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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Aug 29. 2023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제6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잘못된 부분을 함께 알아봅니다.

서론

본 자료는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안병우교수님 강의를 기반으로 하였으며,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의 내용에 안병우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설명을 추가하여 이해가 쉽도록 작성하였습니다.


찬란한 우리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일본과 지나(중국仲國)이 자신들의 열등감을 감추고자 우리 역사를 왜곡하여 본래의 우리 역사를 올바로 배울 기회가 없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그러나 여러 뜻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환단고기와 역사의 진실을 연구하시는 학자들에 의하여 많은 부분의 역사가 제대로 밝혀 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어느 특정민족의 역사라기 보다 호모사피엔스로 분류되는 현생 인류에 대한 역사이며, 인류가 나야할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생 인류의 본류의 역사인것입니다. 아울러 그역사속에 포함된 정신문화 사상 신교神敎는 유불선儒佛仙의 정신 집대성하였으며, 인류가 올바로 살아가는 참세상을 맑히고 있습니다.

다물흥방가 多勿興邦歌

먼저 가신 선령님은 우리 삶의 법이시고 뒤에 오는 후손들은 조상님을 잘 받드네 선령님을 본받음은 그 정신이 불생불멸 후손들 선령 위함 귀천이 어디 있나 사람은 천지중심 대천지와 하나이니 마음은 몸과 함께 온 우주의 근본일세 사람이 태일됨에 차고비나 같은 경계 우주의 근본이라 신과 만물 둘 아니네 참될 진은 온갖 선의 극치에 이름일세 삼신님은 일심중도 만사만물 주장하네 참과 선의 극치에서 세가지참 귀일하고 삼신님이 일심에서 삼신일체 창조할세 하늘아래 온땅에서 오직내가 있음이여 옛땅옛혼 다물하니 나라를 부흥하네 후략~

이것은 지금우리가 가야할 길을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수련하고 익혀서 우리가 하나되어 우리나라를 부흥하고 잘못되어가는 세상을 바로잡아 홍익인간 세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래봅니다.


*잘못된 부분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검토하여 수정하겠습니다.^^



1.고구려 국통國統의 뿌리-북부여 해모수

고구려지선 출자해모수

高句麗之先이 出自解慕漱하시니

해모수지모향 역기지야

解慕漱之母鄕이 亦其地也라

조대기 왈 해모수 종천이강

朝代記에 曰「解慕漱는 從天而降하사

상거우웅심산 기병어부여고도

嘗居于熊心山이라가 起兵於夫餘古都하시고

위중소추 수입국칭왕 시위부여시조야

爲衆所推하야 遂立國稱王하시니 是謂夫餘始祖也시니라.

착오우관 패용광검 승오룡거

着烏羽冠하시고 佩龍光劒하시고 乘五龍車하시니

종자백여인 조즉청사 모즉등천

從者百餘人이오 朝則廳事하시고 暮則登天하시니

무소령이관경자화 산무도적

無所令而管境自化하고 山無盜賊하고

화곡만야 국무사이민역무사

禾穀滿野하니 國無事而民亦無事라

단군해모수지초강 재어임술사월초팔일

檀君解慕漱之初降이 在於壬戌四月初八日하니

내진왕정팔년야

乃秦王政八年也라.」

<해설>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왔는데, 해모수의 고향이 또한 그 땅(고구려, 구리, 고구리, 구려:지명)이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해모수께서 하늘에서 내려(단군의 혈통을 이었다)와 일찍이 웅심산(검마산)에서 사셨다. 부여의 옛 도읍(백악산 아사달)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의 추대를 받아 드디어 나라를 세워 왕이 되셨다. 이분이 부여의 시조이시다. 머리에 오우관을 쓰고, 허리에 용광검을 차고, 오룡거를 타고 다니시니, 따르는 자가 백여 명이었다. 아침이 되면 정사를 돌보고 저물면 등천하셨다. 특별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나라 안이 저절로 잘 다스려지고 산에는 도덕이 없고 들에는 벼와 곡식이 가득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없고 백성도 태평세월을 누렸다. 해모수단군께서 처음 내려온 것은 임술(신시개천 3659, 단기 2095, 고열가 단군 57, BCE 239)년 4월 8일로 진秦나라 왕 영정 8년이다.


해모수단군은 대부여를 이어 백악산에서 북부여를 건국한 임금이다. 기존 문헌에는 한결같이 해모수단군이 하백의 딸 유화와 혼인하여 고주몽을 낳았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해모수 단군이 붕어한 해는 BCE 195년이고 주몽 성제의 출생은 BCE 79년이므로 무려 116년이라는 차이가 있다. 『환단고기』「북부여기」에서는 주몽이 불리지의 아들이고, 불리지는 해모수 단군의 아들인 고진의 손자라고 상세하게 전한다. 주몽은 해모수단군의 현손이다.


❖부여의 유래: 초대단군의 4남 "부여"왕자 -> 단군조선후기에 국명을 "대부여"라 칭함 -> 대부여의 북쪽에서 일어나 "북부여"아칭함 -> "동부여" 기존의 단군이 동부여 후로 옴겨감 -> 서부여 번조선영역 부여(일본으로 건너가 야마토정권의 왕이됨) -> 백제성왕때 세력이 약해져서 부흥하고자 "남부여"라 국호를 변경함

❖웅심산 : 지금의 길림성 서란.


