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0일 월요일
지출 : 이베이에서 투웨이 지퍼 5.49파운드, 중고서점에서 2파운드, 세인즈베리에서 2.86파운드, 세이버즈에서 2.47파운드
이동 경로 : 동네 공원, 우체국, 중고 서점, 세인즈베리, 세이버즈
날씨 : 기온 최저 5도-최고 13도, 하루 종일 맑음.
공원 자원봉사를 갔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만 나는 그중에서 주로 꽃을 심거나 잡초를 뽑는 등 화단을 가꾸는 일을 돕는다. 특별히 공익적 인간도 아닌 내가 굳이 자원봉사를 하는 목적은 영국에 살면서 제대로 영국사람들과 부대끼며 산 적이 없어서 영어도 안 늘고 도대체 동네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가 없는 점이 해가 가면서 점점 더 한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싫든 좋은 이 나라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주변 환경에 좀 더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새삼 들어서이기도 했다. 이제 자원봉사를 시작한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봉사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숙제를 끝낸 홀가분하고 산뜻한 기분일 때도 있지만 뭔가 더 외롭고 쓸쓸한 기분이 되어 돌아올 때도 적지 않다. 언어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금방 현지 언어와 문화에 익숙해지는데, 나 같은 경우는 물론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그러기 위해 노력한 적도 별로 없고, 하는 일도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혼자 하는 일이다 보니, 도저히 이 나라의 언어와 사람들과 친숙해질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야 토종 영국인들과 잘 알지도 못하는 가드닝 용어를 써가면서 대화를 하다 보니 자연히 나는 월요일마다 더 한심하고 처량한 외톨이가 되어 버린다.
특히나 9시 반에 일을 시작하면 11시쯤 차와 비스킷을 먹는 휴식시간(Elevenses)을 가지는데 나에겐 이때가 가장 어색하고 불편한 시간이다. 아직 친한 사람이 많지 않은 그룹에 속해 있을 때는, 모국어로도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 그다지 편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미 오랜 시간 함께 이 봉사를 해온 사람들은 그들만이 아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걸 알지 못한 채 대화를 듣다 보면 많은 부분 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내가 대화그룹에 끼어 있을 때는 그런 이야기를 되도록 하지 않지만, 이야기는 언제나 쉽게 샛길로 새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나를 위한 대화주제를 꺼내도 그것을 내가 재미있게 살리지 못하고 단답형으로 대답해 버리면 대화가 금방 끝나버리고 어색한 침묵이 찾아든다. 그나마 몇 명 친한 사람들 옆에 붙어 서서 알아듣는 내용에 대해서만 간간히 반응을 보이며 대화를 하는 척해보지만, 이런 일에는 평생 익숙해질 것 같지 않다.
12시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작업용 부츠를 벗으면서 더 이상 이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그냥 다 그만둬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왠지는 모르지만, 내가 즐겨 보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이런 감정들을 느끼고 집에 돌아오는 그런 쓸쓸한 일상들,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다양한 씁쓸한 감정들을 느끼지만 결국은 그렇게 삶이 지속되는 그런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나도 그런 등장인물들과 장면들을 보며 느꼈던 상대적인 소소한 안도감과 소속감, 혹은 역으로 인간으로서 누구나 갖고 있는 쓸쓸함을 오히려 즐기려고 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 자신도 나쁘지 않다. 이런 나의 모습을 어쩌면 삶을 살아나가는 하나의 극적 역할의 일부로 여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다소 편안해졌다.
영어권 국가에서 10년이 넘도록 살면서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부끄러움, 현지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데서 오는 외로움, 어색함, 말도 안 되는 말을 해버리고 제대로 고치지도 못해서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의 당황스러움과 창피함. 나는 이런 감정들을 늘 느끼며 살아간다. 하지만 피하지 않고 그것들과 만나러 집을 나선다. 영어를 배우기보다는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을, 내가 얼마나 영어에 무지한지를 느끼는 나날들이 더 많지만, 그런 날들에서 매주 적어도 한두 가지의 표현들에 익숙해져서, 머릿속에서 생각하지 않아도 반응이 튀어나오는 말들이 하나 둘 늘어가기를, 그리고 그런 것들을 위해 매일 부끄러운 노력들을 피하지 않고 해 나간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려고 노력 중이다.
