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발해) 황제국 해동성국
서론
이 글은 윤창열교수님의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 강의를 기반으로 작성하였으며,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의 내용에 윤창열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설명을 추가하여 이해가 쉽도록 작성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역사를 이어받아 해동성국이 된 대진국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우리는 국명을 발해로 알고 있는데 발해는 중국仲國이 자기 임의대로 대진국을 불렀던 이름입니다. 안타깝도 부끄럽게도 우리 역사를 잘 모르고 중국仲國의 역사서에 의존하여 배운 역사만 알고 있습니다.
대진국은 고구려를 계승하였기에 고구려의 땅을 회복하고, 단군조선의 정치철학을 계승하여 신교神敎를 전파하여 문화 대부흥을 일으켜 해동성국을 이룹니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밝히고 알아야 하겠습니다. 단군조선과 북부여, 그리고 고구려가 다스렸던 만주땅을 마지막으로 다스렸던 대진국의 역사는 15세를 잇지만, 큰 나라가 몇 달 만에 갑자기 망하여 우리가 고대 역사 때부터 지켜온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진국을 통하여 단기고사, 조대기 등의 역사서적과 유물을 통하여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을 수 있었고, 우리 민족의 정신 사상을 통하여 해동성국을 이룰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또다시 우리 역사를 올바로 알고, 우리 민족정신을 되살려 일신강충(一神降衷), 성통광명(性通光明), 재세이화 (在世理化), 홍익인간 (弘益人間) 세상을 이루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조대기 왈
朝代記에 曰
개화이십칠년구월이십일일 평양성 함락 시
開化二十七年九月二十一日 平壤城이 陷落時에
진국장군대중상 수서압록하
振國將軍大仲象이 守西鴨綠河라가
문변 수솔중주험 노경개원
聞變하시고 遂率衆走險하사 路經開原하시니
문풍원종자 팔천인
聞風願從者가 八千人이라.
내동귀이동 지동모산이거 견벽자보
乃同歸而東하사 至東麰山而據하시고 堅壁自保하사
칭국후고구려 건원중광
稱國後高句麗시오 建元重光하시니
전격소도 원근제성 귀부자중
傳檄所到에 遠近諸城이 歸附者衆이라.
유이복구토 위기임 중광삼십이년오월 붕
惟以復舊土로 爲己任이라가 重光三十二年五月에 崩하시니
묘호왈세조 시호왈진국열황제
廟號曰世祖이시오 諡號曰振國烈皇帝시니라.
<해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개화27년(단기 3001, 668)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될 때 진국 장군 대중상이 서압록하(서요하)를 지키다가 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셨다.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려 개원(심양 부근 개원)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8천 명이었다. 함께 동쪽으로 돌아가 동모산(동화시로 부근산으로 추측)에 이르러 웅거하고, 성벽을 굳게 쌓고 스스로 보전하여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칭하고, 연호를 중광이라 하셨다.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멀고 가까운 여러 성에서 합류하는 자가 많았다. 오로지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다가 중광32년(신시개천 4569, 단기 3032, 699) 5월에 붕어하시니, 묘호는 세조요 시호는 진국열황제이시다.
❖개화: 고구려 28세 보장열제의 연호
❖서압록: 지금의 서요하를 말한다. 고대에 지금의 요하가 압록으로 불렸다는 사실은 『삼국유사』에서도 확인된다. 『삼국유사』「순도조려順道肇麗」조를 보면, “요수(요하)는 일명 압록인데 지금은 안민강이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개원: 단군조선의 세 번째 도읍지인 ‘장당경 아사달’이 있던 곳, 지금의 만주 요령성 창도현 남쪽에 있는 개원사이다.
❖동모산: 일명 천계산으로 중국 사서에서는 동모산東牟山이라 하였다. 지금의 만주 길림성 돈화시 남쪽 현유현에 있는 성산자산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중광 32년: 대조영이 즉위한 연도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대조영이 698년에 대진을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대진의 실질적인 건국자는 대중상이다.
❖조대기朝代記는 대진국에서 쓴 역사서로 대진국의 유민들이 가져온 대진국의 역사책입니다.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이 쓴 단기고사도 대진국에서 전해졌습니다.
태자조영 종부사 자영주계성
太子祚榮이 從訃使하사 自營州薊城으로
솔중지 즉제위 축홀한성 천도
率衆至하야 卽帝位하시고 築忽汗城하사 遷都하시고
모군십만 위성대진 내정책입제
募軍十萬하시니 威聲大振이라 乃定策立制하사
항당위적 복수자서 여말갈장걸사비우
抗唐爲敵하시고 復讐自誓하실새 與靺鞨將乞四比羽와
거란장이진영 악수연병
契丹將李盡榮으로 握手聯兵하사
대파당장이해고어천문령 분제장
大破唐將李楷固於天門嶺하시고 分諸將하사
치수군현 초무유망 주호정착
置守郡縣하시며 招撫流亾하사 周護定着하시니
대득민망 만강유신
大得民望하야 萬綱維新이라
국호 정위대진 연호왈천통
國號를 定爲大震하시고 年號曰天統이오
거유고구려구강 척지육천리
據有高句麗舊彊하사 拓地六千里하시니라.