2.북부여의 국통을 계승한 고주몽高朱蒙(고추모高鄒牟)

해모수의 현손玄孫

고리군왕고진 해모수지이자야 옥저후불리지

稾離郡王高辰은 解慕漱之二子也오 沃沮侯弗離支는

고진지손야 개이토적만공 득봉야

高辰之孫也니 皆以討賊滿功으로 得封也라.

불리지 상과서압록 우하백녀유화

弗離支가 嘗過西鴨綠이라가 遇河伯女柳花하야

열이취지 생고주몽 시즉임인오월오일야

悅而娶之하고 生高朱蒙하니 時則壬寅五月五日也오

내한주불릉원봉이년야 불리지 훙

乃漢主弗陵元鳳二年也라. 弗離支가 薨하고

유화솔자주몽 귀우웅심산 금서란야

柳花率子朱蒙하야 歸于熊心山하니 今舒蘭也라

기장 주유사방 택가섭원이거지

旣長에 周遊四方하실새 擇迦葉原而居之러시니

선어관가 위목마 미기 위관가소기

選於官家하사 爲牧馬시라 未幾에 爲官家所忌하사

여오이마리협보 도지졸본 적 부여왕 무사

與烏伊摩離陜父로 逃至卒本하시니 適에 夫餘王이 無嗣라

주몽 수이왕서 입승대통

朱蒙이 遂以王婿로 入承大統하시니

시위고구려시조야

是謂高句麗始祖也시니라.

<해설>

고리군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으로 봉토를 받았다. 불리지가 일찍이 서압록을 지나다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기뻐하며 장가들어 고주몽을 낳았다. 때는 임인(단기 2255, BCE 79)년 5월 5일이요, 한나라 왕 불릉 원봉 2년이었다. 불리지가 세상을 뜨자, 유화부인이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가니 지금의 서란이다. 주몽이 장성하여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가섭원(동부여)을 택해 살면서 관가에서 말 기르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관가의 미움을 사게 되어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렀다. 마침 부여왕(북부여 6세 고무서 단군)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주몽이 마침내 왕의 사위가 되어 대통을 이으시니(단기 2276, BCE 58), 이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이시다.


❖북부여연대:  해모수 -> 모수리 고해서->고우루 한나라 침공 -> 고무막한(호는 동명) 의병으로 한나라 물리침 졸본부여(북부여의 후 졸본부여, 동명부여)  건국(해부루 쫏겨나 동부여 후로 물러남)

고주몽의 계보
고주몽과 비류, 온조, 박혁거세 계보

❖북부여관련 자세한 사항은 아래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brunch.co.kr/@f1b68c46d962477/21

비문1면
비문2면
비문3면
비문4면


3.고주몽 성제聖帝의 통치 영역과 도언道言

고구려의 천도遷都 과정

평락이십일년갑오시월 벌북옥저 멸지

平樂二十一年甲午十月에 伐北沃沮하사 滅之하시고

명년을미 자졸본 이도눌견

明年乙未에 自卒本으로 移都訥見하시니

눌견 금상춘주가성자야

訥見은 今常春朱家城子也라

유리명제이십일년 우자눌견 이도우국내성

琉璃明帝二十一年에 又自訥見으로 移都于國內城하시니

역왈황성 내유환도산 산상축성 유사즉거지

亦曰皇城이오 內有丸都山하야 山上築城하니 有事則居之시라.

대무신열제이십년 제습낙랑국 멸지

大武神烈帝二十年에 帝襲樂浪國하사 滅之하시니

동압록이남 속아 독해성이남근해제성 미하

東鴨綠以南이 屬我하고 獨海城以南近海諸城이 未下라

산상제원년 견제계수 공파공손탁

山上帝元年에 遣弟罽須하사 攻破公孫度하시고

벌현도 낙랑 멸지

伐玄도樂浪하사 滅之하시니

요동 실평

遼東이 悉平하니라.

<해설>

(고주몽 성제)평락 11년 갑오(단기 2307, BCE 27)년 10월,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이듬해 을미년에 졸본에서 눌견(늘봄常春)으로 도읍을 옮기셨다. 눌견은 지금의 상춘(지금의 장춘) 주가성자이다. (2세)유리명제 21년(단기 2335, CE 2), 도읍을 다시 눌견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이곳을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 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위에 산성을 쌓고 유사시에는 거기에 머무르셨다. (3세) 대무신 열제 20년(단기 2370, CE37), 열제께서 낙랑국을 기습하여 멸하셨다. 이리하여 동압록(지금의 압록강) 이남이 우리(고구려)에게 속하였으나, 다만 해성 이남의 바다 가까이 있는 여러 성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했다. (10세)산상제 원년(단기 2530, 197), 아우 계수를 보내어 공손탁을 쳐부수고, 현도와 낙랑을 쳐서 멸함으로써 요동이 모두 평정되었다.


❖낙랑국은 부호 최숭이 낙랑군에서 재물을 가지고 마한으로 건너와 낙랑국을 세웠음. 낙랑국의 마지막왕 최리의 딸,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가 여기서 유래함


만세萬世의 가르침을 내려 주심

대변경 왈

大辯經에 曰

고주몽성제 조왈

「高朱蒙聖帝가 詔曰

천신 조만인일상 균부삼진

天神이 造萬人一像하사 均賦三眞하시니

어시 인기대천이능립어세야

於是에 人其代天而能立於世也라

황아국지선 출자북부여 위천제지자호

況我國之先 出自北夫餘하사 爲天帝之子乎아.