자원봉사를 끝내고 집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집 근처에 있는 우체국에 갔다. 30대 초반에 잠깐 런던에 살 때부터 애용하는 La Redoute 프랑스 온라인 쇼핑몰이 있는데 영국에서 온라인으로 물건을 구매한다. 프랑스에는 오프라인 매장이 있다고 하는데 가본 적은 없고 한국에서도 온라인 및 오프라인 매장이 있다고 알고 있다. 여러 가지 패션 상품들 및 홈데코 상품들을 판매한다. 이곳을 주로 이용하는 이유는 다양한 브랜드 상품을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찾고 있던 리바이스 청바지를 이곳에서 20퍼센트 할인가에 판매하길래 일단 주문해서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우체국에서 픽업하는 옵션을 선택했다. 픽업(영국에서는 click and collect라고 한다)은 무료지만 집으로 배달하는 것은 3.99파운드(현재 환율로 8천 원)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동네의 우체국은 편의점처럼 이런저런 식료품과 간단한 잡화도 파는 마트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다. 두세 명의 우체국 직원이 밑에 택배와 편지가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 있는 투명한 플렉시글라스 파티션으로 막힌(원래는 이런 파티션이 없었으나 코비드 때 생겼다) 창구 안에 앉아 있고 그들이 앉은자리 뒤에는 배달할 택비 및 편지들과 배달된 택배들이 보관된 커다란 창고로 통하는 문이 있다. 진짜 우체국은 이곳에서 약 0.5마일 떨어진 곳에 커다란 웨어하우스 형태로 따로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가끔 택배를 찾으러 갈 때도 있지만 차를 이용해야 할 만큼 멀고 그 부지 자체도 차 없이 들어가기에 너무 크기 때문에 대부분은 이 마트에 있는 우체국 창구를 이용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 이 창구 앞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선다. 마트 자체의 크기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편의점 사이즈이기 때문에 구석에 작게 자리 잡은 우체국 앞에 줄을 서기 시작하면 당연히 진열대 사이사이의 복도에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게 되고 그 부분에 있는 물건을 사야 하는 사람들은 불편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영국에 살면서 느낀 점 중의 하나는, 영국인들은 불편한 것을 별로 불편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한국에서라면 벌써 개선되었어야 할 불편사항들이 이곳에서는 개선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답답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국에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영국인들의 습성을 닮아가는 것인지. 언젠가부터 그런 불편한 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고 있음을 느낀다. 더 이상 불편한 것이 아니게 된다. 말하자면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인내심이 늘고 있는 것이다.
에브리(Evri)라는 택배회사를 통해 라후드뜨 택배가 우체국에 도착하면 QR코드가 담긴 이메일에 나에게 보내지고, 나는 QR코드를 가지고 우체국으로 가서 택배를 받는다. 보통 신원확인을 위해 ID가 필요하다고 이메일에는 적혀있지만 한 번도 ID를 요구한 적이 없다. 그냥 QR코드를 보여주면 스캐너로 찍고 내 성(姓, surname)을 물어본 뒤 창고에 들어가 택배를 찾아다 준다.
우체국에서 집까지 거리는 약 500미터 남짓, 집으로 향하는 길에 따뜻한 해가 반짝 나와서 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하이스트리트 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가 좋아하는 중고서점으로 갔다. 엊그제 잠시 세인즈베리에 장을 보러 나왔다가 원서로 읽어보지 않은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On the road>와 부코스키의 시집을 클래식 섹션에서 봤는데 최근에 사고 안 읽은 책이 너무 많다는 죄책감을 못 이기고 그냥 돌아왔던 것이 후회가 되어 다시 가 보았다. 하지만 고작 이틀 만에 두 권만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빅 서 Big Sur>가 있어서 2파운드를 주고 샀다. <길 위에서>로 급작스레 얻은 명성을 피해 Big Sur라는 곳으로 피신하여 알코올의존증에 시달리는 육체적 고통과 함께 내면적 갈등을 그린 잭 케루악의 자전적 소설인데, 뭔가 현재 네가 겪고 있는 실존적 내면적 불안에 대한 해답 혹은 공감적 요소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어서였다. 사실 이건 변명일 뿐이고, 난 그저 책을 사는 것을(사는 것만을) 즐기는 사람이다. 그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돌아 돌아서, 중고서점으로, 또 다른 채러티 샵으로, 그리고 또 세인즈베리로 가서 두부와 감자를 사고 세이버즈(여러 브랜들의 생필품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체인점)에서 락스(Thick Bleach)와 치약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집은 우리나라 갑오경장 시기에 만들어진 100년도 더 된 집으로, 단열재 없이 벽돌로만 된 벽, 흙벽 바닥 위로 떠 있는 목재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 공기, 천장이 높아 공간감은 넓지만 난방 효율이 극단적으로 좋지 않은 등의 여러 요인 탓에 이런 애매한 봄 날씨에는 찬 바람이 부는 바깥보다 훨씬 더 춥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차를 마셔야 한다. 커피가 아닌 차가 주는 색다른 따뜻함이 있다. 이미 오후 두 시가 지났으니 디카페인으로 홍차 한 잔 마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