<해설>
태자 조영이 부고를 전한 사자를 따라 영주 계성에서 무리를 이끌고 와서 제위에 오르셨다(신시개천 4596, 단기 3032, 699).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시고 10만 명의 군병을 모으시어, 그 위용과 명성을 크게 떨쳤다. 이에 정책을 정하고 제도를 세워 당을 적으로 삼고 항거하여 복수할 것을 맹세하셨다. 말갈 장수 걸사비우, 거란 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고 군대를 연합하여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대파하셨다. 여러 장수를 나누어서 군현을 두어 지키게 하시고, 떠돌아다니는 백성을 불러 어루만지고 보호하여 정착하게 하시니 백성의 신망을 크게 얻어 나라의 모든 기강이 새로워졌다. 이에 국호를 대진이라 하시고 연호를 천통이라 하셨다.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시고 6천 리 땅을 개척하셨다.
천통이십일년춘 봉우대안전
天統二十一年春에 崩于大安殿하시니
묘호왈태조 시호왈성무고황제
廟號曰太祖이시오 諡號曰聖武高皇帝시니라
태자무예 입 개원왈인안 서여거란
太子武藝가 立하시니 改元曰仁安이오 西與契丹으로
정계오주목 동십리 임황수
定界烏珠牧하시니 東十里에 臨潢水라
시세 개마 구다 흑수제국 개칭신납공
是歲에 蓋馬.句茶.黑手諸國이 皆稱臣納貢하고
우견대장문휴 살자사위준
又遣大將張文休하사 殺刺史韋俊하시고
취등래 위성읍 당주융기 노견병래 토불리
取登萊하사 爲城邑하시니 唐主隆基가 怒遣兵來나 討不利라.
<해설>
천통 21년(신시개천 4616, 단기 3052,719) 봄에, 대안전에서 붕어하시니, 묘호는 태조요, 시호는 성무고황제이시다. 태자 무예가 즉위(신시개천 4616, 단기 3052, 719)하여 연호를 인안으로 고치셨다. 서쪽으로 거란과 더불어 국경을 오주목으로 정하시니 그곳에서 동쪽 10리에 황수가 흐른다. 이 해(단기 3065, 732)에 개마.구다.흑수 등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라 칭하고 조공을 바쳤다. 또 대장 장문휴를 보내어 당나라 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래(산동성의 등주와 내주)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으셨다. 이에 당나라 임금 이융기가 분노하여 군대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싸움에 이기지 못하였다
명년 수장연충린 여말갈
明年에 守將淵忠麟이 與靺鞨로
대파당노어요서대산지양 당 밀여신라약
大破唐奴於遼西帶山之陽하니 唐이 密與新羅約하야
급습동남제군 지천정군 제조견보기이만
急襲東南諸郡하야 至泉井郡하니 帝詔遣步騎二萬하사
격파지 회 대설 나당군 동사자 심다
擊破之시라 會에 大雪하야 羅唐軍이 凍死者가 甚多라.
어시 추지하서이하 위계 금강릉북이천 시야
於是에 追至河西泥河하야 爲界하니 今江陵北泥川이 是也라
해주암연현 동계신라 암연 금옹진 시야
海州岩淵縣은 東界新羅하니 岩淵은 今翁津이 是也라
자차 신라 세시입공 임진강이북제성 진귀아
自此로 新羅가 歲時入貢하니 臨津江以北諸城이 盡歸我라
우명년 당 여신라 연병내침 경무공이퇴
又明年에 唐이 與新羅로 聯兵來侵이라가 竟無功而退하니라.
<해설>
다음 해(단기 3066, 733)에 수비 장수 연충린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 대산 남쪽에서 당나라 군사를 대파하였다. 이에 당은 신라와 밀약을 맺고 동남방의 여러 군을 급습하여 천정군에 이르렀다. 임금께서 조서를 내리시고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어 이를 격파할 때 , 마침 큰 눈이 내려 신라와 당나라 군사 중에 얼어죽는 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추격하여 하서의 이하에 이르러 경계를 정했는데, 지금의 강릉 북쪽 이천이 그곳이다. 해주 암연현은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를 접하였는데, 암연은 지금의 옹진이다. 이때부터 신라가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임진강 이북 여러 성이 모두 우리 대진에 속하게 되었다. 또 다음 해(단기 3067, 734)에 당과 신라가 연합하여 쳐들어왔으나 마침내 아무 공도 없이 물러갔다.
❖요서遼西 대산帶山: 요서는 지금의 하북성 난하 서쪽 지역을 말한다. 고구려시대뿐만 대진 때까지도 요서는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난하였다. 따라서 요서의 대산은 지금의 하북성 난하 지역에 있었다. 이유립은 하북성 풍윤현 동쪽 80리에 요대산이 있고 여기서 대수帶水가 흘러 나온다고 하였다. 대산.대수.대방帶方은 모두 같은 지역에 있던 지명이다. BCE195년에 인근의 낙랑왕 최숭이 바다를 건너 대동강변의 마한 왕검성으로 이주하자 대방인들도 따라가 지금의 황해도 대방국을 세웠고, 원래의 위치에는 대방군이 설치되었다. 이런 연유로 사대.식민주의 사학은 지금까지도 대방군이 세워진 곳이 황해도라 고집하고 있다.
❖천정군: 지금의 함경남도 덕원군이다.
인안십육년 구다 개마 흑수제국 이기국 내항
仁安十六年에 句茶.蓋馬.黑水諸國이 以其國으로 來降하니
취위성읍 명년 축송막십이성
取爲城邑하시고 明年에 築松漠十二城하시고
우축요서육성 수유오경육십주일군삼십판현
又築遼西六城하사 遂有五京六十州一郡三十八縣하시니
원폭 구천여리 가운성의
圓幅이 九千餘里니 可云盛矣라.