철인 허정계율 영절사기

哲人은 虛靜戒律하야 永絶邪氣하나니

기심안태 자여중인 사사득의

其心安泰하면 自與衆人으로 事事得宜라.

용병 소이완침벌 행형 소이기무죄악

用兵은 所以緩侵伐이며 行刑은 所以期無罪惡이니라.

고 허극정생 정극지만 지극덕륭야

故로 虛極靜生하고 靜極知滿하고 知極德隆也라

고 허이청교 정이혈구

故로 虛以廳敎하고 靜以絜矩하고

지이이물 덕이제인 차내신시지개물교화

知以理物하고 德以濟人하나니 此乃神市之開物敎化하야

위천신통성 위중생입법 위선왕완공

爲天神通性하며 爲衆生立法하며 爲先王完功하며

위천하만세 성지생쌍수지화야

爲天下萬世하야 成智生雙修之化也니라.」

<해설>

『대변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주몽성제께서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리셨다. 하늘의 신(삼신)이 만인을 한 모습으로 창조하고 삼진을 고르게 부여하셨느니라. 이에 사람은 하늘을 대행하여 능히 이 세상에 서게 되었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태어나신 천제(상제님의)의 아들[天帝之子]이 아니더냐! 슬기로운 이는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며 계율을 잘 지켜 삿된 기운을 영원히 끊나니,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평하면 저절로 세상사람과 더불어 매사에 올바르게 행동하게 되느니라. 군사를 쓰는 것은 침략을 막기 위함이며, 형벌의 집행은 죄악을 뿌리뽑기 위함이니라. 그런고로 마음을 비움이 지극하면 고요함이 생겨나고, 고요함이 지극하면 지혜가 충만하고,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높아지느니라. 따라서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마음으로 사리를 판단하고, 지혜로 만물을 다스리고, 덕으로 사람을 건지느니라. 이것이 곧 신시 배달 시대에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인간의 마음을 연 교화의 방도이니, 천신을 위해 본성을 환히 밝히고, 뭇 창생을 위해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 공덕을 완수하고, 천하만세를 위해 지혜와 생명을 함께 닦아[智生雙修]교화를 이루느니라.


❖북옥저: 고대에 옥저는 네 곳이 있었다. 동옥저는 지금의 함경도 지방, 서옥저는 만리장성 부근, 남옥저는 지금의 요동반도, 북옥저는 서간도 일대였다.

❖눌견:‘늘 봄’의 이두식 표기로 상춘常春을 말한다. 상춘은 오늘날 장춘長春으로 바뀌었고, 그 북쪽에 지금도 주성자 朱城子, 즉 ‘주몽의 성터’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삼한관경본기』에는 상춘 주가성자에 구월산 삼성묘가 있다고 하였다.

❖국내성: 2세 유리명열제가 천도한 곳. 지금의 압록강 만포진 건너편 집안시(집안은 집 밖이 아닌 집 안이라는 뜻). 국내성은 11세 동천열제 때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대동강 평양으로 천도하였다가 후에 다시 국내성으로 천도한 후 20세 장수열제 때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 고구려 초.중기의 수도였다.

❖낙랑국(BCE 195~CE 37): 번조선 유민 최숭이 세운 나라. 위만의 번조선 침탈 직전에 번조선 수도인 왕험성(지금의 하북성 창려현)의 백성이 평양으로 옮겨 와서 낙랑국을 세웠다. 낙랑국은 지금의 대동강 평양에 있었고, 낙랑군은 중국의 하북성 창려 일대에 있었다.

❖ 추모왕에 관한 종합적 사실

- 탄생: 임인년(BCE 79년) 5월5일

- 해모수의 현손, 불리지와 유화의 아들

- 건국: BCE 58년 북부여의 7세 단군이 됨(다물)

- BCE 37년에 고구려로 국호를 변경하고 평락 연호사용

- 재위: 북부여(졸본부여) 21년, 고구려 19년 도합 40년

- 수: 61세(BCE 79년-BCE 19년, 삼국사기는 40세)

- 황후: 예씨부인, 소서노(파소의 아들 박혁거세와 고종사촌지간)

- 왕자: 유리, 비류, 온조


4. 을파소가 전한 참전계參佺戒

을파소 위국상

乙巴素가 爲國相에

선연소영준

選年少英俊하야

위선인도랑

爲仙人徒郞하니

장교화자 왈참전

掌敎化者를 曰參佺이니

중선수계

衆選守戒하야

위신고탁

爲神顧托하며

장무예자 왈조의

掌武藝者를 曰皂衣니

겸조성률

兼操成律하야

위공정신야

爲公挺身也라.

상언어중 왈 신시이화지세

嘗言於衆曰神市理化之世에

유민개지 일부지치

由民開智하야 日赴至治하니

즉유소이긍만세불가역지표준야

則有所以亘萬世不可易之標準也라

고 참전유계 청신이화중

故로 參佺有戒하야 廳神以化衆하며

한맹유율 대천행공야

寒盟有律하야 代天行功也니

개자입심작력 이비후공야

皆自立心作力하야 以備後功也니라.

