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 지음撰
서론
북부여기 보기 전에 읽어야 할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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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戌元年帝天姿英勇神光射人望之苦天王郞年二十三從天而降是檀君高列加五十七年壬戌四月八日也依熊心山而起策室蘭濱戴烏羽冠佩龍光劍乘五龍車與從者五百人朝則廳事暮登天至是郞位
癸亥二年是歲三月十六日祭天設烟戶法分置五加之兵屯田自給以備不虞
己巳八年帝率衆往諭故都五加遂撤共和之政於是國人推檀君是爲北夫餘始組也冬十月立公養胎母之法敎人必自胎訓始
壬申十一年北漠酋長山只喀隆襲寧州殺巡使穆遠登大掠而去
庚辰十九年丕薨子準襲父封爲番朝鮮王遣官監兵尤致力於備燕燕遣將秦介侵我西鄙至滿番汗爲界
辛巳二十年命祭天于白岳山阿斯達七月起新闕三百六十六間名爲天安宮
癸未二十二年滄海3)力士黎洪星與韓人張良狙擧秦王政于博浪沙中誤中副車
壬辰三十一年陳勝起兵秦人大亂燕齊趙民亡歸番朝鮮者數萬口分置於上下雲障遣將監之
己亥三十八年燕盧綰復修遼東故塞東限浿水浿水今灤河也
丙午四十五年燕盧綰叛漢入凶奴其黨衛滿求亡於我帝不許然帝以病不能自斷番朝鮮王箕準多失機遂拜衛滿爲博士劃上下雲障而封之是歲冬帝崩葬于熊心山東麓太子慕漱離立
<해설>
임술 원년(BCE239),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天王郞)이라 할 만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단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壬戌 : BCE238) 4월 8일이라. 웅심산(熊心山)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蘭邊)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龍光)의 칼을 차시며 오룡(五龍-오행)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니(산채로 올라갔다), BCE239년에 이르러 즉위하셨다.
계해 2년(BCE238년), 이 해 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烟戶)의 법을 제정하더니 오가(五加)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기사 8년(BCE232년),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共和)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으니 이른바 북부여의 시조가 되었다. 겨울 10월 공양태모의 법(公養胎母之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태교(胎敎)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임신 11년(BCE229),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山只喀隆)이 영주(寧州)를 습격하여 순사(巡使) 목원등(穆遠登)을 죽이고 크게 약탈하고 돌아갔다.
경진 19년(BCE221), 기비(箕丕)가 죽으니 아들 기준(箕準)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였다. 이전에 연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신사 20년(BCE220), 명을 내리사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도록 하시고 7월 새로운 궁궐 336간을 지어 이름하여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계미 22년(BCE218), 창해역사 여홍성(黎洪星)이 한나라 사람 장량(張良)과 함께 진왕정(秦王定 :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 가운데서 저격하였으나 빗나가 부거(副車)를 박살 냈다.
임진 31년(BCE209), 진승(陳勝)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이에 연(燕) 나라․제(齊) 나라․조(趙) 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의 운장(雲障)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케 하였다.
기해 38년(BCE202), 연나라의 노관(盧綰)(B.C.247)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浿水)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는 오늘날의 난하(灤河)다.
병오 45년(BCE195), 연나라의 노관(盧綰)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치 않으셨다. 단제께서는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博士)로 모시고 상․하 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이 해 겨울 단제께서는 붕어하시고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 지내니 태자 모수리(慕潄離)가 즉위하였다.
❖서란시가 웅심산 근처이다.
❖북부여의 도음지는 백악산아사달(장춘시로 짐작됨)
❖三月十六日 祭天: 대영절
❖만번한(滿番汗): 번한성 당산시 번한의 옛 수도, 탕지보, 안덕향
❖패수는 오늘날의 난하(灤河)
丁未元年番朝鮮王箕準久居須臾嘗多樹恩民皆富饒後爲流賊所敗亡入于海而不還諸加之衆奉上將卓大擧登程直到月支立國月支卓之生鄕也是謂中馬韓於是弁辰二韓赤各以其衆受封百里立都自號皆廳用馬韓政令世世不叛
戊申二年帝遣上將延佗勃設城柵於平壤以備賊滿滿赤厭苦不復侵擾
己酉三年以海城屬平壤道使皇弟高辰守之中夫餘一城悉從糧餉冬十月立京鄕分守之法京則天王親總衛戌鄕則四出分鎭恰如柶戲觀戰龍圖知變也
辛未二十五年帝崩太子高奚斯立
<해설>
정미 원년(BCE194), 번조선 왕은 오랫동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매우 풍부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五加)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卓)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이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마한(中馬韓)이라 한다. 이에 이르러 변(弁)․진한(辰韓)의 두 한(韓)도 역시 각각 자기들이 받았던 땅 백 리를 가지고 수도도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무신 2년(BCE193), 단제께서 상장(上將) 연타발(延佗勃)을 파견하여 평양(해성(海城))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는 침범하지 않았다.
