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방주

by 두류산

“부모를 따라 여행에 나서다니, 착한 아들이네요.”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 기사님의 덕담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공군 중위인 큰 아이와 대학교 4학년인 둘째. 훌쩍 커버린 아들이 부모의 보폭에 맞춰 걷는 것이 당연한 일은 아님을 불현듯 깨달았다. 워싱턴 세계은행에 단신 부임을 앞두고 마련한 2박 3일의 제주 여행. 그것은 각자의 삶으로 흩어지기 전,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려는 가족 행사였다.

제주에 도착하여 바로 향한 곳은 서귀포 성산의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었다. 폐교의 온기를 품은 그곳에서 우리는 일상에 쫓기느라 놓쳐버린 ‘순간의 환상’들과 마주했다. 작가가 생을 바쳐 포착한 제주 하늘의 구름과 자연은 작품 너머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그날 이후 나는 여행 내내 습관처럼 고개를 들어 제주의 하늘을 살폈다.


둘째 날의 테마는 ‘건축’이었다. 이타미 준의 설계로 세워진 방주교회 앞에 섰을 때, 나는 유럽 근무 시절 보았던 수많은 대성당과는 다른 종류의 전율을 느꼈다. 이름 그대로 물 위에 떠 있는 방주였다. 강대상 너머로 제주의 자연이 병풍처럼 흐르고, 창밖 잔잔한 수면은 예배당 전체를 물 위로 들어 올리는 듯했다. 회중석(會衆席)에 앉으니, 세상의 거친 홍수를 피해 평온한 방주 속으로 피신한 기분이었다. 이어 방문한 안도 다다오의 ‘지니어스 로사이’에서는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명상하며 우리 가족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했다.

섭지코지의 끝단, 바람의 결을 형상화한 듯한 안도 다다오의 '글라스 하우스'에 발을 들였다. 투명한 레스토랑 '민트'는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통유리 방주’ 같았다. 우리는 성산일출봉의 어깨 너머로 장엄하게 잠기는 낙조를 마주했다. 태양이 짙은 자색과 선홍빛으로 타오르다 수평선 아래로 스스로 몸을 낮출 때, 아이들과 아내는 낮은 탄성을 터뜨렸다. 그것은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순간의 환상’을 마주함이었다.

저녁의 성산일출봉은 뜨거웠던 낮의 열기를 시원한 바람으로 씻어내고 있었다. 평소 산행을 꺼리던 아내가 중턱에서 숨을 고르며 멈추자, 두 아들이 양옆을 지켰다. 아내는 듬직한 아들의 응원에 힘을 얻어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서니 일출봉은 어느새 ‘월출봉’이 되어 있었다. 발아래로는 은은한 달빛이 해안선의 굴곡을 따라 흐르고, 먼바다의 오징어 배들이 점묘화처럼 불을 밝혔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배들의 불빛은 어부들의 고단한 노동이자 삶의 현장이었다. 우리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생의 경외감으로 달빛 아래 잠긴 풍경에 눈길을 모았다.


다음 날 새벽 5시, 잠에 취한 아내와 작은 아이를 호텔에 두고 큰아이와 다시 일출봉에 올랐다. 군인 아들의 강한 체력에 보조를 맞추며 다시 오른 정상에서 우리는 장엄한 해돋이를 목격했다. 몇 해 전 휴가 때 신안 증도에서 보았던 ‘한국 최고의 낙조’가 다시 “한국 최고의 일출’로 돌아온 듯한 뭉클한 광경. 어제의 해가 오늘의 해로 이어지듯, 우리 가족의 역사도 세대를 이어가며 깊어지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를 찾았을 때는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8년의 고독을 추사체와 ‘세한도’로 승화시킨 그 치열한 삶. 고통을 담금질해 예술로 빚어낸 선비의 기개가 제주의 뜨거운 햇살 아래 형형하게 다가왔다. 지난 휴가 때 방문한 다산의 강진 유배지가 교차하여 떠오르며, 워싱턴에 단신 부임하게 되는 부담이 가볍게 느껴졌다.

여행의 마무리는 함덕 해수욕장의 푸른 파도였다. 바나나 보트에 올라타 파도를 가르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공중에 흩어졌다. 모터보트 기사가 “총각들 폼이 좋아 더 멀리 나갔다”라며 너스레를 떨 만큼, 아이들은 제주의 바다를 온몸으로 받았다. 몸이 파도로 흠뻑 젖은 아이들은 내친김에 한바탕 바다 수영을 즐겼다. 아내와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이들이 놀이터를 향해 달려가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떠올렸다.

제주는 맛으로도 기억된다. 입안 가득 고소함이 퍼지던 고등어회와 흑돼지의 풍미, 포도호텔의 전복 물회와 섭지해녀의 집에서 맛본 겡이 죽까지. 돌아오는 길, 아내의 손에 들린 감귤초콜릿과 오메기떡은 아이들과 타국으로 떠날 남편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워싱턴으로 떠나기 전, 나는 제주가 건넨 달빛과 뜨거운 일출을 함께한 가족의 온기를 마음 깊숙이 눌러 담았다. 가족이라는 매듭을 더욱 단단하게 묶은 제주의 기억은 낯선 타국 땅에서 나를 지탱하여 단단하고 평온한 ‘마음의 방주’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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