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 죽을 4월의 아침

2026년 4월 15일 수요일의 일기

by Mundane Affairs

지출 : 아스다(ASDA)에서 방울토마토(Plum tomato) 두 팩 £1.8, 오이 반 개 £0.68, Salad cress £0.43, 아보카도 두 개들이 한 팩 £1.48, 달걀 12개짜리 1판 £2.85, 사과(핑크레이디) £2.87. 총 £10.11

이동 경로 : 동네 도서관 뜨개모임, 아스다

날씨 : 기온 11도-17도. 맑음, 잠깐 소나기, 그리고 걷기 어려울 만큼 강한 바람.


아침 기상 7시 반, 다시 알람을 끄고 최종 8시. 요즘엔 늦게 잠자리에 드는 탓에 자연히 아침엔 9시가 다 되어 일어난다. 어제도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새벽 2시에 잠이 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약속 아닌 약속이 기다리고 있으니 일어나서 샤워를 한 뒤 조금이라도 요기를 하고 도서관에서 하는 뜨개 모임에 갈 생각으로 8시에 일어났다. 뜨개모임은 11시부터 1시까지다. 난 무슨 약속이든 2-3시간 전에는 일어나야 마음 편히 나갈 준비를 마칠 수 있다. 아마 준비에만 쓰는 시간은 고작 20-30분 정도밖에 안 될 테지만 그것들의 사이사이에 난 정말 많이, 자주 샛길로 샌다. 눈에 띄는 대로 빨래를 하다가 뜨개질도 하다가 쓰레기를 버리다가, 책을 들척이다가, 쇼츠도 몇 개 보다가 그리고 커피도 한 잔 하다가.


영국의 4월 아침은 정말 밝다. 비가 오지 않는 아침의 햇살은 두 겹의 암막커튼이라도 뚫어 버릴 것 같이 그 밝기가 아주 맹렬하다. 이런 아침 햇살은 점점 밝아지고 빨라지다가 8월부터 확연하게 기세가 꺾인다. 햇살도 동면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오늘은 약간의 구름 낀 날씨. 나는 부족한 잠이 눌어붙은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네모난 방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붙박이 옷장 안 서랍에서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욕실로 간다.


보일러 온도 설정은 보통 18도. 집안 온도가 18도 이하로 내려가면 가동되기 시작한다. 한국이라면 20-22도 정도로 맞추어 놓았을 테지만 가스전기비가 비싼 영국에서는 18도도 감지덕지다. 아는 사람들 중에는 16도로 맞추어 놓은 사람도 몇 있다. 18도에 맞추어 놓고 보일러가 가동이 안 되었다면 그건 집안 온도가 18도 이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 집은 항상 춥다. 어쩌면 외로움과 영원한 낯섦의 신체화(somatization)일 수도. 우리 집은 빅토리아시대 테라스하우스로 웬만한 온기가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의 집인 데다, 벽 한쪽 구석에 붙어 있는 타월 걸이 형태의 래디에이터 하나만으로 욕실 전체의 공기를 데워야 하기 때문에 도저히 따뜻한 욕실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매일 샤워를 할 때마다 고민의 시간과 용기가 필요하다.


덜덜 떨면서 샤워를 마친 후에는, 환풍기가 없기 때문에 하얀 페인트칠을 한 벽에 곰팡이를 키울 생각이 아니라면 바로 무거운 창문을 밀어 올려 환기를 해주어야 한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창문은 보기엔 그럴듯하지만 이 역시 난방 효율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보통 한국에서 살 때 30분 정도 걸렸던 목욕시간은 영국에 와서 점점 줄고 줄어 이제는 15분이면 충분하고, 누가 강요하면 10분 안에도 가능하다. 다만 샤워 후 욕실 정돈은 제외하고. 어제 산드라 블록의 The unforgivable(2021)을 다시 봤는데, 루스(Ruth:주인공 산드라 블록의 역할 이름)에게 사회복귀시설(혹은 갱생보호소/halfway house)의 관리자가 간단한 규칙을 소개할 때 샤워는 10분!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10분이면 충분한 거 아냐?게다가 그런 팍팍한 갱생보호소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내 몸은 추운 욕실에 적응해 버렸다. 샛길로 샜지만, 한 마디만 덧붙이면 The unforgivable은 정말 잘 만든 영화 같다. 영화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산드라 블록 영화 중에서는 Gravity(2013)와 함께 가장 마음에 드는 영화 중 하나다.