기유 3년(BCE192), 해성(海城)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는 황제의 동생 고진(高辰-고주몽 증조부)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中夫餘-해성~요동반도) 일대가 모두 복종하매 그들에게 양곡을 풀어 주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경향분수(京鄕分守)의 법을 세웠으니 서울도성은 곧 천왕이 직접 수비를 총괄하며 지방은 네 갈래(네 군데)로 나누어 군대를 주둔하도록 하니 마치 윷놀이에서 용도(龍圖)의 싸움을 보고 그 변화를 아는 것과 같았다.
신미 25년(BCE17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高奚斯)가 즉위하였다.
❖유적流賊: 떠돌이 도적은 위만을 말한다.
❖오가(五加)의 무리 -> 대신들
❖전삼한은 단군조선 -> 한반도 중마한 탁이 우강한 진한, 번한에 임금 임명 -> 후삼한 신라, 가야 백제
❖연타발(延佗勃): 장사꾼(X), 소서노의 아버지(X), 고구려 개국 공신 연타발과 이름은 같지만 한자가 다름.
❖수유(須臾): 하북성 창려현, 산동성 동평현
壬申元年正月樂浪王崔崇納穀三百石于海城先是崔崇自樂浪山載積珍寶而渡海至馬韓都王儉城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
癸丑四十二年帝躬率步騎一萬破衛賊於南閭城置吏
庚申四十九年一群國遣使獻方物是歲九月帝崩太子高于婁立
<해설>
임신 원년(BCE169), 정월 낙랑왕(樂浪王) 최숭(崔崇)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전마한 지금의 평양)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BCE195)년의 겨울이었다.
계축 42년(BCE128),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 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南閭城)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경신 49년(BCE121), 일군국(一群國)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 이해 9월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高于婁-해우루)가 즉위했다.
❖남여성(南閭城): 창해 부근으로 추측
❖갈석산에 낙랑봉이 있다. 산동성 조성현에 낙랑산이 있다-이유립
辛酉元年遣將討右渠不利擢高辰守西鴨綠增强兵力多設城柵能備右渠有功陞爲高句麗侯
癸亥三年右渠賊大擧入寇我軍大敗海城以北五十里之地盡爲虜有
甲子四年帝遣將攻海城三月而不克
丙寅六年帝親率精銳五千襲破海城追至薩水九黎河以東悉降
丁卯七年設木柵於坐原置軍於閭以備不虞
癸酉十三年漢劉徹寇平那滅右渠仍欲置四郡盛以兵四侵於是高豆莫汗倡義起兵所至連破漢寇遺民四應以助戰軍報大振
甲午三十四年十月東明王(國)高豆莫汗使人來告曰我是天帝子裝欲都之王其避之帝難之是月帝憂患成疾而崩皇弟解夫婁立之東明王以兵䝱之不己君臣頗難之國相阿蘭弗奏曰通河之濱迦葉之原有地上壤膏腴宜五穀可都遂勸王移都是謂迦葉原夫餘或云東夫餘
<해설>
신유 원년(BCE120),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西鴨綠-서요하)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위만의 손자)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高句麗候)로 삼았다.
계해 3년(BCE118)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 땅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다.
갑자 4년(BCE117) 단제께서 장군을 보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석 달 걸려도 이기지 못하였다.
병인 6년(BCE115) 단제가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니 구려하(九黎河)의 동쪽 모두가 항복해 왔다.
정묘 7년(BCE114), 목책을 좌원(坐原)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여(南閭)에 두어 이로써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케 하였다.