시세 당왜급신라 병견사입공
是歲에 唐倭及新羅가 並遣使入貢하니
천하칭위해동성국 지유발해삼인당일호지어
天下稱爲海東盛國이오 至有渤海三人當一虎之語라.
시 군민화락 논사낙의 오곡풍등
時에 郡民和樂하고 論史樂義하며 五穀豐登하고
사해안연 유대진육덕지가 이미지
四海晏然하야 有大震六德之歌하야 以美之라.
익년삼월 안민현 감로 강
翌年三月에 安民縣에 甘露가 降하니
예관 계청하의 종지
禮官이 啓請賀儀한대 從之하시니라.
시월십육일 제삼신일체상제우서압록지상
是月十六日에 祭三神一體上帝于西鴨綠之上하시니
서압록 고리고국지야
西鴨綠은 稾離古國地也라.
<해설>
인안 16년(단기 3067, 734)에 구다.개마.흑수 등 여러 나라가 나라를 바쳐 항복하므로 취하여 성읍으로 삼으셨다. 이듬해(단기 3068, 735)에 송막에 12성을 쌓고 또 요서에 6성을 쌓으시어 드디어 5경 60주 1군 38현을 두셨다. 강역이 9천여 리나 되었으니 가히 강성하였다고 할 만하다. 이 해에 당과 왜, 신라가 모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가 모두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심지어 ‘발해 사람 셋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이때 임금과 백성이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고 의로움을 즐겼다. 오곡이 풍등하고 온 세상이 평안하여 대진육덕의 노래를 지어 당시의 모습을 찬미하였다. 이듬해(단기 3069, 736) 3월, 안민현에 감로(단 이슬)가 내렸다. 예관이 경축하는 예식을 거행할 것을 청원하므로 그 말을 따르셨다. 이 달 16일에, 서압록하 상류에서 삼신일체 상제님께 천제(대영절 3월16일)를 올리셨다. 서압록(지금의 서요하-해모수와 고두막한의 고향)은 옛 고리국(고구려)의 땅이다.
십구년 제붕 묘호왈광종 시호왈무황제
十九年에 帝崩하시니 廟號曰光宗이시오 諡號曰武皇帝시니라.
태자흠무 입 개원왈대흥 자동경용원부
太子欽武가 立하시니 開元曰大興이오 自東京龍原府로
이도우상경용천부 명년 입태학
移都于上京龍泉府하시고 明年에 立太學하사
교이천경신고 강이환단고사 우명문사
敎以天經神誥하시며 講以桓檀古史하시고 又命文士하사
수국사일백이십오권 문치 흥예악
修國史一百二十五卷하시니 文治는 興禮樂하고
무위 복제이 태백현묘지도 흡어백성
武威는 服諸夷하야 太白玄妙之道가 洽於百姓하고
홍익인간지화 뇌급만방
弘益人間之化가 賴及萬方이러라.
<해설>
인안 19년(신시개천 4634, 단기 3070, 737)에 임금께서 붕어하셨다. 묘호는 광종이고 시호는 무황제이시다. 태자 흠무가 즉위(신시개천 4634, 단기 3067, 737)하였다. 연호를 대흥이라 고치고 도읍을 동경용원부(돈하)에서 상경용천부로 옮기셨다. 이듬해(738)에 태학을 세워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고, 환단의 옛 역사를 강론하시고, 또 학자들에게 『국사』 125권을 편찬하도록 명하셨다. 문치는 예악을 일으키고 무위는 여러 주변 족속을 복종시켰다. 이에 동방 대광명의 현묘한 도가 백성들에게 흠뻑 젖어들고 홍익인간의 교화가 만방에 미쳤다.
대흥사십오년 치청절도사이정기
大興四十五年에 淄靑節度使李正己가
거병 거당군 제견장조전
擧兵하야 拒唐軍하니 帝遣將助戰하시니라.
이정기 고구려인야 생어평로
李正己는 高句麗人也니 生於平盧라
이십이년 사중 축군수이희일 입정기
二十二年에 師衆이 逐軍帥李希逸하고 立正己러니
졸 자납 통부중 오십육년 납 졸
卒에 子納이 統父衆하고 五十六年에 納이 卒하니
자사고 대기위 급졸 기가인 불발상
子師古가 代其位하고 及卒에 其家人이 不發喪하고
잠사영사도어밀이봉지
潜使迎師道於密而奉之라.
<해설>
대흥 45년(단기 3114, 781)에, 치청 절도사 이정기가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대에게 항거하니,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셨다. 이정기는 고구려인으로 평로에서 태어났다. 대흥 22년(단기 3091, 758)에 병사들이 군의 통수자 이희일을 쫒아내고 정기를 세웠다. 이정기가 쭉자 (단기 3114, 781) 아들 납이 아버지를 따르던 무리를 거느렸다. 대흥 56년(단기 3125, 792)에 납이 쭉자 아들 사고가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단기 3125, 792). 사고가 죽자(단기 3139, 806) 그 집 사람들이 발상을 하지 않고 몰래 사람을 보내 밀(산동성재성시 밀주)재 땅에서(이복동생) 사도를 맞아들여 받들었다(단기 3139, 806)
대흥오십칠년 제붕
大興五十七年에 帝崩하시니
묘호왈세종 시호왈광성문황제
廟號曰世宗이시오 諡號曰光聖文皇帝시니라
국인 입기족제원의 성포악 불능리국
國人이 立其族弟元義러니 性暴惡하야 不能理國이라
갑술 국인 폐지 영입선제지손화흥
甲戌에 國人이 廢之하고 迎立先帝之孫華興하니
개원왈중흥 명년 붕 묘호왈인종
開元曰中興이오 明年에 崩하시니 廟號曰仁宗이시오
시호왈성황제
諡號曰成皇帝시니라.