샤워도 하고, 대충 욕실 정돈도 하고, 빨랫거리를 모아 아래층에 내려오니 9시 10분 전. 아침을 먹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달걀찜기에 달걀을 넣고, 양상추와 사과를 식초 두어 방울을 탄 물에 잠시 담가 두고, 어제 미리 씻어서 용기에 담아 둔 방울 토마토를 냉장고에서 꺼낸다. 아침 식사용 그릇은 거의 매일 같은 것을 사용한다. 해비텟(Habitat : 별도의 회사였으나 2016년에 Sainsbury's가 인수 합병했다) 브랜드의 라자냐 혹은 리소토 용 흰색 오븐 그릇으로, 몇 년 전에 세인즈베리에서 장을 보기 전에 늘 그렇듯 생활용품 쪽을 구경하다가 아침 샐러드 담기에 예쁠 것 같아서 가족 수에 맞춰서 4개를 샀던 것을 아직도 잘 쓰고 있다. 이 그릇에 토마토, 사과, 양상추, 삶은 달걀 두 개를 까서 가지런히 놓으면 아침 준비가 끝난다.


아침식사 후 커피를 마시는데 워츠앱 알람. 뜨개 모임 친구(나보다 스무 살 이상 많지만)인 샨에게서 오늘 못 온다는 연락과 함께 금요일에 카페에서 만나서 차를 마시자는 연락이 왔다. 영국인 친구는 많지 않지만, 영국 사람들과 지내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은, 무슨 말이든 직접적으로, 생각나는 대로 표현하지 않는 게 좋다는 점이다. 물론 정 원한다면 하고 싶은 대로 말해도 안 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들의 습성을 이해하고 또 동화되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에둘러 말하기를 조금은 배워두어야 한다. 나는, 좋아! 혹은 싫어(사실 금요일에는 집에서 쉬고 싶었다)라고 대답하기 전에 먼저 생각했다. 우선 샨이 날 꼭 만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오늘 뜨개모임에 온다고 했다가 못 오게 돼서 미안한 마음에 금요일에 만나자고 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갑자기 얘기해 놓고 또 갑자기 귀찮아졌을 수도 있다. 영국인들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언제 만나 차 한잔 하자', '밥 한 번 먹자'는 빈말을 쉽게 하고, 아주 진지하게 한다. 아마 대부분의 경우에는 말한 순간에는 진심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빈말이 된 것일 수도 있다, 정말 언제 만나 차 한잔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었는데 그걸 실행으로 옮기지 못한 거겠지(이렇게 이해하기로 한 다음부터는 더 이상 이런 빈말에 기대하지 않는다). 하여간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상대방에게 여러 옵션을 주면서(혹은 주는 척하면서) 간접적으로 의향을 묻는 것이 적어도 내가 만난 영국인들의 평균적인 대화 방식이다. 정말 정신적, 시간적 소모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익숙해져 버렸다. 사실은 그들이 그렇게 돌려 말해도 나는 미리부터 그들의 의도가 보인다. 그들도 내가 그들의 의도를 파악한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대화 방식을 상대를 배려하는, 무례하지 않은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카페에서 만나자 했다가 '내가 금요일 시간은 되는데...'라는 식으로 얼버무리자 샨은 갑자기 또 다른 제안을 한다. '그냥 그 카페에서 우리 집 엄청 가까우니 우리 집에 올래?' 나는 역시 또 대답 대신, '초대는 고마운데 폐 끼치기 싫어. 너네 집이나 카페나 둘 중 네가 좋은 쪽으로 하자.'라고 말하니 의외의 진심이 나온다. 본인이 먼저 집으로 오라고 해놓고, '사실은 카페가 더 좋아. 남편에게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으니까!' (역시 대답을 애매하게 하기 너무 잘했다. 내가 당장 '좋아, 너네 집으로 갈게!'라고 답장했더라면 눈치 없는 동양인이 될 뻔했잖아?) 그래도 정원은 보여주고 싶단다. 나는, '그럼 너네 집 정원 잠깐 보고 같이 커피 마시러 갈까. 아님 반대 순서로? 너 좋을 대로!' 샨의 마지막 대답, 'Garden first!' 결국 1시간에 걸쳐 12번의 텍스트를 주고받은 끝에 약속이 정해졌다. 그냥 금요일 오전에 만나 간단히 1-2시간 차 마시자는 약속 잡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오늘의 뜨개 모임 멤버는 나 포함 모두 8명. 나는 매일 그날그날의 일기를 기록하려고 노력하는데, 가끔은 며칠 지나 지난 일기를 써야 할 때, 뜨개 모임 멤버가 몇 명이나 왔는지 생각이 잘 안 나면 우리가 앉았던 테이블에 누가 어떻게 앉아있었는지를 머릿속에 그려 본다. 뜨개 모임은 도서관의 한 편에(왠지는 모르지만 도서관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테이블이 놓여 있다). 