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었다
문외 극단은 첫 번째 공연의 성공을 기반으로, 두 번째 공연을 준비하였다. 개막공연을 한 조선극장은 다른 극단이 미리 공연 예약을 하여, 이어서 공연을 할 수가 없었다. 작은 극단이 겪는 어려움이었다. 한 극장에서 공연을 계속하지 못하는 것은 극단으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연말 성수기라 극장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빌린 제일극장은 일정상 사흘 공연만 가능했다. 막간극과 함께 두 편의 단편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로 하고, 신문사에도 알렸다.
문외극단 두 번째 공연 20일부터 3일간 제일극장에서 개막
막간극 – 신불출 진행, 윤백단 독창
연극 공연 – 정당한 탈선(신불출작), 청춘아 울지 마라(신불출작),
단편극 1막씩 총 2막 공연
단막극인 정당한 탈선의 막이 내리고, 막간극을 위해 무대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신난다가 신불출로 돌아왔습니다.”
무대 인사를 하니 관객들은 크게 박수로 화답했다. 여기저기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공산명월! 공산명월이 최고야!”
2층 부인석을 바라보니 젊은 여인들이 객석을 거의 메웠다. 한성권번 소속의 기생들이 단체로 입장했다고 들었다. 극장 앞에 인력거가 줄지어 들어와 장관이었다고 했다.
‘나에게 ‘장한(長恨)’ 잡지를 보내준 여인도 왔으려나?‘
단원들은 기생들의 단체 입장을 환영했다.
“단장님, 경성의 기생들이 단체로 무대를 찾았으니, 우리 공연에 대한 입소문이 장안에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무대에서 ‘공산명월’을 연기했다.
“내가 대머리로 살면서 조심해야 할 일이 많아. 어디 들어 볼까나?”
관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했다
“그래요. 들어봅시다!”
고저장단을 적절히 섞은 목소리와 대머리를 감싸고 ‘어구구’하는 몸짓에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부인석에 앉은 여인들은 우스워서 눈물이 나는지 연신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나는 뒤돌아서서 대머리 분장을 벗고 무대 중앙으로 나와 막간극 진행을 계속했다.
“다음은 떠오르는 스타, 배우 윤백단이 ‘종로 네거리’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윤백단이 큰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섰다.
“종로 네거리에 해가 저물어
엿장수 영감님 지나가누나.
가위소리 딱딱 딱딱 엿목판 메고
설렁설렁 다니는 늙은 엿장수
단쇠 단쇠 엿단쇠 엿을 사시오……"
문외 극단의 공연은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극장을 빌리는 비용이 상당하여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다음 공연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세 번째 공연을 준비했다. 세 번째 공연은 막간극과 함께 2막짜리 연극인 ‘양산도(梁山刀)’를 올리고자 했다. 사전검열을 위해 대본을 경무부 보안과에 제출했다. 양산도는 부산 양산에서 벌어진 노동쟁의 소식을 듣고 만든 희곡이었다. 주인공 이름을 노동자인 양산(梁山)으로 하고, 그의 칼이라는 뜻으로 제목을 양산의 칼이라고 하였다.
사전검열을 고려하였지만 하고 싶은 말을 과감히 줄이기는 아무래도 힘들었다. 검열의 경계선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 사람의 정서를 어떻게든 무대에서 표현하고 싶었다. 조선 사람의 절실한 마음을 무대에 올리겠다는 염원은 경성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목격한 만세운동 때문이었다.
*****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었다.
국장일을 맞아 단성사를 포함한 모든 극장은 공연을 쉬었다. 단원들은 오전에 순종의 장례를 애도하고 오후부터 단성사에서 공연 연습을 하기로 했다. 조선의 마지막 왕께 애도를 표하기 위해 전수린과 함께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단성사로 향했다. 단성사 주변은 아침부터 장례행렬을 보려고 흰옷의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나와 전수린은 단성사 앞쪽으로 길을 건넜다. 단성사 앞에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기마경찰들이 여기저기서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우리는 단성사 극장 입구 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종로 어귀에 장례행렬이 진입했다고 웅성거렸다. 과연 저 멀리 울음소리가 장례행렬보다 앞서 도착했다. 드디어 장례행렬이 보였다. 나라 잃은 임금의 죽음을 마주한 백성들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호각소리가 울렸다. 호각소리에 맞추어 도열해 있던 학생 수십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삐라를 뿌렸다. 쏟아져 길에 떨어지는 삐라를 한눈으로 훑었다.
‘횡포한 총독정치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자!’
나는 삐라를 주어 호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아, 터졌구나!’
은근히 기대한 대로 일이 일어나자, 가슴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한 학생이 군중을 향해 준비한 선언문을 큰 소리로 낭독했다.
“조선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학생들이 다 함께 만세를 부르며 함성을 질렀다. 연도에 도열한 수백 명 학생들의 우렁찬 함성은 종로통을 뒤흔들었다.
“대한 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조선독립만세!”
조문 행렬을 보러 도열한 사람들이며 상점 상인들도 따라 만세를 부르고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그때였다. 호루라기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면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기마경찰대가 손을 들고 만세를 외치는 학생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기마경찰은 이들 사이로 말을 거칠게 몰며 채찍을 마구 휘둘러댔다. 채찍에 얼굴을 맞은 학생들과 군중들은 비명과 함께 피가 튀기는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조선독립만세!”
만세를 외치던 학생들이 여기저기 비명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학생들과 군중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전수린과 나도 학생들과 군중들 틈에 섞여 도망 다녔다. 기마경찰이 덮쳐오자 앞에서부터 사람들이 쓰러져갔다. 나도 쓰려졌다가 일어나면서 길에 떨어져 찢어진 태극기를 보았다. 그걸 주우려다가 일본 순사에게 걷어 차였다. 그때 옆에 함께 쓰려졌던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근처 골목을 향해 달아났다. 주변의 경찰들은 골목으로 학생을 쫓으며 소리쳤다.
“저놈 잡아라!”
그 사이 나는 전수린에게 부축을 받아 단성사 안으로 피신했다. 단성사 안에는 몇몇 단원들도 피해 들어와 있었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살펴보니, 입이 터지고 셔츠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마지막 임금님의 가시는 길에 만세항쟁을 눈으로 목격하니 수일 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저항하는 조선 사람의 절실한 마음을 담은 내용을 연극무대에 올리고 싶었다. 검열 때문에 대놓고 표현할 수는 없다고 해도 조선 사람의 감정을 이야기에 녹이고 싶었다. 머릿속에 수십, 수백 명의 흰옷 입은 조선 사람이 무대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
드디어 검열결과가 나왔다. 1막은 거의 지적을 안 했는데 2막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칼질이 되어 나왔다. 동맹파업을 주동한 양산이 악덕 공장주와 그의 회유에 배신하여 신의를 저버린 친구들을 징벌하는 내용이었다. 일본 경찰이 최근의 항일 저항과 연계된 노동쟁의에 대해 민감한 듯했다. 검열을 의식하여 만든 작품인 데도 가차 없이 난도질을 당했다. 나는 부르르 몸을 떨며 외쳤다.
‘이건 양산의 칼이 아니라 검열의 칼이야.’
아마 신난다에 이어 신불출 이름도 요주의(要注意) 명단에 들어있는 듯했다.
‘마달영이 기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