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7일 금요일
지출 : 동네 베이커리에서 뉴욕 치즈 케이크, 비건 초콜릿 오렌지 케이크 £7.35
이동 경로 : 베이커리, 샨네 집, 도서관 근처 카페
날씨 : 기온 11-14도(체감온도 9도), 다소 강한 바람.
아침 기상 7시 반. 샤워 후 똑같은 아침 식사, 방울토마토, 사과, 삶은 달걀 두 개, 디카페인 커피 한 잔. 눈을 떴을 때 눈이 부실 정도의 햇살이 아니어서 흐리고 추운 날씨일 거라 짐작했다. 그런데 알렉사와 핸드폰 기상앱에서 최저기온 11도, 최고 기온 14-15도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또 속고 말았다. 가벼운 가죽재킷(나는 우리나라에서 점퍼라고 부르는 짧은 겉옷을 영어로 재킷Jacket이라고 한다는 걸 영국에 와서야 알았다)을 입고 집을 나서는데 웬걸, 바람이 매우 차다. 체감온도가 3-4도쯤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목에 따뜻한 목도리를 둘렀기 때문에 괜찮을 것 같아 집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고 그냥 계속 가보기로 했다.
집을 나서서 오른쪽으로 틀자마자 50미터쯤 앞에서 걸어오는 동네 지인 두 명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2년 전부턴가 같이 짐Gym을 다닌다. 서로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두 사람이 같이 짐을 다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왠지 이유 없는 왕따를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그들과 같이 짐을 다닐 사이가 전혀 아닌데도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사서 고생, 사서 걱정'이 아니라 '사서 왕따'인가? 오전 10시 반에서 11시 반 사이에 집에서 나갈 때는 짐에서 돌아오는 두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높으니 조심해야 한다. 동네에서 아는 이웃을 만나면 항상 반갑게 인사를 나누지만 그 어색함의 정도는 8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나아진 바가 없다. 어설프게 아는 동네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것만큼 적응이 안 되는 것도 없다. 영국에서 산 지 12년이 넘도록 나는 집을 나설 때마다 아는 사람을 길에서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추운 날씨에 반팔에 레깅스 차림인 두 사람은 멀리에서 봐도 누군지 단박에 알 수 있다. 나는 어색하고 불편한 내색을 감추며 손을 흔들며 다가섰다. 다가섰다기 보다도 내가 가는 방향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적어도 내가 피하고 싶어하는 기색없이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손을 활발하게 흔들어 보였다. 두 사람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둘 다 아주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라 언제나 나에게 안부를 묻는 것을 잊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 애들 안부도 함께. "잘 지내지? 애들도 잘 지내지?(You alright? How are your boys?)" 같은 길에 사는 사람들이 나를 만나면 언제나 이 두 문장이 첫인사다. 이 동네 영국인들은('이 동네'라고 굳이 말하는 이유는 이 동네 말고 다른 곳에서는 오래 살아보지 않아서 모르기 때문이다) 'How are you?'라고 묻기보다는 'You alright?' 혹은 간단히 'Alright?' 하고 묻는다. 나는 아직도 중학교 때 배운 영어를 못 버리고 항상 'How are you?'라고 한다. 그리고 곧바로 날씨 얘기가 뒤를 잇는다. 오늘은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아주 빨리 인사가 끝난다. 평소 같으면 몇 마디라도 더 나누려고 노력을 했을 테지만 약속시간에 늦는 걸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날씨가 너무 추워서 나는 계속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화를 했다. 물론 두 사람도 별로 길게 얘기를 나눌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는 길에 동네 사람들에게 인기 많은 베이커리에 들러 뉴욕 치즈 케이크와 비건 초콜릿 오렌지 케이크를 샀다. 샨네 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거나 시간을 보낼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남의 집에 처음 갈 때 뭐라도 사가면 상대도 나도 기분이 좋으니까. 겨우 두 조각에 만 오천 원 정도의 케이크를 샀는데도 작고 예쁜 상자에 하나씩 담아준다.
이 베이커리는 공교롭게도 코로나 사태가 시작되었을 무렵 직전에 개점했는데, 이것저것 없는 것 없이 다 있는 이 동네에도 이 정도 수준의 베이커리는 없었기 때문에(물론 모든 카페마다 작은 진열대 안에 다른 곳에서 받아다가 파는 케이크 및 디저트류가 있고, 마트마다 베이커리 섹션이 있기는 하지만 이 베이커리는 계산대와 진열대 바로 뒤에서 제빵사들이 빵을 만들어 대형오븐에 넣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베이커리의 등장을 모두 반겼다는 것은 서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다들 동네에 제대로 된 빵집이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코로나 기간 동안 내내 이 동네 빵집이 살아남게 하기 위해 줄을 지어 빵을 사거나 테이크 아웃 커피를 주문했다.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위해 1-2미터 간격으로 떨어져서 줄을 서면서도 평일이든 주말이든 매일 이 빵집을 찾았다. 마치 다 같이 암묵의 불침번이라도 서는 듯했다. 아침 10시쯤 문을 열면 12시쯤에는 원하는 빵이 없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결국 이 빵집은 동네 주민들 덕에 아주 거뜬히 코로나 기간을 이겨냈다. 물론 빵과 케이크의 품질과 맛이 좋아서인 것도 주요 이유였지만. 아직도 문을 연 이 베이커리를 볼 때마다 나도 그 줄에 동참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는 생각에 뿌듯해진다.