긴 쪽 두 면에는 두 명, 다른 짧은 쪽 두 면에는 한 명씩 앉을 수 있는 직사각형의 테이블을 두 개 겹쳐 놓은 커다란 테이블에 매주 수요일 5-10명 정도의 멤버들이 모인다. 8명이 앉으면 딱 맞는 테이블이지만 조금씩 좁혀 앉으면 10명까지도 앉을 수 있다. 내가 작년 여름쯤 처음 이 모임에 나오기 시작했을 땐 항상 6명 정도였는데 그 이후에 5명 정도의 인원이 더 늘었다. 오늘은 나까지 모두 8명이 모였는데, 오늘 대화는 주로 멤버 중 한 명이 최근 입양한 강아지(닥스훈트)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와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영국인인데 그중 제일 활발한 대화참여자(사실은 독식자에 가깝다)는 영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독일인이다. 대화의 주도권은 언어의 유창함보다도 성격, 그리고 이야깃거리의 유무에 더 크게 좌우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아침이다. 그밖에는 지난 이스터 휴가 기간 동안 다녀온 곳, 혹은 한 일들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재미있는 점은, 이미 은퇴한 분들이 많아서 휴가 기간에 구애받지 않아도 될 텐데, 휴가를 매번 남들도 다 가는 휴가기간에 간다는 점이다. 왜일까? 그냥 날씨 좋을 때 한가할 때 가는 게 더 편하고 비성수기라 저렴할 텐데? 언제 한번 물어봐야겠다. 그런데 자칫, '너넨 은퇴해서 할 일도 없고 만날 놀면서 왜 굳이 남들 다 놀 때 놀러 가?' 같은 뉘앙스로 받아들일까 봐, 게다가 부족한 내 영어로 그 뉘앙스가 제대로 전해질 가능성이 낮아서, 안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궁금한 걸 궁금한 대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집에 도착하니 온라인 상점에서 주문한 뜨개실이 오후에 도착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니 옆 화분 뒤에 한눈에 봐도 몽글몽글한 실이 들어있을 것 같은 귀엽고 빵빵한 비닐봉지가 놓여있다. 예전엔(적어도 재작년까지는) 집에 아무도 없으면 부재중 안내문(Delivery note)을 우편물 투입구에 넣어 놓고 가서, 그 쪽지의 내용에 따라서 근처 우체국에 찾으러 가거나 다음 배달 예정일까지 기다리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아마존이든 어떤 온라인 상점에서 주문한 물건도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집 밖 문 앞에 그냥 두고 가는 것이 보편화돼 버렸다. 우리 동네 테라스하우스들은 집에 따라 약 1미터 20에서 1미터 50 정도 높이의 목재 울타리로 둘러싸인 약 깊이 3-4미터, 폭 5미터 정도의 작은 앞뜰이 있는데 걸쇠만 빼면 열리는 게이트를 열고 앞뜰을 지나야 집 대문이자 현관문이 있다. 우체부 및 배달부들은 이 게이트를 열고 안뜰을 지나 문을 두드린다. 그 안뜰은 집집마다 다르게 꾸며 놓았는데 우리 집은 전 주인이 젠 스타일을 좋아했는지 꽃이나 나무를 심는 대신 야외용 회색 타일을 진입로와 집 주변에 둘러 깔고 뜰 가운데 부분에는 조경 자갈을 깔아 놓아서, 우리는 베이 윈도 앞쪽과 정문 옆 타일이 깔린 부분에 여러 개의 커다란 화분을 몇 개 갖다 놓았다. 화분 뒤에 택배상자나 봉지를 숨겨 놓으면 유심히 살펴보지만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요즘 택배기사들은 너무 당연하게 그 화분들 뒤에 택배를 숨겨 놓고 간 뒤, 배송 추적 내역에 '안전한 곳에 둠(Left in a safe place)'라고 당당히 체크해 놓는다. 그나마 이 동네는 비교적 치안이 좋은 편이라 누가 택배를 문 앞에 놓고 가고, 또 그것이 눈에 보여도 게이트를 열고 그것을 가져간 적도, 그랬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다. 테라스 하우스가 두 줄씩 서로 마주 보고 놓여있어서 건너편 집에 사는 이웃이 창밖을 내다보다가 누군가가 물건을 훔쳐가는 걸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에 그런 좀도둑의 출몰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나도 처음 몇 번은 그렇게 택배를 대충 숨겨놓고 간 것에 분개하며 고객리뷰에 불만사항을 적기도 했지만 개선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런 행태는 보편적이고 당연한 일이 돼버렸다. 아직까지는 아무 일 없었지만, 혹시 택배가 분실이라도 되면 어떻게 컴플레인해야 할지 모르겠다. 과연 내 컴플레인이 받아들여질지도 미지수다. 부디 그런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영국에는 이런 일들이 너무 많아서 '그냥 그러려니' 마인드를 장착해야 한다.