<해설>

을파소가 국상이 되어 나이 어린 영재를 뽑아 선인(신선-태일인간)도랑으로 삼았다. 교화를 주관하는 자를 참전이라 하는데, 무리중에 계율을 잘 지키는 자를 선발하여 삼신을 받드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라 하는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규율을 잘 지켜 나라의 일을 위해 몸을 던져 앞장서도록 하였다. 일찍이 을파소가 무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신시 시대에 신교神敎의 진리로 세상을 다스려 깨우칠 때는, 백성의 지혜가 열려 나날이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렀으니, 그것은 만세에 걸쳐 바꿀 수 없는 표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전이 지켜야 할 계율을 두고, 상제님의 말씀을 받들어 백성을 교화하며, 한맹(동맹)을 행함에도 계율을 두어 하늘을 대신해서 공덕을 베푸나니 모두 스스로 심법을 바로 세우고 힘써 노력하여 훗날 세울 공덕에 대비하라.”


❖을파소(?~203): 9세 고국천열제 때의 재상. 압록곡 사람으로 2세 유리명열제 때 대신이었던 을소乙素의 손자.

❖한맹:고구려에서 10월에 행한 신교神敎의 제천祭天 의식이다. 한맹제를 일명 동맹東盟, 동명東明이라 한다.


5.을지문덕의 호쾌한 심법 세계

도통道通의 요체要諦

을지문덕 왈

乙支文德이 曰

도이사천신 덕이비민방

道以事天神하고 德以庇民邦하라

오지기유사천하야

吾知其有辭天下也라.

수삼신일체기 분득성명정

受三神一體氣하야 分得性命精하니

자재광명 앙연부동

自在光明이 昻然不動이라가

유시이감 발이도내통

有時而感하며 發而道乃通하나니라.

시내소이체행삼물덕혜력

是乃所以体行三物德慧力하고

화성삼가심기신 열만삼도감식촉

化成三家心氣身하며 悅滿三途感息觸하나니

요재일구염표 재세이화

要在日求念標하야 在世理化하며

정수경도 홍익인간야

靜修境途하야 弘益人間也라.

<해설>

을지문덕이 이렇게 말하였다. “도로써 천신(삼신상제님)을 섬기고, 덕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감싸 보호하라. 나는 천하에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삼신일체의 기운을 받을 때, 성품과 목숨과 정기로 나누어 받나니 우리 몸 속에 본래 있는 조화의 대광명은 환히 빛나 고요히 있다가 때가 되면 감응하고, 이 조화의 대광명이 발현되면 도를 통한다. 도를 통하는 것은, 삼물인 덕과 지혜와 조화력을 몸으로 직접 체득하여 실천하고 삼가(삼망三妄=삼가三家=심기신(心氣身)인 마음과 기운과 몸의 조화를 성취하며, 삼도三途(感息觸)인 느낌과 호흡과 촉감이 언제나 기쁨으로 충만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를 통하는 요체는 날마다 「염표문」을 생각하여 실천하기에 힘쓰고,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 다스려 깨우쳐서[在世理化], 삼도三途 십팔경十八境을 잘 닦아[靜修境途] 천지광명(환단)의 뜻과 대이상을 지상에 성취하는 홍익인간이 되는데 있느니라.”


❖본성[性] : 우주 조화신의 본성, 즉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간의 마음뿌리를 말한다.

❖염표문念標文 : 『단군세기』11세 도해단군 조의 「염표문」에서는 천지인의 삼대三大, 삼원三圓, 삼일三一을 이야기하고, 이어서 일신강충一神降衷, 성통광명性通光明, 재세이화在世理化, 홍익인간의 덕목을 말하였다.

❖정수경도靜修境途 : 境途는 『삼일신고』 제5장 인물人物에 나오는 말이다. 도途는 감식촉 삼도三途를 말하고, 경境은 삼도가 변화하여 이루는 열여덟 가지 경계를 말한다. 삼진三眞과 삼망三妄이 대립하여 생기는 감식촉을 닦기 위해서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의 수행법을 생활화 한다.

❖삼도三途 십팔경十八境 : 感(희구애노탐염喜懼哀怒貪厭), 息(분란한열진습芬란寒熱震濕), 觸(성색취미음저聲色臭味淫抵)


상고上古 시대의 윤리 덕목

환국왈오훈 신시왈오사

桓國曰五訓이오 神市曰五事오

조선왈오행육정 부여왈구서

朝鮮曰五行六政이오 夫餘曰九誓라.

삼한통속 역유오계 왈효충신용인

三韓通俗이 亦有五戒하니 曰孝忠信勇仁이니

개교민이정평 이직군지의 존언

皆敎民以正平이오 而織群之意가 存焉이니라.

<해설>

환국 시대에 오훈이 있었고, 신시 시대에 오사, 고조선 시대에 오행육정, 부여에 구서가 있었다. 또한 삼한의 공통된 풍속에 오계가 있었으니, 곧 효도 충성 신의 용맹 어짊이다. 모두 백성을 공명정대하고 평등하게 가르치고 무리를 조직하려는뜻이 있었다.


❖부여구서夫餘九誓 : 여기서 부여는 대부여를 말한다.고조선 44세 구물단군 원년에 국호를 대부여로 바꿨다. 九誓란 구물단군이 꿈에 상제님의 가르침을 받아 백성을 교화하는 지표를 삼은 ‘孝.友.信.忠.遜(겸손).知.勇.염廉(청렴).義’ 아홉가지 계율을 말한다. 이를 계승한 고구려의 다물오계는 ‘충.효.신.용.인’이다.

❖환국오훈桓國五訓 : 

一曰 誠信不僞

二曰 敬勤不怠

三曰 孝順不違

四曰 廉義不淫

五曰 謙和不鬪

환국시대의 다섯 가르침(오훈)

첫 번째, 매사에 정성과 믿음으로 행하여 거짓이 없게 한다.