계유 13년(BCE108), 한(漢)의 유철(劉澈)이 평나(平那)를 노략질하여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郡)을 두고자 하여(한사군)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高豆幕汗)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갑오 34년(BCE87)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와서 고하기를「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라고 하니 단제는 매우 곤란해졌다. 마침내 단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동생인 해부루(海夫婁)가 이에 즉위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君臣)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때 국상(國相)인 아란불(阿蘭弗)이,「통하(通河)의 물가 가섭(迦葉)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기름지고 오곡이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라고 하며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라 하며 또 동부여(東夫餘)라고도 한다.
❖東明王(國): 두 가지로 쓰여졌다.
❖고구려는 파림좌기 서안평이고, 서요하도 고구려로 불렸을 수 있다.
❖해성海城 : 지금의 요령성의 해성시
❖살수 : 해성보다 서쪽에 있어야 한다. 대요하나 쌍태자
❖구려하(九黎河) : 요하
❖좌원(坐原) : 대릉하 상류
❖한사군은 설치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설사 설치되었더라도 창려현 부근이다.
❖대방군은 요령성 서쪽과 하북성에 있었다.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 또는 동부여(東夫餘)는 통하 지역에 있었음
癸酉元年是爲檀君高于婁十三年帝爲人豪俊善用兵嘗見北夫餘衰漢寇熾盛慨然有濟世之志至是卽位於卒本自號東明或云高列加之後也
乙亥三年帝自將傳橔所至無敵不旬月衆至五千每與戰漢寇望風而
潰遂引兵渡九黎河追至遼東西安平乃古槀離國之地
甲午二十二年是爲檀君高于婁三十四年帝遣將破裵川之漢寇與遺民幷力所向連破漢寇擒其守將拒以有備
乙未二十三年北夫餘奉城邑降屢哀欲保帝廳之降封解夫婁爲候遷之岔陵帝前導鼓吹率衆數萬而入都城仍稱北夫餘秋八月與漢寇屢戰于西鴨綠可之上大捷
壬寅三十年五月五日高朱蒙誕降于岔陵
辛酉四十九年帝崩以遺命葬于卒本川太子高無胥立
<해설>
계유 원년(BCE108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高于婁) 13년이다. 제(帝)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명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卒本)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高列加)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 3년(BCE106),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한 달(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과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서압록)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藁離國) 이다.
갑오 22년(BCE87), 단군 고우루(高于婁) 34년에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裴川)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을미 23년(BCE86),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가 이를 듣고 해부루(海夫婁)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岔陵)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백악산 아사달)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서압록하(西鴨綠河-서요하)의 상류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임인 30년(BCE79) 5월 5일에 고주몽(高朱蒙)이 분능(岔陵)에서 태어났다.
신유 49년(BCE60), 제가 붕어하고 유명(遺命)에 따라 졸본천(卒本川)에 장사 지냈다. 태자 고무서(高無胥)가 등극하였다.
❖두막루豆莫婁=최고의 왕
❖졸본(卒本)은 수분하시 수양진이다.
壬戌元年帝卽位于卒本川與父老會于白岳山立約祭天頒行事例內外大悅
帝生而有神德能以呪術呼風喚雨善賑大得民心有小解慕漱之稱時漢寇騷亂遍于遼左屢戰得捷
癸亥二年帝巡到寧古塔得白獐冬十月帝崩高朱蒙以遺命入承大統
<해설>
임술 원년(BCE59) 제가 졸본천에서 즉위하고는 백악산에서 장로들과 함께 모여 사례(史例)에 따라 널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신과 같은 덕이 있어 능히 주술로서 바람과 비를 불러 잘 구제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小解慕漱)라 불렸다. 이때에 한(漢) 나라의 오랑캐들이 요하(난하)의 왼(동)쪽에서 널리 소란을 피웠으니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계해 2년(BCE58) 제가 영고탑(해림시, 영한시)을 순시하다가 흰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 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
先是帝無子見高朱蒙爲非常人以女妻之至是卽位時年二十三時下夫餘人將欲殺之奉母命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德友行至岔陵水欲渡無梁恐爲追兵所迫告水曰
我是天帝子河伯外孫今日逃走追者垂及奈何於是魚鼈浮出成橋始得渡魚鼈乃解
<해설>