뜨개실을 받으면 언제나 마음이 둥둥 뜨듯 설렌다. 잘 만들어진 옷을 받은 것보다 그냥 단순히 실이 살포시 감겨 있는 그 작은 뭉치가 주는 희망과 기대감은 뜨개를 좋아하는 사람만이 공감할 것이다. 오늘 도착한 실들은 다 다른 채도와 명도의 파란색이 주를 이룬다. 필요한 실을 주문하면서 배송비를 줄이기 위해 보통 £25 이상 주문하는데 25 그래도 2.85(아마 이것도 지역마다 다를 것이다)의 배송비가 0.99로 낮아질 뿐 더 많이 주문해도 최소 0.99는 내야 한다. 고작 1.86 차이의 배송비지만 이상하게도 이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자꾸만 25 이상을 맞추게 된다. 게다가 이번에는 내가 필요한 것만 시켜도 16.17라 나머지 8.83를 평소 써 보고 싶었던 실 세 가지를 하나씩 주문하는 걸로 채웠다. 나는 뜨개질할 옷의 디자인을 먼저 정하지 않고 실이 마음에 들면 그제야 그 실로 뜰 옷을 대충 생각하고 거기에 필요한 분량의 실을 더 주문한다. 배송비가 있어도 이곳에서만 시키는 이유는 아주 다양한 브랜드의 실을 보유하고 있고, 다른 사이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기 때문이다. 고객서비스도 매우 개인적(좋은 의미에서)으로 친절하고 신속하다.


양념을 전혀 넣지 않은 대구구이, 두부 구이, 그리고 야채볶음, 파래김, 50프로 현미, 50프로 백미로 지은 밥으로 점심을 먹고 브런치를 열어보니 전체 레이아웃에 뭔가 모를 변화가 생겼다. 작가 신청을 하고 따로 통보를 받은 것이 없는데 뭔가 이미 작가로 글을 연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메일함을 살펴보니 역시나 작가가 된 것을 축하한다는 이메일이 와 있다. 어딘가에 합격했다는 이메일을 받은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런 이메일을 받은 적은 있었나? 가물가물하다. 오늘을 기억하겠다. 뭔가 새로운 것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 같은 기분, 까마득하지만 연애를, 아니 썸을 타기 시작할 때만큼 설렌다.


오후 6시 26분. 하늘이 하루 종일 참고 있던 비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아래층 거실 베이윈도(Bay Window) 셔터 사이로 이미 짙은 회색으로 축축하게 젖은 건너편 집의 지붕이 보인다. 오늘 하루동안 화창함, 흐림, 돌풍, 그리고 비 모두가 동반 출현했다. 역시 영국 날씨. 변화무쌍함의 귀재.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