황숙승린 입 시위목종강황제
皇叔崇璘이 立하시니 是爲穆宗康皇帝시니라.
역의종정황제원유 강종희황제언의
歷毅宗定皇帝元瑜와 康宗僖皇帝言義와
철종간황제명충 지성종선황제인수
哲宗簡皇帝明忠하야 至聖宗宣皇帝仁秀하니
천자영명 덕기여신 재겸문무
天資英明하시고 德氣如神하시며 才兼文武하사
내유태조지풍
乃有太祖之風이시라.
<해설>
대흥 57년(단기 3126, 793)에 임금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는 세종이요 시호는 광성문황제이시다. 나라 사람들이 그 친족 아우 원의를 옹립하였으나, 원의는 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갑술(단기 3127, 794)년에 나라 사람들이 원의를 폐하고 선제의 손자 화홍을 맞이하여 옹립하였다. 연호를 고쳐 중흥이라 하였다. 이듬해(단기 3128, 795)에 붕어하시니 묘호는 인종이요, 시호는 성황제이시다. 임금의 숙부인 숭린이 즉위하니, 이 분이 목종 강황제이시다. 의종 정황제 원유(8세), 강종 희황제 언의(9세), 철종 간황제 명충(10세)을 지나 성종 선황제 인수에 이르렀다. 이분은 타고난 성품이 영명하시고, 덕성과 기질이 신령스럽고, 재주는 문무를 겸비하시어 태조의 풍무가 있었다.
남정신라 치이물 철원 사불 암연등칠주
南定新羅하사 置泥勿.鐵圓.沙弗.岩淵等七州하시고
북략염해 나산 갈사 조나 석혁 급남북우루
北畧鹽海.羅珊.曷思.藻那.錫赫과 及南北虞婁하사
치제부 장백지동왈안변
置諸部하시니 長白之東曰安邊이오
압강지남왈안원 목단지동왈철리
鴨江之南曰安遠이오 牧丹之東曰鐵利오
흑수지상왈희원 난하지동왈장령
黑水之上曰懷遠이오 灤河之東曰長嶺이오
장령지동왈동평 우루 재북대개마지남북
長嶺之東曰東平이오 虞婁는 在北大蓋馬之南北하니
지광 구천리 경우대개 문치희흡
地廣이 九千里라 境宇大開하야 文治熙洽하니
상자국도 하지주현 개유학
上自國都로 下至州縣히 皆有學하야
구서오계 조석송습 춘추고적 중의천공
九誓五戒를 朝夕誦習하며 春秋考績하야 衆議薦貢하니
인기축력 가진대용
人旣畜力하고 家盡待用이라.
자시 국세부강 내외안열 자무도절간모지단
自是로 國勢富强하고 內外安悅하야 自無盜窃姦謀之端이오
당왜신라 급거란 막불외복
唐倭新羅와 及契丹이 莫不畏服하야
천하만방 계이성인흥치지해동성국 흠송지
天下萬邦이 皆以聖人興治之海東盛國으로 欽頌之라.
경오대 야율 수빈삭가병 종불능복야
更五代하야 耶律이 雖頻数加兵이나 終不能服也라
후 경장종화황제이진 순종안황제건황
後에 經莊宗和皇帝彛震과 順宗安皇帝虔晃과
명종경황제현석 지애제인선 위거란소멸
明宗景皇帝玄錫하고 至哀帝諲譔하야 爲契丹所滅하니
자세조 전십오세 공이백오십구년
自世祖로 傳十五世하야 共二百五十九年이러라」하니라.
<해설>
선황제께서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여 이물, 철원, 사불, 암연 등 일곱 주를 설치하시고 북쪽으로 염해(블라디보스톡), 나산(북부시베리아), 갈사(북갈사 오소리강, 남갈사 훈춘, 여기서는 북갈사), 조나(연해주), 석혁(동부시베리아)과 남·북 우루(흑룡강성)를 공략하여 여러 부를 설치하셨다. 장백(백두산) 동쪽을 안변이라 하고, 압록강 남쪽을 안원이라 하였다. 목단 동쪽을 철리라 하고 흑수(흑룡강) 위를 회원이라 하고, 난하 동쪽을 장령, 장령 동쪽을 동평이라 하였다. 우루는 북대개마 남북에 자리잡고 있었다. 땅 넓이는 9천 리로 영토가 크게 개척되고 문치를 잘 베풀어서, 위로 수도에서 아래로 주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교가 있고 구서오계를 아침저녁으로 외워 익혔다. 봄가을로 관리의 공적을 조사하고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어진 인재를 천거하였다. 사람들은 일찍부터 힘을 차차 쌓아 기르면서 집에서 인재로 쓰이기를 기다렸다. 이로부터 나라가 부강해지고 안팎이 편안하고 기쁨이 넘쳐 도둑질하거나 간사하게 모의하는 폐단이 저절로 사라졌다. 당과 왜, 신라, 거란이 모두 두려워하여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 만방에서 모두 성인이 다스리는 해동성국이라 칭송하였다. 5대(당나라가 망한 후 일어났지만 단명으로 끝난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 등 다섯나라의 흥망 시기(단기 3240, 907 ~ 단기 3293, 960)에 야율이 비록 여러번 싸움을 걸어 왔으나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 뒤에 장종 화황제 이진(12세), 순종 안황제 건황(13세), 명종 경황제 현석(14세)을 지나 애제 인선(15세)에 이르러 거란에게 멸망당하였다.(신시개천 4823, 단기 3259, 926). 세조로부터 15세를 전하여 259년을 누렸다.