이보다 앞서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딸과 혼인시켰는데 이때가 23세였다. 부여 사람(왕손 등)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서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과는 덕으로써 사귄 친구였던지라 동남쪽으로 함께 길을 떠나 차릉수(岔陵水)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너려고 하여도 다리가 없었으므로 뒤쫓아오는 군사들에게 몰릴까 두려워하여 물에 고하기를「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인데 오늘 도주함에 있어 추격병은 다가오고 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하니, 이때에 물고기 자라 따위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므로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고무서는 딸만 셋, 소서노는 둘째 딸
❖차릉수(岔陵水)-송화가의 지류
乙未元年王爲北夫餘所制徙居迦葉原赤稱岔陵宜五穀尤多麥又多虎豹熊狼便於獵
丁酉三年命國相阿蘭弗設賑招撫遠近流民使及時飽暖又給田耕作不數年國富民殷時有時雨滋岔陵民歌王正春之謠
<해설>
을미 원년(BCE86), 왕은 북부여(北夫餘)때문에 제약을 받아 가섭원(迦葉原) 혹은 차릉(岔陵)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옮겨서 살았다.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범․표범․곰․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정유(BCE84) 3년,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에게 명하여 널리 베풀어 주변의 유민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잘 먹여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며 또 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 해 안되어 나라는 풍부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졌다. 때에 필요할 때마다 비가 내려 분능(岔陵)을 기름지게 하는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正春)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고구려의 국수는 버드나무
❖가섭원(迦葉原) 혹은 차릉(岔陵)은 통하 지역에 있었음
❖해부루(海夫婁) : 해모수의 3 세손, 4대 고우루 단제가 죽자 동생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고두막(5대 단제)에게 쫓기어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겨와서 살게 된다.
壬寅八年先是河伯女柳花出遊爲夫餘皇孫高慕漱之所誘强至鴨綠邊室中而私之仍升天不是父母責其無媒而從之遂謫居邊室高慕漱本名弗離支或曰高辰之孫王異柳花同乘還宮而幽之是
歲五月五日柳花夫人生一卵有一男子破殼而出是謂高朱蒙骨表英偉年甫七歲自作弓矢百發百中夫餘語善射爲朱蒙故以名云
<해설>
임인 8년(BCE79), 앞서 하백녀(河伯女) 유화(柳花) 부인이 나들이를 나갔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高慕漱-불리지)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여기서는 송화강)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돌아 가셨다)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갔음을 책망하여 마침내 구석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弗離支)이며 혹은 고진(高辰)의 손자라고도 한다. 왕께서는 유화(柳花)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그해 5월 5일,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아이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은 고주몽(高朱蒙)이라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잘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다.
甲辰十年王老無子一日祭山川求嗣所乘馬至鯤淵見大石相對俠淚王怪之使人轉其石有小兒金色蛙形王喜曰此乃天�我令胤乎乃收而養之名曰金蛙及其長立爲太子
<해설>
갑진 10년(BCE77),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 날 산천에 제사 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자 큰 돌을 마주 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들을 시켜 그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더라. 왕은 몹시 기뻐하며「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신 아기로다」라고 하시며 곧 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장성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壬戌二十八年國人以高朱蒙爲不利於國欲殺之高朱蒙奉母柳花夫人命東南走渡淹離大水到卒本川明年開新國是爲高句麗始祖也
癸酉三十九年王薨太子金蛙立
<해설>
임술 28년(BCE59), 나라 백성들이 고주몽을 가리켜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수(淹利大水)를 건너 졸본천(卒本川)에서 나라를 여시니 이분이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계유 39년(BCE48), 왕이 죽고 태자 금와가 즉위했다.
❖차릉: 엄리대수(淹利大水-송화강)를 건너 졸본천(卒本川-비류하)
❖엄리대수(淹利大水) : 송화강의 상류 휘발하(輝發河)
甲戌元年王遣使高句麗獻方物
丁酉二十四年柳花夫人薨高句麗以衛兵數萬返葬于卒本命以皇太后禮遷就山陵建廟祠于其側
甲寅四十一年王薨太子帶素立
<해설>
갑술 원년(BCE47), 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특산물을 바쳤다.
정유 24년(BCE24), 유화 부인이 돌아가셨다.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으로 모셔와 장사 지냈는데, 황태후의 예로써 억지로 산 같은 능을 만들고 곁에 묘사(廟社)를 짓게 하였다.
갑인 41년(BCE7년),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 대소(帶素)가 즉위하였다.
