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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Jul 11. 2023

부여의 유래와 8개의 부여

북부여기 보기 전에 읽어야 할 내용

서론

부여사를 찾는 날이 곧 역사 광복의 날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리 북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의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 원전강독 북부여기 강독 총론 윤창열 교수

우리 민족사에 나온 8개의 부여

우리 역사에서 부여란 말이 처음 나온 것은 조선의 초대단군님 넷째 아드님 이름이 부여입니다.(규원사화) 부여란 뜻에는 광명, 불, "아침에 뿌였게 밝아온다"할 때 뿌였게 있는 듯합니다.

8개 부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첫 번째 부여는 조선의 초대단군(B.C.2333)님의 4남 이름입니다.

1) 고조선 초대단군의 4남 부여를 부여 후로 임명.(규원사화)

 -1남 부루태자, 물을 잘 다스림 2대 단군이 됨.

 -2남 부소, 불을 잘 다룸, 3남 부우, 의술에 뛰어남, 4남 부여 군사를 잘 다룸 모두에게 서쪽땅에 봉해주었다.

2) 기원전 1286년 22대 색블루단군이 부여신궁(백악산 아사달, 지금의 길림성 농안, 장춘지역)에서 즉위하였는데 이곳 부여신궁이라고 하였으니 초대 단군님의 4남을 부여 후로 봉한 지역으로 짐작됩니다.

❖서란시 근처에 웅심산이 있었다.



2. 두 번째 고조선 제3왕조 국호를 대부여라 했습니다.

1) 고조선 제3왕조. 44대 구물 단군~47대 고열가 단군

2) 43세 물리단군 때 우화충의 반란 -> 물리단군 도망가다 돌아가심 -> 44세 구물 단군 깨서 우화충의 반란을 평정하고 장경단(지금의 요령성 개원)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대부여라고 개칭 - 이때 삼조선의 병권을 분권 시켜, 고조선이 세력이 약해짐.

*단군조선 때 4번의 큰 반란 (1) 9세 아술단군 때 우착의 반란 - 하얼빈, (2) 22대 색불루 단군 때 신독의 반란 - 백악산아사달, (3) 43세 물리단군 때 우화충의 반란, (4) 46세 보홀단군 때 한개의 반란


3. 세 번째 부여 해모수 단군의 북부여

북부여는 기원전 239~기원전 58년(182년 역사)의 역사로 범세동이 북부여기 상, 하 가섭원부여기를 지어서 부여사를 정리함. 북부여는 고조선과 고구려를 연결하는 고리이며,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원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북부여 국가의 존재에 대한 주요 고증 사료: 1) 광개토태왕비 출자북부여. 2) 집안시 모두루무덤의 벽에 원출북부여. 3) 삼국유사 국호북부여 이유립선생님게서는 북부여를 "원시고구려" 라고 했습니다.


1세 단군 해모수가 239년 임술년 4월 8일 웅심산(지금의 길림성 서란) 북부여를 건국했습니다. 해모수의 고향이 고구려(고리 고구리)입니다. 그래서 고구려라고도 했다고 합니다. 단군조선은 기원전 238년에 막을 내리고, 232년까지 6년간 오가가 공화정을 하다가 북부여에 통합하였습니다. 이때 기비(기원전 232~221)가 큰 공을 세웠다. 이후 번조선의 왕이 된다고 전합니다. 백악산 아사달(장춘지방)에 도읍했습니다.

기원전 202년 연왕 노관과 패수를 국경으로 삼았는데, 패수는 조하(지금의 조백신하)이다.

기원전 195년 위만이 번조선에 망명을 청해왔고, 번조선왕 기준(하북성 창려에 도읍)이 그를 박사로 삼아 상하운장은 봉해주었습니다. 이해에 해모수가 붕어했습니다.

이해 겨울 낙랑왕 최숭이 낙랑산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에 와서 낙랑국(기원전 195~기원후 37) 건국했습니다. 232년-호동왕자 낙랑공주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바로그 낙랑국입니다.

❖서란시 근처에 웅심산이 있었다.

백록산 : 서부여가 개원북쪽에서 백록산으로 옮겨감

❖해모수의 고향이 고구려라서 북부여를 고구려라고도 함.