케이크를 샀는데도 약속시간까지 10분가량 남았다. 샨네 집과 우리 집은 걸어서 불과 6분 정도의 거리라서 그 딱 중간쯤에 있는 베이커리에서 걸어가면 3-4분도 안 걸리기 때문에 베이커리 주변에서 조금 서성대다가 10시 37분경에 샨에게 '지금 가는 중. 3분 뒤 도착'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며 천천히 걸었다.
샨의 집 동네는 내가 8년 전에 살던 길 바로 옆옆 길이었다. 2층짜리 세미디테치드 하우스(Semi-detached house : 테라스하우스처럼 집들이 길게 연결된 것과 달리 집이 두 채씩 한쪽 벽을 공유하는 집 형태. 보통 세미디테치드 하우스와 테라스하우스가 한 길에 혼재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보통 한 길에는 한 가지 형태의 집이 죽 이어져 있다)였는데, 집 앞쪽에는 귀여운 작은 텃밭 크기의 정원이 있고 뒤쪽에는 꽤 안락하면서도 적당한 크기의 뒤뜰이 있다. 세미디테치드 하우스에서 내가 좋아하는 점 중 하나는, 집이 두 채씩만 붙어있기 때문에 두 집의 양쪽 끝에 작은 사잇길 같은 것이 있어서 집안을 통하지 않고도 그 사잇길 혹은 통로를 통해 바로 집 앞 쪽에서 뒤뜰로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길은 사람이 한 명 정도 지나갈 정도로 좁고 오붓하게 따로 문도 달려 있어서 꽤 아늑하다. 우리나라 단독 주택에서 앞뜰에서 뒤뜰로 갈 때 이용하는 담과 집 사이에 난 좁은 통로를 상상하면 된다. 나는 세미디테치드 하우스의 이런 부분이 좋다. 야외이면서 야외가 아닌 듯한 골목 같은 공간이 집 안에 있다는 그 소소하고 아늑한 만족감. 햇살이 잠시 너무 뜨거울 때 작은 의자 하나를 놓고 그늘을 즐길 수도, 정원용 도구들을 벽에 기대어 놓을 수도 있는 그런 사사로운 야외공간.
테라스하우스는 그런 통로가 없이 모든 집이 다 양쪽 집들과 벽을 공유하고 있어서 집안을 통하지 않고 뒤뜰로 가려면 한쪽 길 끝까지 빙 돌아서 다시 우리 집의 뒷문이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몇 년 전에 열쇠 없이 뒤쪽 문을 열고 쓰레기통을 내놓다가 바람에 문이 닫혀서 한겨울에 얇은 실내복과 슬리퍼 바람에 장장 300미터에 달하는 길을 돌아 앞문까지 가서 남편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한 적이 있다. 뒷문은 앞문과 달리 보통은 문 두드림쇠(Door-knocker : 초인종 대신 문을 두드릴 때 사용하는 금속 장식)나 초인종이 없는 간이문이기 때문에 아래층에 아무도 없을 때는 아무리 두드려도 앞문 쪽에서 더 가까운 2층 서재에 앉아 있는 남편에게는 절대 들리지 않고, 그날은 주머니에 휴대폰도 없어서 그냥 덜덜 떨면서 앞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샨의 정원은 예상대로 무척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아담하고 예뻤다. 이름 모를 예쁘고 다양한 색깔의 꽃들이 여기저기에 피어 있었다. 나는 우리 집에 심으면 예쁠 만한 꽃들 이름을 몇 개 물어보고 또 사진도 찍었다. 샨은 이렇게 정원을 잘 가꾸는데도 공원 자원봉사에서는 주로 허드레 일을 맡아한다. 가드닝 지식을 드러내지 않고 주로 잡초를 뽑는 일을 도맡아 한다. '잡생각을 없애는 데 좋아서'. 그게 이유란다. 우리는 정원에서 사진도 찍고 얘기도 하다가 3분 거리의 도서관 옆 카페로 갔다.