두 번째, 공경하고 근면하여 게으름이 없게 한다.

세 번째, 효도하고 순종하여 거역하지 말라.

네 번째, 청렴하고 의를 지켜 음란하지 말라.

다섯 번째, 겸양하고 화평하게 지내어 싸움을 하지 말라.)

❖배달 오사란, 오가를 말하는데, 곡식을 주관하는 1)우가, 왕명(주명)을 주관하는 2)마가, 형벌을 주관하는 3)구가, 질병을 주관하는 4)저가, 선악을 주관하는 5)계가를 말한다.  


6.역대 성군聖君, 영걸英傑의 역역한 자취

책성 유태조무열제기공비

柵城에 有太祖武烈帝紀攻碑하고

동압록지황성 유광개토경대훈적비

東鴨綠之皇城에 有廣開土境大勳蹟碑하고

안주청천강안상 유을지문덕석상

安州淸川江岸上에 有乙支文德石像하고

오시리강외 유연개소문송덕비

烏蘇里江外에 有淵蘇蓋文頌德碑하고

평양모란봉중록 유동천제조천석

平壤牧란峰中麓에 有東川帝朝天石하고

삭주거문산서록 유을파소묘

朔州巨門山西麓에 有乙巴素墓하고

운산지구봉산 유연개소문묘

雲山之九峰山에 有淵蓋蘇文墓하니라.

조대기 왈 동처넺 역칭단군

朝代記에 曰 「東川帝를 亦稱檀君이시니

매당한맹 제영삼신우평양

每當寒盟이면 祭迎三神于平壤하시니

금기림굴 즉기제소야

今箕林窟이 卽其祭所也라.」

대영제전 시행수혈 유구제궁조천석

大迎祭典이 始行隧穴하야 有九梯宮朝天石하니

행로지인 개가지점야

行路之人이 皆可指點也라.

우유삼륜구덕지가 이장지

又有三倫九德之歌하야 以獎之하시니

조의선인 개기선야 국인소긍식자야

皂衣仙人이 皆其選也오 國人所矜式者也라

불연 하이가영 여지위등어왕사자호

不然이면 何以加榮하야 與之爲等於王使者乎아.

<해설>

책성(연해주를 말함)에 태조무열제(6세)의 공덕을 새긴 기공비가 있고,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대훈비가 있다. 안주 청천강 연안에 을지문덕 석상이 있고, 오소리강 밖에 연개소문송덕비가 있다. 평양 모란봉 중턱에 동천제(11세)가 하늘에 기원하던 조천석이 있고, 삭주 거문산 서쪽 기슭에 을파소 묘가 있고, 운산의 구봉산에 연개소문 묘가 있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동천제를 또한 단군이라 하였다. 해마다 한맹 때가 되면 평양에서 삼신상제님을 맞이하는 천제를 올렸다. 지금의 기림굴은 천제를 올리던 곳이다. 삼신상제님을 크게 맞이하는 대영제전은 처음 동굴에서 행해졌다. 거기에 구제궁 조천석이 있는데 길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었다. 또 삼륜구덕의 노래가 있어 이를 부르도록 장려하였다. 조의선인은 모두 선발된 사람인데, 사람들이 삼가 본보기로 삼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들에게 영광을 더하여 왕의 사자와 동등하게 여겼겠는가?


❖대영제전 : 배달.단군조선 이래 매년 3월 16일에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지내던 국가적인 대행사.


7.광개토열제廣開土烈帝의 성덕聖德과 동방 문명의 종주권宗主權 장악掌握

광개토경호태황

廣開土境好太皇은

융공성덕 탁월백왕

隆功聖德이 卓越百王하사

사해지내 함칭열제

四海之內에 咸稱烈帝라

년십팔 등극우광명전

年十八에 登極于光明殿하시니

예진천악

禮陳天樂하시고

매어임진 사사졸

每於臨陣에 使士卒로

가차어아지가 이조사기

歌此於阿之歌하사 以助士氣하시며

순기지마리산 등참성단

巡騎至摩利山하사 登塹城壇하사

친제삼신 역용천악

親祭三神하실새 亦用天樂하시니라.

<해설>

광개토경호태황은 큰 공덕과 성스러운 덕(隆功聖德)이 세상 어떤 임금보다 뛰어나시어, 사해 안에서 모두 열제(위대한 황제)라 불렀다.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실 때 예로써 천악을 연주했다. 전쟁에 임할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가」를 부르게 하여 사기를 돋우셨다. 말타고 순행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는데 이 때도 천악을 쓰셨다.


❖어아가於阿歌의 대조신大祖神:인간과 신명의 궁극의 뿌리 되는 천상의 큰 조상님이라는 뜻이다. 위대하신 큰 조상신은 환인.환웅.단군 삼성조를 의미하나, 이를 넘어서서 온 우주의 신명들과 인간의 조상 되시는 삼신상제님을 말한다. 『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에서는 대조신이 우주 역사의 주재자이신 ‘삼신상제님’이 라고 밝혀 주고 있다.(환단고기 역주본 측주) (부루단군 조 참고)


일본 본토 정벌과 동방 대통일의 위업

일자도해 소지 격파왜인

一自渡海로 所至에 擊破倭人하시니

왜인 백제지개야

倭人은 百濟之介也라

백제 선여왜 밀통

百濟가 先與倭로 密通하야

사지연침신라지경

使之聯侵新羅之境하니

제궁솔수군

帝躬率水軍하사

공취웅진.임천.와산.괴구.