목종 개원왈정력 의종 개원왈영덕
穆宗이 改元曰正曆이오 毅宗은 改元曰永德이오
강종 개원왈주작 철종 개원왈태시
康宗이 改元曰朱雀이오 哲宗이 改元曰太始오
성종 개원왈건흥 장종 개원왈함화
聖宗이 改元曰建興이오 莊宗이 改元曰咸和오
순종 개원왈대정 명종 개원왈천복
順宗이 改元曰大定이오 明宗이 改元曰天福이오
애제 개원왈청태
哀帝가 改元曰淸泰라.
대진국남경남해부 본남옥저고국
大震國南京南海府는 本南沃沮古國이니
금해성현 시야
今海城縣이 是也오
서경압록부 본고리고국 금임황 금서요하
西京鴨綠府는 本稾離古國이니 今臨潢이오 今西遼河가
즉고지서압록하야 고 구지 안민현 재동
卽古之西鴨綠河也라. 故로 舊志에 安民縣은 在東하고
이기서 임황현 임황 후 위요상경임황부야
而其西는 臨潢縣이니 臨潢은 後에 爲遼上京臨潢府也오
내고지서안평 시야
乃古之西安平이 是也라.
<해설>
목종은 연호를 고쳐 정력이라 하고, 의종은 연호를 영덕, 강종은 주작, 철종은 태시, 성종은 건흥, 장종은 함화, 순종은 대정, 명종은 천복, 애제는 청태라 하였다. 대진국의 남경남해부(남옥저 해성시)는 본래 옛 남옥저 땅인데, 지금의 해성현이다. 서경압록부는 본래 옛 고리국 땅이고, 지금의 임황이다. 지금의 서요하는 곧 옛날의 서압록하이다. 그러므로 옛 기록에서 말한 안민현은 동쪽에 있고 그 서쪽은 임황현인데, 임황은 뒤에 요나라 상경임황부가 되었다. 바로 옛날의 서안평이다.
정주 의려국소도
正州는 依慮國所都니
위선비모용외소패 우박욕자재
爲鮮卑慕容廆所敗하야 憂迫欲自裁라가
홀염아혼상미민 즉하왕불성호
忽念我魂尙未泯하니 則何往不成乎아.
밀촉우자부라 유백랑산 야도해구
密囑于子扶羅하고 踰白狼山하야 夜渡海口하니
종자 수천 수도 정왜인위왕
從者가 數千이라 遂渡하야 定倭人爲王하니
자이위응삼신부명 사군신헌하의
自以爲應三神符命이라 하고 使群臣獻賀儀하니라.
혹운 의려왕 위선비소패 도입해이불환
或云 依慮王이 爲鮮卑所敗하야 逃入海而不還하니
자제 주보북옥저 명년 자의라 입
子弟가 走保北沃沮라가 明年에 子依羅가 立하니라.
자후 모용외 우부침략국인
自後로 慕容廆가 又復侵掠國人하니
의라 솔중수천 월해 수정왜인위왕
依羅가 率衆數千하고 越海하야 遂定倭人爲王이라 하니라.
<해설>
정주는 의려국(서부여)이 도읍한 땅이다. 의려국 왕이 선비 모용괴에게 패한 뒤 핍박당할 것을 근심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이때 문득, ‘나의 영혼이 아직 죽지 않았는데 어디에 간들 이루지 못하리오?’라는 생각이 들어 은밀히 아들 부라에게 왕위를 넘기고, 백랑산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너니 따르는 자가 수천 명이었다.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스스로 삼신의 부명에 응한 것이라 하고, 여러 신하로 하여금 하례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의려왕은 선비족에게 패하자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들이 북옥저로 달아나 몸을 보전하다가 이듬해에 아들 의라가 즉위하였다. 이 뒤 모용외가 또다시 침략하여 아국 사람들을 약탈하였다. 의라가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오진應神 왕에 대한 두가지 설:①백제 출신설 ②서부여(의려국)의 의려 혹은 의라 설.
❖정주正州: 대진국 오경五京의 하나인 서경압록부에 속한 압록 사주四洲중의 하나. 정주는 일명 비류군(서부여)이라 하는데, 백랑산(요령성 대릉하 상류) 서쪽에 있다.
❖백랑산: 대릉하 상류 부근인 요령성 객좌현에 있는 백록산이다.
❖해구: 대릉하 하구를 말한다.
❖북옥저: 고대에 네 곡의 옥저가 있었다. 동옥저는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 남옥저는 요동반도에 있었다. 북옥저는 서간도 지역 즉 장춘 주위에 있었고, 서옥저는 만리장성 부근(요령성 백록산에서 연산 부근까지)으로 바로 망명 부여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일본 구유이국 역왈이세 여왜동린
日本에 舊有伊國하니 亦曰伊勢라 與倭同隣이오
이도국 재축자 역즉일향국야
伊都國은 在筑紫하니 亦卽日向國也라.
자시이동 속어왜 기남동 속어안라
自是以東은 屬於倭하고 其南東은 屬於安羅하니
안라 본홀본인야
安羅는 本忽本人也라.
북유아소산 안라 후 입임나 여고구려
北有阿蘇山하고 安羅는 後에 入任那하니 與高句麗로
조이정친 말로국지남왈대우국 유시라군
早已定親이오 末盧國之南曰大隅國이니 有始羅郡이오
본남옥저인소취
本南沃沮人所聚라.