카페에서 샨은 그냥 차, 나는 라테를 시켰다. 케이크도 고맙고 10% 할인 멤버십이(작은 극장Theatre 안에 속한 카페라서 그 극장을 후원하는 멤버십 카드로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있다고 우기며 샨이 사주었다. 두 잔 합해서 £5.85. 사실 샨을 카페에서 만나 얘기하기 전에는 무슨 얘기를 할까 걱정을 많이 했으나 그건 기우였다. 평소 책 읽기, 음악 및 역사 강좌 듣기를 즐기는 샨에게는 대화거리가 많았다. 젊었을 때 독일에서 약 8개월 간 가정교사(Au pair : 유모와 가정교사를 겸하는 일로, 요즘은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돈보다는 젊은 사람들의 문화 및 언어 체험을 위한 프로그램 같은 것이었던 듯하다. 실제로 내가 아는 나이가 좀 많은 분들 중에 이 Au pair를 1년가량 해봤던 사람들이 꽤 있다)를 했던 이야기, 아들 이야기, 남편의 가족 이야기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더불어 한국의 교육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뜻밖에도 영국인들도 어떤 가정에서는 자식들에게 특정 대학이나 특정 과목을 공부하길 바라고 또 강요도 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라는 말도 들었다. 또 언제나 언어에 대해서 얘기할 때 영국의 각 지역이 가진 강한 억양에 대한 내용이 빠지지 않기 마련인데 억양이 매우 강한 이 도시에서 이 동네 사람들의 많은 부분이 RP(Recieved Pronunciation : 특정 지역색이 드러나지 않는, 교육받은 계층의 표준적 억양)를 가지고 있다는 특이점에 대해서도 서로 동의했다. 사우스 웨일스 출신이지만 어릴 때 리버풀로 가서 18살 때까지 가족과 살았고, 그다음엔 버밍햄으로 이주해서 살다가 몇 년 전에 아들과 가까이 살고 싶어서 이곳으로 이사 온 샨도 굉장히 듣기 좋은 표준적인 발음과 억양을 가지고 있다.
카페에서 두 시간 정도 대화 후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일하고 있던 남편과 점심을 먹었다. 거의 매일 먹는 생선구이, 야채볶음. 약간의 현미밥. 유튜브에서 손석희 전 앵커의 <질문들>에 김애란 작가가 나온 편이 있길래 보면서 먹었다. 가끔 특별한 이유 없이(물론 항상 이유는 있다) 아, 이래서 작가가 되었구나 하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김애란 작가도 그중 한 사람이다.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닌 그냥 중립적인 생각이다. 그래도 굳이 덧붙이자면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 입장에서 봤을 때 좀 더 그들의 꿈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속성을 갖고 있다고 할까. 뭔가 확연히 나와는 동떨어진, 예사롭지 않음이 있어 보인다. 어떤 것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다. 특정 업계에 속하는 사람이 아직은 그 안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 어떻게 비치느냐에 따라서 그 업계에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아님 좋지 않은 것인가.
이건 비슷한 맥락의 설핏 다른 얘기인데, 언젠가 하루키가 그의 책(어떤 책이었는지 정확하진 않은데 아마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였던 것 같다)에서, 새로운 신예가 문학계에 등장했을 때 기존 작가들은 별로 긴장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소설가라는 직업이 한번 반짝 등단하는 일은 쉬워도 지속적으로 오래 소설가로서 살아남기는 어렵기 때문에 업계에 갑자기 큰 주목을 받는 신인 작가가 등장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반기면 반겼지 긴장은 하지 않는다, 뭐 그런 뜻의 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만일 그게 진심이라면 그건 단지 하루키만의 생각이 아닐까? 매력적인 글과 책을 계속해서 내놓을 수 있는 비범함을 가진 하루키 같은 사람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불안해하거나 조바심을 느끼지 않을까? 나라면 엄청 경계하고 긴장할 텐데. 하지만 사실 비범함을 가진 자보다, 비범함을 꾸준한 평범함으로 이겨낸 사람들이야말로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대상이다. 자신의 게으름을 이겨낸다는 것이, 초심의 반짝함을 지루하고 고달픈 반복으로 오래도록 지켜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오후의 샨의 문자 : "Many thanks for the lovely cakes which we are keeping till this evening. Strength of character." 대충, 케이크 정말 고마워. 저녁때 먹으려고 안 먹고 아끼고 있어. 인내심 대단하지? 이런 뜻이다. Lovely는 번역하지 않겠다. f로 시작하는 비속어처럼 얘넨 그냥 아무 말 앞에나 끼워 넣으니까.
오늘도 일기예보는 틀렸다. 최저기온 11도라는 것도, 76퍼센트의 비 올 확률도. 8시가 넘었는데도 하늘에선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다. 물론 아주 한밤 중에는 언제나 비가 오긴 한다. 어젯밤에도 우리 집 천창에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한참 동안 들렸다. 오늘 하루도 나는 외로운 햇살, 변함없는 칼바람, 어색한 이웃과의 인사, 그리고 두 시간의 영어회화에서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