패수는 조하(지금의 조백신하), 지금의 천진시를 관통한다.

창려 : 험독, 평라라고도 함 번조선의 도읍이 있었던 곳

환인: 고구려 졸본(오녀산성)이라 하지만 전혀 아님

수양진. 수분하시 : 졸본 지역

동강시 : 해두왕, 대소의 동생이 해두왕 죽인 곳

통하 : 동부여 지역

❖서압록: 요하를 말한다.

❖고두막한 호가 동명이다.


2세 단군 모수리(기원전 195~170)

기원전 194년 위만이 험독(지금의 하북성 창려현)을 함락하여 위만정권을 세웠습니다. 절대로 위만조선이라 불릴 수 없는 일부지역(번조선 일부지역)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 시기에 북부여는 건재하게 존재합니다.

위만정권 위치도와 한무제의 동방침략

위만에게 쫓겨난 기준왕은 금강 하구로 들어와 왕이 되었으나 후손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지금도 익산 지역에 미륵산 꼭대기에 기준성이 있습니다. 금강하구에 어래(임금이 온)산, 입마산, 목군둔(군사주둔) 이라는 지명도 있습니다. 이때 상장 탁이 월지(지금의 익산)에 이르러 중마한-(후삼한의 중주국)(기원전 194~9) 203년 지속, 아방강역고) 건국했으며  -> 이후에 백제 온조에게 망합니다. 이때 무강왕 탁이 박사 악롱건을 명해 중진한(경주부근)(기원전 193~57)을 다스리게 하고 좌대부 진왕을 명해 중번한(기원전 193~39)을 다스리게 했다고 합니다.(동사년표)

기원전 192년 활제(모수리단군의 동생) 고진(해모수의 둘째 아들)으로 해성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3세 단군 고혜사(기원전 170~121)

기원전 169년 낙랑왕 최숭이 곡식 300석을 해성에 보냄.

기원전 128년 예군 남려 가 우거왕에 반기를 들고 한에 귀순, 한이 창해군 설치. 가원전 126년까지 2년 지속.

우거를 배신한 신하들 5명에 제후 책봉

4세 단군 고우루(해우루)(기원전 121~87)

기원전 120년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지금의 서요하)을 지키게 함. 우거를 막는데 공을 세워 고구려 후로 승진시킴

기원전 115년 해성을 수복하고 구려하(지금의 요하) 동쪽을 모두 되찾음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우거를 멸망시키고, 북부여로 쳐들어오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물리침

백록산 서부여의 수도가 있었던 곳  창려(험독, 평라)

지금의 하북성 조하(조백신하),  창려현 번조선의 도읍지, 기준이 도읍, 위만이 탈취, 한 문제가 우거를 물리치고 한사군설치 지역

지금의 흑룡강성 하얼빈시 동쪽에 통하가 있는데 동부여가 있던 곳, 동강시: 대소가 해두왕을 죽인 장소 사냥터  수분하시 수양진 -졸본지역이다.

192년 해성에서 고진을 발탁해서 위만을 막아내게 했는데

한무제와 고두막한 전쟁

4. 네 번째부여 졸본부여, 동명부여, 후기 북부여

5세 단군 고두막한(기원전 108년~60년)-고열가의 후손

기원전 108년 졸본(흑룡강성 수분하시 수양진에서 즉위) - 정인보, 이유립 주장

강단사학자들은 환인-오녀산성-고구려 졸본 도읍지라고 하는데 절대 아니다.

나라를 동명이라고 칭함. - 고두막한의 호가 동명, 동명부여라고도 함

기원전 106년 군사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서안평(내몽고 자치구의 파림좌기, 요나라의 상경)까지 추격. 서안평은 옛 고리국 해모수의 고향이다.

기원전 86년 해부루를 후로 강등시켜 차릉으로 옮김(동부여)

해부루는 여전히 북부여라 일컬음.

고두막한도 여전히 북부여라고 칭함

서안평(내몽고 자치구의 파림좌기(巴林左旗))은 옛 고리국 해모수의 고향, 여기가 고리, 고구리, 고구려


6세 단군고무서(기원전60~58)

고무서 단군은 자식이 없어 소서노와 고주몽을 결혼시켜 사위에게 제위를 넘겼다.

