 에피머의 허리가 두 토막 나며 보랏빛 액체를 흩뿌렸다.



상준이 멈춰 섰다.


전신에서 청백색 에너지가 불꽃처럼 일렁였다.


“김철민... 네놈의 인형들은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해.”



상준의 안광이 옥좌를 향했다.


하지만 김철민은 여전히 서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남은 친위대원들이 무기를 고쳐 쥐며 상준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상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청백색 광휘가 성소의 어둠을 밀어냈다.


두 마리의 하이 에피머를 도륙한 기세는 압도적이었으나,

김철민의 안색에는 변화가 없었다.



“속도는 훌륭하다만, 그것이 이 강철 성소의 주술력을 이길 수 있을까?”


김철민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옥좌를 호위하던


친위대 상위 서열 4명이 일제히 무기를 바닥에 박았다.



콰아아앙-!



성소의 바닥에 새겨진 붉은 AF 문양들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연합 주술: 심연의 그물]



상준의 발치로부터 수천 개의 검은 사슬이 솟구쳐 올랐다.


단순히 묶는 것이 아니었다.


사슬이 스치는 공간마다 중력이 수십 배로 뒤틀리며 상준의 가속을 강제로 억제했다.



“... 윽!”



상준의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최대치로 주입된 셀 에너지는 양날의 검이었다.


감각은 날카로워졌지만, 신경계가 타들어 가는 통증이 전신을 찢어발겼다.



“단장님! 앞만 보십시오!”


자칼의 비명 섞인 외침이 들렸다.


자칼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세 명의 친위대원이 쏟아내는 파상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보랏빛 단검이 박혀 있었고, 휘두르는 대검의 궤적은 위태로웠다.



“팬텀 전원, 단장님의 길을 열어라!”


자칼의 명령에 따라 남은 팬텀 대원들이


상준을 에워싼 사슬을 향해 몸을 던졌다.


자신의 내공을 과부하시켜 일으키는 춤사위.


그 희생으로 상준을 옥죄던 그물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이 미친놈들이...!”



드라간이 분노하며 거대 도끼를 자칼의 머리 위로 내리찍었다.


자칼은 피하는 대신 내공을 갈아 넣어 도끼날을 손으로 맞잡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성소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상준의 시야도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뇌세포의 10%가 손상되었다는 리나의 경고가 머릿속을 때렸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비켜라.”



상준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바닥을 박차자, 공간의 제약을 뚫고 초음속의 충격파가 발생했다.



퍼억-!



상준의 주먹이 가장 가까이 있던 친위대원의 가슴팍을 뚫었다.


방어막도, 강화 갑주도 무용지물이었다.


상준은 그대로 그 시신을 방패 삼아 드라간에게 쇄도했다.



“이 괴물 같은 자식이!”



드라간이 도끼를 회수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상준의 검이 드라간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치익-!



보랏빛 피가 허공에 뿌려졌다.


하이 에피머의 세포를 이식받은 드라간의 신체가


순식간에 재생을 시도했으나, 상준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왼손에 응축된 에너지를 드라간의 안면에 그대로 터뜨렸다.


전투가 혼전으로 치닫는 순간, 성소 천장의 거대 코어가


기괴한 빛을 내뿜으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정제된 AF 에너지가 김철민의 손끝으로 모여들었다.


“슬슬 시간이 다 되었군.”


김철민이 옥좌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그가 발을 딛는 곳마다 강철 바닥이 유기물처럼 꿈틀대며 그의 발등을 감쌌다.


“이제 지옥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김철민의 등 뒤로 거대한 검은 날개가 돋아났다.


그것은 생명체의 날개가 아니었다.


수조 개의 미세 나노 머신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살아있는 시스템의 현신이었다.



상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김철민을 노려보았다.


전신에서 푸른 불꽃이 일렁였지만,


그의 다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리나: 마스터... 남은 기동 시간은 60초입니다.


그 이후엔... 심정지가 올 것입니다.]



“충분해.”



상준이 검 끝을 김철민에게 겨누었다.


두 존재 사이의 공기가 극도로 압축되며,


강철의 성소가 종말을 앞둔 것처럼 진동하기 시작했다.


상준의 망막 위에 붉은 숫자가 점멸했다.


60초. 그의 생존 가능 시간이자, 이 지옥을 끝낼 유일한 기회였다.



상준이 지면을 박차자 강철 바닥이 수 미터 함몰되며 비산 했다.


초속 250m. 물리적 형태를 유지하기조차 힘든 가속이었다.


단 1초 만에 4명의 친위대들의 미간 앞에 도달한


상준의 주먹이 공기를 찢었다.



놈들이 반응하기도 전, 둘의 안면을 거의 동시에 뭉개버렸다.


성소 전체에 거대한 동심원의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옆에 있던 나머지 친위대는 빠르고 변칙적인 참격을 날렸다.


하지만 상준의 눈에는 모든 것이 멈춰 있었다.



뇌세포를 태워 얻은 극도의 가속된 감각.


상준은 놈들의 공격 사이를 종이 한 장 차이로 통과했다.


스쳐 지나가며 휘두른 에너지 빔의 잔상이 그들을 통과했다.


명의 친위대가 허공에서 분리되어 흩뿌려졌다.


김철민과 나머지 친위대들은 힘을 합쳐 주술을 전개했다.


상준을 향해 수천 개의 검은 사슬이 솟구쳤다.


다시 공간 자체가 굳어버리는 절체절명의 순간,


자칼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몸으로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자칼의 코어가 붉게 타올랐다.


스스로를 불태워 상준의 길을 여는 결사(決死)의 방패.


자칼의 신체가 빛의 구체로 변하며 친위대의 주술망을 정면으로 깨부수었다.


콰아아아앙!


폭발의 반동으로 상준은 탄환처럼 김철민을 향해 튕겨 나갔다.


자칼의 마지막 포효가 성소의 비명 속에 묻혔다.


상준 자칼이 미소 짓는 환영을 본 것 같았다.


[리나: 경고. 신경계 붕괴율 60% 돌파. 우측 시각 손실]


시야의 절반이 암전 됐지만 상준은 멈추지 않았다.


김철민의 등 뒤에서 돋아난 검은 나노 날개가


거대한 촉수가 되어 상준을 덮쳤다.



치이이익-!



상준의 어깨와 허벅지에 날개가 박혀 들어갔다.


하지만 상준은 오히려 그 촉수를 손으로 움켜잡고 김철민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까이 와라, 이 자식아.”



상준의 전신에서 청백색 뇌전이 폭발하며


자신을 결박하던 날개를 과부하시켜 태워버렸다.



김철민이 검을 빼 들었다.


AF 코어의 순수 에너지가 깃든 검은 칼날.



상준과 김철민의 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성소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거대한 기둥들이 추락하고, 바닥은 심연처럼 갈라졌다.



[리나: 잔여 시간 10초. 마스터, 심정지 위험!]



상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폭주하는 에너지뿐이었다.



10... 9... 8...



상준은 김철민의 검에 가슴이 뚫리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김철민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7... 6... 5...



“너와... 함께 지옥으로 가마.”



상준의 오른손에 모든 셀 에너지가 응축됐다.


청백색의 태양이 그의 주먹 위에서 타올랐다.



4... 3... 2...



셀 에너지가 김철민의 목을 관통했다.


푸른색과 검은색의 에너지가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김철민의 신체가 빛의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알림: 시스템 정지. 마스터의 생명 활동 중단]



폭발의 여파로 붕괴하는 옥좌와 함께 상준의 신체는


거대한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암전 되는 시야 너머로 지구의 푸른 실루엣이 망막에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