<해설>
일본에는 옛적에 이국이 있었는데, 이세라고도 불렀고,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츠쿠시에 있었는데, 바로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응신조 왜를 말함)에 속하고, 그 남동쪽은 안라에 속하였다. 안라는 본래 홀본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들어가서 일찍이 고구려와 친교를 맺었다. 말로국의 남쪽을 대우국이라 했는데 거기에 시라군이 있었다. 본래 남옥저 사람이 모여 살던 곳이다.
❖이국伊國: 지금의 일본 나라현 동쪽 미에현 지방에 있던 나라.
❖츠쿠시筑紫: 지금의 서북 큐슈의 후쿠오카
❖왜倭: 여기서는 3세기 말엽에 망명 부여의 왕 의라가 일본을 정복하여 세운, 일본 최초의 통일 왕조인 야마토 왜를 말한다. 지금의 북큐슈 일부와 관동.동북 지방을 제외한 혼슈의 서반부를 차지하였다.
❖홀본: 곧 졸본이다. 광개토열제비문에 홀본으로 씌여 있다.
❖말로국: 지금의 큐슈 나가사키현 마츠우라이다.
도남만 침미 환하 비자발지속 개공언
屠南蠻.沈彌.晥夏.比自㶱之屬이 皆貢焉하니
남만 구려유종 자산월래자야
南蠻은 九黎遺種이니 自山越來者也오
비자발 변진비사벌인지취락야
比自㶱은 弁辰比斯伐人之聚落也오
환하 고구려속노야
晥夏는 高句麗屬奴也라.
시 왜인 분거산도 각유백유여국
時에 倭人이 分據山島하야 各有百有餘國이라
기중 구야한국 최대 본구야본국인소치야
其中에 拘邪韓國이 最大하니 本拘邪本國人所治也라
해상선박 개회어종도이교역
海商船泊이 皆會於種島而交易하니
오위만월지속 개통언
吳魏蠻越之屬이 皆通焉이라.
시도일해천여리 지대마국 방가사백여리
始渡一海千餘里하면 至對馬國하니 方可四百餘里오
우도일해천여리 지일기국
又渡一海千餘里하면 至一歧國하니
방가삼백리 본사이기국야 자다제도 개공언
方可三百里니 本斯爾歧國也오 子多諸島가 皆貢焉이라
우도일해천여리 지말로국 본읍무인소취야
又渡一海千餘里하면 至末盧國하니 本揖婁人所聚也라.
동남육향오백리 지이도국 내반여언고읍야
東南陸行五百里하면 至伊都國하니 乃盤余彦古邑也라.
<해설>
남만, 침마, 환하, 비자발(창녕) 족속들이 모두 조공을 바쳤다. 남만은 구려의 후예로 산월에서 온 자들이고, 비자발은 변진·비사벌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읍락이고, 환하는 고구려에 예속된 자들이다. 이때 왜인은 산과 섬에 흩어져 살았는데 나라가 100여개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이 가장 컸는데, 본래 구야(금관가야)의 본국 사람이 다스리던 곳이다. 바다에서 장사하는 배는 모두 종도(다네시마)에 모여 교역하였는데, 오, 위, 만, 월의 모두들이 모두 통상하였다. 처음(김해)에 바다 건너 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에 이르는데, 사방이 4백여 리쯤 된다. 또 바다 건너 천여 리를 가면 일기국에 닿는데, 사방이 3백 리쯤 되고 본래 사이기국이다. 자다의 여러 섬이 모두 조공을 바쳤다. 또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더 가면 말로국에 이르는데, 본래 읍루인이 모여 살던 곳이다. 동남쪽으로 육지로 5백 리를 가면 이도국에 이르는데, 곧 반여언(신무천왕)의 옛 고을이다.
❖남만.침마.환하.비자발: 남만은 지금의 도성都城, 침미는 내천內川, 환하는 큐슈 중부, 비자발은 창녕으로 추정한다.
❖종도種島: 큐슈 가고시마현 오오스미제도에 있는 섬으로 지금의 타네가시마를 말한다.
❖대마국: 지금의 대마도
❖일기국: 지금의 일기도이다. 광개토열제가 세운 임나국 연방의 하나이다.
❖읍루: 고구려의 속지. 지금의 연해주 지역.
❖이도국: 지금의 큐슈 후쿠오카현의 계도군이다.(이유립 총서)
❖반여언: 일본 왕가의 뿌리인 1세 진무神武왕의 이름.
신당서 발해 본속말말갈 부고려자 성 대씨
新唐書에 「渤海는 本粟末靺鞨의 附高麗者니 姓은 大氏오
걸걸중상자 여말갈추장걸사비우
乞乞仲象者가 餘靺鞨酋長乞四比羽와
급고려여중 동주도요수 보태백산동북
及高麗餘衆으로 東走渡遼水하야 保太白山東北하고
조우루하 중상 사 자조영 인잔이 둔거
阻奧婁河러니 仲象이 死하고 子祚榮이 引殘人하야 遁去라가
즉병비우지중 시황원 내건국 자호진국왕
即并比羽之衆하고 恃荒遠하야 乃建國하니 自號震國王이오
진득부여 옥저 변한 해북제국
盡得夫餘.沃沮.弁韓.海北諸國이라」하니라.