攻取熊津.林泉.蛙山.槐口..

복사매.우술산.진을례

伏斯買.雨述山.進乙禮

노사지등성 노차속리산

奴斯只等城하시고 路次俗離山이라가

기조조제천이환

期早朝祭天而還하시니

시작백제.신라.가락제국

時則百濟.新羅.駕洛諸國이

개입공부절

皆入貢不絶하고

거란.평량 개평복

契丹.平凉이 皆平服하고

임나.이.왜지속 막불칭신

任那.伊.倭之屬이 莫不稱臣하니

해동지성 어사위최의

海東之盛이 於斯爲最矣라.

<해설>

한번은 바다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왜인을 격파하셨는데, 당시 왜인은 백제를 돕고 있었다. 백제는 앞서 왜와 은밀히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잇달아 신라 경계를 침범하게 하였다. 이에 열제께서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공주).임천(부여).와산(충북 보은).괴구(충북 괴산). 복사매(충북 영동).우술산(대전 보문산).진을례(충북 금산.무주.진안). 노사지(대전 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셨다. 속리산을 지나시다가, 이른 아침에 천제를 올리고 돌아오셨다. 이때에 백제.신라.가락제국駕洛諸國(6가야) 모든 나라가 조공을 끊이지 않고 바쳤다. 거란과 평량(중국 감숙성 평량현-실크로드 통로)이 다 평정되어 굴복하였고. 임나.이국.왜의 무리가 신하라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해동의 융성이 이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百殘이라 한것은 광개토대왕의할아버지 고구원왕이 백제와 전투에서 돌아가셔서 당시 백제에 대한 원한이 컸음, 잔殘은 의를 저버린자를 잔殘이라한 답니다.

❖비문에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백잔 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에서 구시속민舊是屬民은 백제와 신라가 예전에 같은 민족이었음을 인지한다는 내용입니다.

❖실크(Silk)는 고구려말 실쿠리에서 온 어원이라 합니다. 낙동강의 이름도 가락국의 락자에서 왔다고합니다.

❖임나任那 : 지금의 대마도; 여기에서 가야와 임나가 각각 다른것을 확인 할  있다. 또한 고령가야는 상주에 있고, 고령에는 대가야가 있었는데, 상주에 옛 명칭이 상락上洛이라고도 했는데, 가장 윗쪽에 있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왜倭 연나부부여(서부여)왕 의라(일본서기에 나오는 15세 오진왕)가 건설한 일본 최초의 통일 왕조인 야마토 대화大和 왜倭이다.

실크로드 길목 평량의 위치
駕洛諸國 6가야伽耶 열국강역도


8. 일본 구주九州에 다라한국多羅韓國을 건국한 협보陜父

일본에 세워진 고구려 분국分國

선시 협보 분남한 거마한산중

先是에 陜父가 奔南韓하야 居馬韓山中하니

종이출거자 수백여가

從而出居者가 數百餘家라

미기 세련대겸 유리편로 협보 내지장혁

未幾에 歲連大歉하야 流離遍路어늘 陜父가 乃知將革하고

유중과량 주종패수이하 유해포이잠항

誘衆裹糧하야 舟從浿水而下하고 由海浦而潛航하야

직도구야한국 내가라해북안야 거수월

直到狗야韓國하니 乃加羅海北岸也라 居數月에

전사우아소산이거지 시위다파라국지시조야

轉徙于阿蘇山而居之하니 是爲多婆羅國之始祖也라

후 병우임나 연정이치

後에 倂于任那하야 聯政以治하니

삼국 재해 칠국 재륙

三國은 在海하고 七國은 在陸이라.

<해설>

이보다 먼저 협보가 남한으로 달아나서 마한산(지금의 평양 대동강부근)속에 은거하고 있을 때, 따라와서 사는 자가 수백여 가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해 흉년이 들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때 협보가 장차 변란이 있을 줄 알고 무리를 꾀어 양식을 싸서 배를 타고 패수(대동강)를 따라 내려왔다. 해포(진남포)를 거쳐 몰래 항해하여 곧장 구야한국에 이르니, 곧 가라해(대한해협?)의 북쪽 해안이었다. 몇 달 지내다가 아소산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다라파국의 시조이다. 후에 임나와 병합하여 연합정권을 세워 다스렸다. 이 때 세 나라는 바다(섬)에 있고, 일곱 나라는 육지(규슈)에 있었다. 


❖韓國을 일본은 가라쿠니(가야)라고 부른다.


고대 일본 속에 건설한 한국

초 변진구야한국인 선재단취 시위구야한국

初에 弁辰狗야韓國人이 先在團聚하니 是爲狗야韓國이오

다파라 일칭다라한국 자홀본이래

多婆羅는 一稱多羅韓國이니 自忽本而來하야

여고구려 조이정친고 상위열제소제

與高句麗로 早已定親故로 常爲烈帝所制라

다라국 여안라국 동린이동성

多羅國은 與安羅國으로 同隣而同姓이오

구유웅습성 금구주웅본성 시야

舊有熊襲城하니 今九州熊本城이 是也라.

<해설>

처음에 변진에 구야국 사람이 먼저 들어와서 모여 살았는데 이것을 구야한국이라 하였다. 다파라(협보가 세운나라)를 일명 다라한국이라 불렀다. 이곳 사람들은 홀본(졸본)에서 이주해 와서 일찍이 고구려와 친교를 맺었으므로 늘 고구려 열제(광개토대왕)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과 서로 이웃하고 성씨도 같았다. 옛날에는 이곳에 웅熊습(구마소)성이 있었는데, 지금의 큐슈 쿠마(熊곰)모토 성이 바로 그곳이다.


