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쓰는 시>는 83세의 나이로 현역 조경가 정영선 님의 삶과 일상을 담은 다큐 영화다. 할아버지 과수원에서 사과 꽃 흩날리는 모습을 보고 자란 그녀는 학창 시절 남다른 글 솜씨로 모두가 시인이 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꽃과 자연에 대한 타고난 감수성으로 펜으로 시(詩)를 쓰는 대신 흙과 나무, 풀과 꽃들로 땅에 시를 쓰는 삶을 살아왔다.
정영선 님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보고도 감탄하며 그들과 대화를 즐긴다. ‘잘 잤니?’라고 묻고, 집을 나설 때는 ‘잘 다녀올게.’하고 인사한다. 그녀가 정원을 조성할 때 마음에 두는 말이 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백제의 건축을 두고 이야기한 검이불루(檢而不陋)와 조선의 창업을 도운 정도전이 경복궁을 가리켜 말한 화이불치(華而不侈)다. 소박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말이다. 이조 백자로 연상되는 한국의 미적 감각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정영선 조경가의 손을 거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정원 모습은 눈을 뗄 수 없는 벅참을 가져다준다.
선유도 공원
영화는 어린아이가 뛰어노는 선유도공원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겸재 정선은 선유도에서 아름다운 한강의 풍경을 그렸다고 한다. 정영선 님은 폐정수장이 방치된 선유도를 생태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폐허의 흔적 위에 녹색의 생명력을 더하여 찾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는 공간이 되었다.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
정영선 님은 여의도 샛강을 메워 대형 주차장과 축구장 시설을 만들겠다는 한강관리사업소의 계획을 듣고 기겁을 했다. 김수영의 시, ‘풀’을 읊으며 멋진 생태공원을 만들고자 관계자를 설득했다. 그렇게 서울 한복판에서 화초와 물고기, 철새가 사는 야생의 자연을 온몸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생태공원이 탄생했다.
서울아산병원 신관 정원
병원은 기본적으로 콘크리트 건물이다. 환자는 물론 의료진에게도 삭막한 분위기다. 병원은 마음이 힘든 사람이 오는 곳인데 이런 환경에서 어찌 위로를 받을 수 있겠는가. 환자가 나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쉴 수 있고, 병실에 누운 환자들이 창 너머로 계절의 변화와 생명력을 느낄 수 있고, 그리고 간호하는 가족들이 소리 내어 울거나 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병원에 그럴만한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정영선 조경가는 과감히 병원 지하주차장 위에 거대한 인공 숲을 조성하여 힘든 사람들을 품으며 위로하는 정원을 만들었다.
러닝타임 2시간 남짓의 영화를 본 후 정영선 조경가의 손길이 닿은 곳의 탐방리스트를 적어본다. 선유도 공원, 여의도샛강 생태공원, 서울아산병원 신관 정원, 폐철도선을 활용한 경의선숲길, 용인 호암미술관 희원, 남양주시 다산생태공원, 설화수 북촌 플래그십 스토어, 아모레퍼시픽 용산 사옥, 크리스천 디올 성수 스토어, 제주 오설록 이니스프리...... 시집을 읽는 마음으로 한국의 미를 담은 정원들을 하나씩 찾아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