사씨왈걸걸중상 이패망지여 주험자보
史氏曰乞乞仲象이 以敗亾之餘로 走險自保하시니
동태왕지거빈 고왕조영 이창업지자
同太王之去邠이오 高王祚榮이 以創業之資로
전극개기 유구천지흥월
剪棘開基하시니 類句賤之興越이라
개폭원 기건 내이문덕수지 개제도
蓋幅원이 旣建에 乃而文德修之하사 改制度하시며
건관작 열군현 항수대국
建官爵사시며 列郡縣하시고 抗手大國하사
방역 지오천리 국조 지삼백년
方域이 至五千里오 國祚가 至三百年하니
당시사방 태무유지자 역운성의
當時四方이 殆無逾之者니 亦云盛矣로다.
<해설>
『신당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붙어 있던 나라인데, 건국자의 성은 대씨이다. 걸걸중상이란 인물이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북을 확보하고 오루하를 의지하였다. 중상이 쭉자 아들 조영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도망하다가 곧 비우의 무리를 합하고 땅이 거칠고 멀리 떨어진 것을 믿고 건국하여 스스로 진국왕이라 하였다. 부여, 옥저, 변한, 해북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다. 사씨는 말한다. 걸걸중상이 패망한 후 남은 무리를 모아 험한 곳으로 피신하여 스스로 보전한 것은 옛날에 태왕이 빈을 떠난 것과 같다. 고왕 조영이 창업의 자질이 있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라의 기틀을 닦으신 것은, 구천이 월나라를 일으킨 것과 같다. 영토가 확보되자 문덕으로써 이를 닦고 제도를 고치고 관작을 정비하시고, 군현을 두어 큰 나라에 대항하셨다. 나라의 영역이 5천 리에 이르고 역사에 300년에 이르러 당시에 사방에 대진국을 능가할 나라가 없었으니 역시 강성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오루하: 지금의 목당강이다
❖부여는 송하강 유역이고 옥저는 4옥저가 있다. 변한은 단군조선의 삼한관경중 하나인 번한을 말하는데, 곧 지금의 요하 서쪽과 하북성 일대이다. 해북 제국은 대진 북쪽의 여라 나라를 말한다.
❖태왕: 주나라 문왕의 조부인 고공단보를 말한다.
고려현종원문대왕이십년
高麗顯宗元文大王二十年에
거란동경장군대연림 태조고황제칠세손야
契丹東京將軍大延琳은 太祖高皇帝七世孫也라.
수유수부마소효원 남양공주
囚留守駙馬蕭孝元과 南陽公主하고
살호부사한소훈등 즉위 왈흥료 개원천경
殺戶部使韓紹勳等하야 即位하니 曰興遼오 改元天慶이라
견고길덕 내고건국 겸구원
遣高吉德하야 來告建國하고 兼求援하니라.
<해설>
고려 현종 원문대왕 20년(단기 3362, 1029)에, 거란의 동경장군 대연림은 태조 고황제(대조영)의 7세 손으로 부마인 유수 소요원과 남양 공주를 가두고 호부사 한소훈등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국호를 흥료라 하고, 연호를 천경이라 하였다. 고길덕을 고려에 파견하여 나라 세운 일을 알리고 아울러 도움을 청하였다.
❖대연림: 대조영의 7세 후손. 요나라에서 벼슬하여 동경 사리군 상온이 되었다. 1029년(요나라 성종9)에 동경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켜 흥료국을 세우고 연호를 천경이라 하였다. 고려와도 긴밀히 연락을 취하며 요나라에 항거하였으나, 이듬해에 요군에게 망하였다.
요동유수소보선 위정혹학
遼東留守蕭保先이 爲政酷虐이러니
고려예종문효대왕십일년정월삭
高麗睿宗文孝大王十一年正月朔에
동경비장발해인고영창 여수십인 승주시용
東京裨將渤海人高永昌이 與数十人으로 乘酒恃勇하고
지도유장원 입부위등청 문유수소재
持刀踰墻垣하야 入府衛登廳하야 問留守所在하고
태운 외병 변 청위비
紿云호대 外兵이 變일새 請爲備라 하니라.
보선 출 중살지
保先이 出에 衆殺之라
가유수대공정 부유수고청신 전불능승
假留守大公鼎과 副留守高淸臣이 戰不能勝하야
탈서문출 분요 영창 자칭대발해국황제
奪西門出하야 奔遼하고 永昌은 自稱大渤海國皇帝하야
개원융기 거요동오십여주
改元隆基하고 據遼東五十餘州하니라.
<해설>
요동유수 소보선이 정치를 가혹하게 하자, 고려 예종 문효대왕11년(단기 3449, 1116)정월 초하루에 동경 비장 발해 사람 고영창이 수십명과 함께 술김에 용맹을 믿고 칼을 들고 담을 뛰어넘어 부위에 들어갔다. 대청에 올라가 유수에 있는 곳을 묻고 거짓으로 “외부의 군대가 쳐들어오니 대비를 한다”라고 하였다. 보선이 나오자 무리가 그를 죽였다. 가유수 대공정과 부유수 고청신이 맞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서쪽문으로 나가 요나라로 달아났다. 영창이 스스로 대발해국 황제라 하고, 연호를 융기라 하고, 요동 50여 주를 차지했다.
❖유수: 임금을 대신하여 머물러 지킨다는 뜻으로, 수도 이외의 요긴한 곳을 맡아 다스리던 특수 외관직을 말한다.
❖동경: 요나라의 동경요양부를 말함. 지금의 요령성 요양.
❖대공정: 요나라 때 발해 사람.
송사 왈 정안국 본마한지종 위요소패
宋史에 曰 「定安國은 本馬韓之種으로 爲遼所敗러니
기추수 규합여중 보기서비
其酋帥가 糾合餘衆하야 保其西鄙하고
건국개원 자호정안국
建國改元하야 自號定安國이라」하니라.