당시 왜倭의 위치와 상황

왜재회계군동 동야현지동

倭在會稽郡東 東冶縣之東하니

주도구천리 지나패

舟渡九千里하야 至那覇하고

이우도일천리 지근도 근도 역왈저도

而又渡一千里하야 至根島하니 根島는 亦曰柢島라

시 구노인 여여왕 상쟁 색로심엄

時에 狗奴人이 與女王으로 相爭하야 索路甚嚴일새

기욕왕구야한자 개유진도.가라산.지가도

其欲往狗야韓者는 盖由津島.加羅山.志加島하야

시득도말로호자지경 기동계즉내구야한국지야

始得到末盧戶資之境하니 其東界則乃狗야韓國地也라.

<해설>

왜는 회계군(중국 절강성) 동쪽에 있는 동야현의 동쪽에 있었다. 뱃길로 바다 건너 9천 리를 가면 나패(나하)에 이르고, 또 일천리를 가면 근도(네시마)에 이른다. 근도(네시마)를 저도(도시마)라고도 부른다. 당시에 구노사람이 여왕과 서로 다퉈 찾아가는 길을 매우 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구야한국으로 가려는 사람은 대개 진도(쓰시마), 가라산, 지가도를 거쳐야 비로소 말로호자(말로국) 땅에 이를 수 있었다.그 동쪽 경계가 구야한국 땅이다.


❖야마토大和倭, 대마도는 한국에 속한 섬이었다. 임나는 미마(주인, 님), 나(땅) 즉 님땅=>임나

❖결국 우리나라가 바다를 건넌 도래인渡來人들이 일본을 세웠다. 다른 말로 渡來人을 또라이라고 한다.

일본서기가 밝힌 임나의 위치는 대마도가 명확함.
한민족의 일본 이주와 건국
가야와 계보


9.회계산會稽山의 역사적 의의와 방사方士 서복徐福의 일본 이주 과정

회계산 본신시중경소장처 이사공우

會稽山은 本神市中經所藏處오 而司空禹가

재계삼월이득 내유공어치수고 우벌석

齋戒三月而得하야 乃有功於治水故로 禹伐石하야

각부루공어산지고처운 즉오월 본구려구읍

刻扶婁功於山之高處云하니 則吳越은 本九黎舊邑이오

산월좌월 개기유예분천지지야

山越左越이 皆其遺裔分遷之地也라

상여왜 왕래무판 득리자점다

常與倭로 往來貿販하야 得利者漸多라.

진시 서불 자동야해상 직지나패

秦時에 徐市이 自東冶海上으로 直至那覇하야

경종도이연뇌호내해 시도기이

經種島而沿瀨戶內海하야 始到紀伊하니

이세 구유서복묘사 혹왈단주 서복소거운

伊勢에 舊有徐福墓祠라 或曰亶州는 徐福所居云이라.

<해설>

회계산은 본래 『신시중경』이 소장되어 있던 곳이다. 사공 우禹가 석 달 동안 재계하고 이 책을 얻어 치수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우가 돌을 채취하여 부루태자의 은공을 새겨 산 높은 곳에 세웠다고 한다. 오.월은 본래 구려의 옛 읍이고, 산월.좌월은 모두 그 후예가 갈라져 옮겨 살던 땅이다. 늘 왜와 더불어 왕래하고 교역하여 이익을 얻는 자가 점점 많아졌다. 진나라 때 서불이 동야의 해상으로부터 곧바로 나패(나하)에 이르고, 종도(다네시마)를 거쳐 뇌호내해(세도나이카이)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에 도착하였다. 이세는 옛적에 서복의 무덤과 사당이 있었다. 어떤 이는 단주를 서복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오월춘추』에는 “3월 경자일에 완위산에 올라가 금간지서를 발견하고 금간옥자를 살펴서 물길을 소통시키는 원리를 알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려:지금의 산동성.강소성.안휘성.절강성 등 황하.양자강 중류 동쪽의 중국 본토에 정착하여 살던 동이족을 부르던 명칭이다. 단군조선 때에 이 지역에 분조分朝를 두어 구려의 백성을 다스렸다.

❖서불은 진나라 왕 영정(진시황)때의 방사方士. 정왕이 동방의 종주국 단군조선의 신교 사상에 영향을 받아 서복(서불).한종에게 불사약을 구해 오라 하였는데, 도망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은 왜국으로 건너가서 왕이 되었다.


10.고구려 전성기의 강역

중국 양자강 남쪽까지 지배

장수홍제호태열제 개원건흥 인의치국

長壽弘濟好太烈帝는 改元建興하사 仁義治國하시고

회척강우 웅진강이북 속아

恢拓彊宇하시니 熊津江以北이 屬我하고

북연실위제국 개입서족언

北燕室韋諸國이 皆入叙族焉이오

우여신라매금 백제어하라

又與新羅寐錦과 百濟於瑕羅로

회우남평양 약정납공수병지수

會于南平壤하사 約定納貢戍兵之數하시니라.

문자호태열제 개원명치

文咨好太烈帝는 改元明治하시고

십일년 제노오월지지 속아 지시 국강점대

十一年에 齊魯吳越之地가 屬我하니 至是하야 國疆漸大라.