乙酉元年春正月王遣使高句麗請交質子高句麗烈帝以太子都切爲質都切不行王恚之冬十月以兵五萬往侵卒本城大雪多凍死乃退
癸酉十九年王侵攻高句麗至鶴盤嶺下遇伏兵大敗
壬午二十八年二月高句麗擧國來侵王自率衆出戰遇泥淖王御馬陷不得出高句麗上將怪由直前殺之我軍猶不屈圍數重適大霧七日高句麗烈帝潛師夜脫從間道而遁去
<해설>
을묘 원년(BCE6), 봄 정월에 왕은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국교를 청하고자 왕자를 인질로 삼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열제(烈帝)-유리왕이 태자 도절이 이행하지 않자 대소가 졸본성을 침략하였으나 큰 눈으로 병사들이 많이 동사하여 패하였다.
계유 19년(AD13), 왕께서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자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이때 아들 무휼이 전쟁에 참가함)
임오 28년(AD22), 2월 고구려가 나라의 힘을 다시 모아서 침범해 오니 왕은 몸소 무리를 이끌고 출전하였는데, 진흙탕을 만나 왕의 말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에 고구려 대장군 괴유(怪由)가 바로 앞에서 있다가 살해하였다. 그래도 부여군은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큰 안개가 7일 동안이나 계속되니 고구려 열제(대무신)는 몰래 병사를 이끌고 밤에 탈출하여 사잇길을 따라 도망쳐 달아나 버렸다.
❖고구려는 기원전 26년 늘봄(장춘)으로 수도를 옮김
❖기원전 19년에 고주몽과 소서노가 돌아가셔서, 같은 해에 유리왕과 비류가 모두 왕위에 오름
❖대소 : 금와왕의 7형제 중 맏아들. <출처 :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열제(烈帝) : 3대 대무신, 대주류왕, A.D.18~A.D.43
夏四月王弟與從者數百人奔至鴨綠谷見海頭王出獵遂殺之而取其民走夷曷思水賓立國稱王是爲曷思至太祖武烈帝隆武十六年八月都頭王見高句麗日强遂擧國自降凡三世歷四十七年而國絶命都頭爲于台賜第宅以琿春爲食邑仍封爲東夫餘候
<해설>
여름 4월, 왕의 동생은 따르는 무리 수백 인을 데리고 길을 떠났는데 압록곡(鴨綠谷)에 이르러 해두왕(海頭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는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였고, 그 길로 갈사수(曷思水)의 변두리를 차지하고는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니, 이를 갈사(曷思) 때, 도두왕(都頭王)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짐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대저 3세 47년 만에 나라가 망했다. 고구려는 도두를 우대(于台)라고 부르도록 하고 저택을 하사하시니, 혼춘(琿春)을 식읍으로 삼게 하여 동부여 후(東夫餘候)에 봉하였다.
❖압록곡(鴨綠谷)은 송화강
❖해두(海頭)는 흑룡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곳
❖도두왕은 갈사(曷思) 부여를 세운 사람의 손자 -> 우태벼슬을 주고 동부여 후로 봉함 -> 남갈사부여
❖갈사(曷思) : 옥저(沃沮)를 말한다.
秋七月王從弟謂國人曰先王身弑國亡人民無所依曷思偏安不能自國吾赤才智魯下無望與復寧降以圖存以故都人民萬餘口投高句麗高句麗封爲王安置椽那部以其背有絡文賜姓絡氏後稍自立自開原西北徙到白狼谷又近燕之地至文咨烈帝明治甲戌以其國折入于高句麗椽那部絡氏遂不祀
<해설>
가을 7월, 왕의 친척 동생이 여러 사람들에게,「선왕(대소)께서는 시해(弑害) 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백성들은 의지할 곳 없다. 갈사는 두루 안락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고, 나 또한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새롭게 일으킬 수가 없으니 차라리 항복함으로써 살기를 도모하리라」하고 옛 도읍의 백성 만 여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에 떼와 같은 무늬가 있었던 까닭에 낙(絡)씨의 성을 하사하였는데 뒤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開原)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白狼谷)에 이르니 바로 연(燕) 나라의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자열제(文咨烈帝 : 21대, A.D.492)의 명치 갑술(A.D.494)에 이르러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조차 끊겼다.
❖연나부: 장단경 아사달 개원서북쪽
❖백랑곡(白狼谷)
자료출처 및 참고
환단고기 원전강독 북부여기 1차 강독 총론ㅣ윤창열 교수ㅣ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리 북부여
https://www.youtube.com/watch?v=Ty65EoUIJ4A
한류아카데미
https://m.cafe.daum.net/chunbooi/eOCI/225?listURI=%2Fchunbooi%2FeOC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