고주몽은 기원전 58년 북부여의 7대 간군이 되고 기원전 37년 고구려로 국호를 바꾸었다. - 연호를 다물이라 하였다.

북부여 연대기

5. 다섯 번째 가섭원부여, 동부여(기원전86~기원후22, 108년 지속)

1세 해부루(기원전 87~48)

기원전 86년 고두막한의 위협과 국상 아란불의 권유로 통하(지금의 흑룡강성 통하현)로 옮겨감

기원전 77년 곤연에서 금와를 얻음.

2세 금와(기원전 48~7)

기원전 24년 유화부인이 돌아기심, 주몽이 졸본으로 모셔감

3세 대소(기원전 7~기원후 22)

기원후 22년 2월 대소왕이 고구려 상장 괴유에게 죽임을 당함.

부여사의 흐름과 위치

6. 여섯 번째 갈사부여(기원후 22~68)

1세 대소의 동생(기원후 22~?)

여름 4월에 대소왕의 동생이 추종자 수백 명을 거느리고 압록곡(흑룡강과 송화강의 합류처)에서 해두왕을 죽이고 갈사수(오소리강) 유역에 갈사국 세움

2세 도두왕(?~68)

기원후 68년 3대 도두왕이 고구려에 항복, 고구려는 도두왕을 우태로 삼고 훈춘을 식읍으로 삼아 동부여 후에 봉해주었습니다..-남갈사라고도 함.


7. 일곱 번째 연나부부여, 서부여, 낙씨부여(기원후22~494)

1) 기원후 22년 7월에 대소의 종제가 고구려에 항복하자 왕으로 봉해 연나부(서북)에 안치

2) 그의 등에 낙문이 있어 낙씨성을 하사

3) 개원서북에서 백랑곡(객좌현성 서남쪽 백록산 )으로 이주하여 번성. -서쪽에 위치하여 서부여라 명명했지만 그들은 그냥 "부여"라 했습니다. 중국사서에서 말한 대부분의 부여는 이 서부여입니다.

4) 의려왕이 285년 모용외에게 패한 뒤 아들 부라에게 왕위를 넘기고 백랑산을 넘어 일본에 건너가 왜를 평정하고 애마토 왜를 세우고 15대 오진왕이 되었다 함. 삼신의 부명에 응한다 하여 응신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함.

오진왕은 의려 혹은 그의 아들 의라 2가지 설이 있다.

통전에는 285년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의려가 자살하였다고 하였다. 환단고기는 앞의 이야기를 이어 의려완이 바다로 도망하여 돌아오지 않자 286년 아들의라가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 일본 오사카에 대의라 신사가 있다. 궁사가 말하기를 "의라는 3세기말 한반도에서 건너와 왕족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5) 494년 문자열제 때 고구려에 병합. 이전부터 또는 이후 서방으로 진출.

6)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 후한서, 진서 등의 부여전은 모두 서부여에 대한 내용이다.


<일본에 진출한 부여족>

1) 기다 사다기치(1871~1939)는 일본 왕실의 조상이 부여, 백제계라고 주장하고 부여는 4세기에 일본에 건너와 나라를 세웠다고 함. 일본의 기마민족설을 최초로 주장

2)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1906~2002)는 동북 부여계의 기마민족이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열도에 들어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에 야마토(대화) 지방에 야마토조정을 세웠다는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을 주장

3)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음식을 먹을 때는 모두 조두(목기 그릇)를 사용하고 여럿이 모이는 때에는 서로 절하면서 잔을 권하는데 잔을 씻어 권한다."라고 했고 또 "통역하는 사람이 말을 전할 때는 모두 무릎을 꿇고 손을 땅에 대고 조용히 말을 한다."라 하였다. 부여인과 일본인의 강한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서방으로 진출한 부여족(신용하의 부여족과 불가리아)>

