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복무 중 휴가를 나온 아들에게 아내가 넌지시 물었다. '요즘 아빠가 제일 빠져 있는 게 뭔지 아니?' 아들은 망설임 없이 서바이벌 음악 경연 프로그램의 이름을 대었다. ‘나는 가수다!’.
그 시절 나는 무대 위 가수들이 쏟아내는 치열한 생명력을 보며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내곤 했다. 어느 날, 그 무대의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승철, 신승훈, 박정현, 그리고 윤도현. 출연자 중 가장 좋아했던 이름들이다. 하지만 일순 망설여졌다. 내일 아침까지 보고해야 할 긴급한 상황이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직장인에게, 일찍 퇴근하여 3시간의 공연을 즐기는 일은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예매 창 앞에서 머뭇거리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을 가지고 알아서 포기해야 하는가.' 결국 티켓을 끊었다. 그것은 단순히 공연 관람권을 확보하는 일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라는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오늘의 행복을 지켜내겠다는 의지였다.
공연 당일, 다행히 세상은 나를 위해 잠시 숨을 죽여주었다. 사무실을 빠져나와 도착한 공연장 입구. 저 멀리 나를 기다리던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 환하게 손을 흔드는 아내의 표정을 보는 순간, 가슴 아래 고여 있던 묵직한 긴장이 풀렸다. 기대에 찬 표정을 한 아내와 함께 열기로 가득 찬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니,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첫 무대는 '라이브의 황제' 이승철이었다. 그가 공기를 가르고 소리를 내뱉는 순간, 웅성이던 객석의 공기는 단숨에 정돈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조각한 듯 정교했고, 힘을 빼고 내뱉는 음성조차 객석의 가장 뒷줄까지 가 닿았다. '황제'라는 수식어는 과장이 아니었다. 여섯 곡의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 객석은 무대를 향해 하나로 묶였다. 이어 등장한 박정현은 작은 체구 어디에 저런 힘이 숨어 있을까 싶을 만큼 압도적인 성량으로 무대를 채웠다. 서툰 한국어 억양으로 건네는 인사는 오히려 그녀의 투명한 진심이 배어 나왔다. 완벽하지 않은 발음 속에 담긴 감수성, 그녀의 목소리는 노래만큼 듣기 좋았다.
드디어 YB의 차례가 왔다. ‘목 상태가 좋지 않다’라며 툭 내뱉는 윤도현의 투덜거림에 객석에선 기분 좋은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음악이 시작되자 그의 목소리는 거친 야성이 되어 폭발했다. 마지막 앙코르곡까지 토해 내듯 부르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뜨거운 생명력을 느꼈다. 마이크 스탠드를 움켜쥐고 포효하는 그의 모습 위로, 문득 며칠 전 휴가를 마치고 자대 복귀를 위해 문을 나서던 아들의 단단한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마지막을 장식한 신승훈은 명불허전이었다. 애절한 발라드로 가슴을 미어지게 하더니, 어느새 댄스곡의 경쾌함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웠다. 뭉클한 감동에 젖어 있다가 어느덧 어깨를 들썩이는 나를 발견하며, 오랜만에 ‘살아있음’을 만끽했다.
180분의 마법 같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 안의 피는 뜨거워졌다. 거친 세상에서 매일 옷깃을 여미며 단속했던 마음의 갑옷이 이어지는 열창에 녹아내렸다. 옆자리는 바다를 건너온 일본인 관객들이 환호하고 있었다. 비행기 요금까지 내며 이 순간을 즐기려 온 그들에 비하면, 참으로 싼 비용으로 큰 위로를 얻고 있다는 뿌듯함이 들었다. 동시에 군 복무를 하는 아들이 떠올랐다. 부모가 누리는 이 평화와 환희의 밑바닥에 아들의 젊음과 헌신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다가왔다.
공연장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가을바람이 뺨을 스쳤다. 들어갈 때 느꼈던 서늘한 기운이 아니었다. 그 바람은 깊어져 가는 명품 가을의 속살을 만지는 기분 좋은 촉감으로 다가왔다.
인생은 어쩌면 무대 위 가수들처럼 저마다의 노래를 부르는 과정이리라. 우리는 때로 '다음 무대'를 걱정하느라 정작 '지금의 노래'를 놓치며 산다. 긴급한 보고서와 끝없는 업무의 굴레 속에서 나는 늘 내일을 대비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오늘 아내의 손을 잡은 온기 속에 있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매 순간 충만한 생의 의미를 느끼며 살라는 뜻으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을 붙잡아라)'을 노래했다. 내일이면 다시 거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오늘 가슴에 채워 넣은 이 뜨거운 여운만으로도 한동안은 넉넉히 버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