개보삼년 기왕열만화
開寶三年에 其王烈萬華가
인입공여진 부표공헌
因入貢女眞하야 附表貢獻하고
태종시 기왕오현명 부인여진 상표
太宗時에 其王烏玄明이 復因女眞하야 上表하니
기략 왈
其畧에 曰
신 본이고려구양 발해유려 보차방우
臣은 本以高麗舊壤의 渤海遺黎로 保此方隅하니이다하니
태종 답칙 략왈
太宗이 答勅이 畧曰
경 엄유마한지지 개우경파지표운운
卿이 奄有馬韓之地하야 介于鯨波之表云云하고
단공순화간 부인여진봉표 기후부지
端拱淳化間에 復因女眞奉表러니 其後不至라.
<해설>
『송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후예로서, 요에게 패하자 그 우두머리가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서쪽 변두리 땅을 확보하였다.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청해 스스로 나라 이름을 정안국이라 하였다. 개보(북송 태조의 연호) 3년(단기 3303, 970)에 그 왕 열만화가 조공을 바치러 온 여진을 통해 글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태종(북송 2세 임금) 때 왕 오현명이 다시 여진을 통해 글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신은 본래 고구려의 옛 땅에 사는 발해의 유민으로서 이곳 한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태종은 답서에서 대략 “경이 마한 땅을 차지하고 큰 파도에 끼어 있다는 글을 올리니...” 운운했다. 단공(태종의 연호, 단기 3321, 988~단기 3322,989)와 순화(태종의 연호, 단기 3323, 990~단기 3327,989)사이에 다시 여진을 통해 글을 올리더니, 그 뒤에는 올리지 아니하였다.
❖『송사』: 송나라의 정사. 1343년 원나라 승상 탈탈 등이 『요사』,『금사』와 함께 편찬한 496권으로 된 역사책이다. 여기에 「고려전」이 들어 있어 고려사 연구에 참고가 된다.
❖마한: 고조선 시대 동압록(현재의 압록강) 이남의 땅은 마한이었고 그 도읍지가 현재의 평양이다. 고구려는 대동강 지역을 차지하여 마한 유민을 병합하였다. 따라서 열국 시대에 마한은 두 개가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에 병합된 한반도 북부의 마한과 백제에 병합된 한수 이남의 마한이 그것이다.
❖열만화: 대진의 권신. 대진이 거란에게 망한 후에 정안국을 세우고 왕이 되었다.
대진국애제청태이십육년춘정월
大震國哀帝淸泰二十六年春正月에
야율배 여제요골 위전봉
耶律倍가 與弟堯骨로 爲前鋒하야
야위홀한성 애제출항 국망
夜圍忽汗城한대 哀帝出降하시니 國亡하니라.
<해설>
대진국(15세) 애제 청태 26년(단기 3259, 926)봄 정월에, 야율배가 아우 야율요골과 함께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을 포위하였다. 애제가 나가 항복하시니 나라가 망하였다.
❖야율배: 요나라(916~1125)의 시조 야율아보기의 장자.
이월병오 요태조 건동단국
二月丙午에 遼太祖가 建東丹國하고
이장자 위인황왕 왕지 건원감로
以長子倍로 爲人皇王하야 王之하니 建元甘露하고
개홀한성 위천복 준용천자관복
改忽汗城하야 爲天福하고 準用天子冠服하야
피십이류면 개화용상 잉용대진국구제
被十二旈冕하니 皆畵龍象이라 仍用大震國舊制하야
이숙질랄 위좌대상
以叔迭剌로 爲左大相하고
대진노상실명 위우대상 대진사도대소현
大震老相失名으로 爲右大相하고 大震司徒大素賢으로
위좌차상 야율우지 위우차상
爲左次相하고 耶律羽之로 爲右次相하고
사국내수사이하 약세공 포십만단 마천필
赦國內殊死以下하고 約歲貢은 布十萬端과 馬千匹하니라.
감로이십칠년동십이월경진
甘露二十七年冬十二月庚辰에
요파동경중대성 동단국 제
遼罷東京中臺省하니 東丹國이 除라.
<해설>
2월 병오에 요 태조가 동단국을 세우고, 맏아들 인황왕으로 봉하여 왕노릇하게 하였다. 연호를 감로라 하였다. 홀한성을 고쳐 천복이라 하고, 천자의 관과 옷을 표준으로 삼아서 열두 줄 면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다. 대진국의 옛 제도를 이어받아 숙수 질랄을 좌대상으로 삼고, 대진의 늙은 재상(이름은 알 수 없음)을 우대상으로 삼고, 대진 사도 대소현을 좌차상, 야율우지를 우차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형수를 제외한 나라 안의 모든 죄인을 사면하고 , 해마다 포 10만 단과 말 천 필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약조하였다. 감로 27년(단기 3285, 952) 겨울 13월 경진에, 요나라가 동경 중대성을 폐지하자 동단국이 없어졌다.
❖요태조: 거란의 시조인 야율아보기를 말한다.
❖동단국: 요나라 태조가 대진을 멸망시키고 그 이름을 고쳐 동단국이라 했다. 동단국은 곧 동거란이란 뜻이다.
자료출처
환단고기 원전강독 태백일사 안병우교수대진국 본기 윤창열교수님
https://www.youtube.com/watch?v=gp9LP2p8luM
https://www.youtube.com/watch?v=vz-tuWwwBWg
https://www.youtube.com/watch?v=zvwFsstRQZo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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