두막루(서기 410?~726) 부여의 유민이 나하(제1송화강)를 건너가 건국한 나라 대막루, 대막로, 달말루라고도 부른다. 위치는 흑룡강성 눈강 동쪽, 송화강 북쪽, 송눈평원의 동부, 송요평원의 북쪽 지역으로 하얼빈, 치치하얼 근처이다. 726년 대진국 무왕과 흑수말갈에 멸망. 위서 열전 두막루 조를 보면 "옛날의 북부여"라고 했고 신당서 유귀전에서 "스스로 북부여의 후예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1) 4세기 말경 부여족의 일파가 중앙아시아의 카스피해와 흑해사이에 위치한 "갑카스(코카서스)" 지방으로 이주. 그 후 5~7세기 초까지 돈강유역과 북갑카스 지역으로 계속 이주.

2) 서양에서 7세기부터 불가(Bulghar)족의 역사가 나오는데 이 불가족이 부여족이다. 불가는 부여(불)의 가(家)라는 뜻이다.

3) 635년 불가족은 족장 쿠브라트의 지도 아래 대불가리아 건국.

4) 642년 쿠브라트 사망 후 그의 다석 아들의 권력싸움으로 불가리아 해체.

5) 둘째 아들 코라그가 세운 "고추불가국"은 14세기까지 번성. 현재 러시아의 타타르 자치공화국으로 존재.

6)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가 이끈 불가족은 발칸반도로 남하. 당시 불가족은 동로마군과 결전을 앞두고 비토새산(발칸산)에서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의식을 행하였다고 함.

7) 이때 로마군을 물리치고 불가리아 제1제국(686~1018)건국.

8) 불가족은 귀족이 되어 보야(부여의 변음)라 불렸고, 크롬(Krum) 황제 때 수도를 옮겨 소비(지금의 소피아)라 불렀다.

9) 황제는 소비의 산에 올라 단군에게 제사를 올리고 그산 이름을 발칸으로 정하였다.

10) 신용하는 "발칸 산"을 "밝안산". "밝산", "백산" 등 우리말 지명과 동일한 것으로 봄. 한 민족은 고대부터 백산(밝은 산)에서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이발칸산에서 발칸반도라는 이름이 유래.

11) 크롬황제가 병사한(814) 후 국력약화. 12세기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 세움.

12. 불가리아인은 서양에서 유일하게 갓난아기의 엉덩이에 반점(몽고반점)이 있다.


8. 여덟곱번째 백제(남부여)

백제의 26대 성왕(523~554)

538년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천도하고 국호는 남부여라 하였다. 백제의 족의 성씨가 부여씨입니다.

<부여와 고구려>

1) 삼성기상에서 고주몽이 해모수의 사당을 세워 태조로 삼았다고 하였으나 북부여가 원시고구려이다.

2) 북한에서는 삼국사기에서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갑신년에 건국되었다고 한 것을 4주갑을 올려 기원전 277년 갑신에 건국되었다고 주장한다.

3) 광개토대왕비문에 17 세손 광개토태왕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광개토열제는 고주몽의 13 세손임으로 해모수 단군부터 계산한 것이다. 1대 해모수 -> 2대 고진 -> 3대 불명ㅇㅇ -> 4대 불리지(고모수) -> 고주몽

4) 신당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에 "고구려 비기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900년이 안되어 80살 먹은 대장에 의해 멸망한다"라고 하였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조에도 나옴)

기원전 238+기원후 668=907년

기원전 232+기원후 668=900년

5) 이때(668년) 이세적(584~669)의 나이가 85세였다.

6) 한국사의 국통맥은 북부여(원시고구려)->본고구려->대진국(후고구려)으로 구려정통론으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부여사를 찾는 날이 곧 역사 광복의 날입니다.  서부여는 대소왕의 종제 -> 시 ->위구태->위거->마여->의려->의라 등으로 계승되다가 494년에 고구려에 합병되며 명말했습니다.

7) 강단사학회는 중국사서에서 말하는 서부여를 전체 부여의 모습으로 서술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서부여사는 부여의 끝자락 역사이다.

8) 부여사는 우리 한민족사의 머리와 몸통을 이어주는 중요고리이다.

9) 부여사의 회복은 단절된 국통맥을 연결해 줄 뿐만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를 밝혀주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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