평강상호태열제 유담력 선기사

平岡上好太烈帝는 有膽力하시며 善騎射하사

내유주몽지풍 개원대덕 치교휴명

乃有朱蒙之風이러시니 改元大德하시고 治敎休明하시니라

대덕십팔년병신 제솔대장온달

大德十八年丙申에 帝率大將溫達하사

왕토갈석산배찰산 추지유림관 대파북주

往討碣石山拜察山하시고 追至楡林關하사 大破北周하시니

유림진이동 실평 유림 금산서경

楡林鎭以東이 悉平하니라 楡林은 今山西境이라.

<해설>

장수홍제호태열제(20세 장수제, 단기 2746~2824, 413~491)는 연호를 건흥으로 고치셨다.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영토를 넓히고 개척하시어 웅진강 이북이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북연.실위 등 여러 나라(5호16국)가 다 같이 입조하여 우리의 형제 족속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유림진 동쪽 땅이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은 지금의 산서 경계이다. 또 신라의 매금과 백제의 어하라와 남평양(지금의 서울)에서 만나, 공물을 바치는 일과 국경에 주둔시킬 병사의 숫자를 약정하였다. 문자호태열제(21세, 문자세, 단기 2824~2852, 491~519)는 연호를 명치明治(일본이 후에 따라쓴 듯)로 고치셨다. 11년(단기 2834, 501)에 제.노.오.월의 땅이 우리(고구려)에 귀속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영토는 점점 더 넓어졌다. 평강상호태열제(25세 평원제, 단기 2892~2923, 559~590)는 담력이 크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시어 주몽의 기풍이 있었다. 연호를 대덕으로 바꾸었고, 정치와 교화가 매우 밝아졌다. 대덕 18년 병신(단기 2909,576)년에 열제께서 대장 온달(온溫씨의 시조)을 거느리고 가서 갈석산과 배찰산을 치고, 추격하여 유림에 이르러 북주(우리는 후주라 부름)를 크게 깨뜨리셨다. 이로써 유림진 동쪽 땅이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은 지금의 산서 경계이다.


❖북연(407~436):중국 5호 16국 시대 때 16국 중의 하나. 후연에서 벼슬하던 고구려 사람 고운이 광개토열제에게 대패한 후 연나라의 왕 모용희를 살해하고 북연을 세웠다..

❖매금: 신라국 왕을 말함. 광개토왕비문의 ‘昔新羅□錦’부분에서 판독되지 않는 빠진 글자가 있는데, 여기에는 마땅히 ‘매寐’자가 들어가야 될 것으로 본다.

❖문자호태열제:고구려 21세 황제. 『삼국사기』열전「최치원」을 보면 당에서 관직을 얻은 최치원이 자신의 상관에게 올리는 글에서 “고구려.백제가 그 전성시에는 강병强兵이 백만이었고, 남으로 오.월을 침공하고, 북으로 유.연.제.노를 뒤흔들었다.”라고 한 것은 본서의 기록 내용을 입증한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는 “이는 과장된 것이다”라고 일축하였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사대.모화주의자인 최치원이 당의 비위를 크게 거스리는 말을 이유없이 했을 리 만무하다.

❖북주:선비족의 한 갈래인 우문씨가 북위北魏에서 갈라진 서위西魏를 빼앗아 세운 나라. 후에 북주의 양견이 왕이 되어 나라 이름을 수隋로 고쳤다.

구구려전성기 영토와 대륙백제의 영토
구구려전성기 영토


11.선비족鮮卑族 후손인 수양제의 침략을 격퇴

영양무원호태열제시 천하대리 국부민은

嬰陽武元好太烈帝時에 天下大理하야 國富民殷이러니

수주양광 본선비종 통합남북지역

隋主楊廣이 本鮮卑種으로 統合南北之域하고

이기여세 모아고구려

以其餘勢로 侮我高句麗하야

이위소로 모만상국

以爲小虜가 侮慢上國이라 하야

빈가대병 아기유비 이미상일패야

頻加大兵이나 我旣有備하야 而未嘗一敗也라.

<해설>

영양무원호태열제(26세 영양제, 단기 2923~2951, 590~618) 때에 천하가 잘 다스려져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번성하였다. 수나라 왕 양광은 본래 선비족의 후손이다. 양광이 남북을 통합하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 고구려를 깔보고, 조그마한 오랑캐가 거만하게도 상국을 업신여긴다 하여 자주 대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는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일찍이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고구려-수나라 대전쟁(고수대전)

1차: 홍무 8년. 598년, 수문제 30만 대군, 연태조(강이식)

2차: 홍무 23년. 612년, 수양제 130만 대군 침입, 살수대첩(을지문덕)

3차: 홍무 24년. 613년, 수양제 40만 대군, 양현감과 이밀의 반란, 곡사정의 망명

4차: 홍무 25년. 614년, 수양제, 수군대장 내호아 비사성 함락, 곡사정 귀부


수양제의 피격 사건

홍제제이십오년 광 우부동침

弘武二十五年에 廣이 又復東侵할새

선견장병 중위비사성 관병 전불리

先遣將兵하야 重圍卑奢城하니 官兵이 戰不利라

장습평양 제문지

將襲平壤이어늘 帝聞之하시고

욕도환병 집견곡사정 적유조의일인자

欲圖緩兵하사 執遣斛斯政하실새 適有皂衣一仁者하야

자원청종이해도 헌표어양광

自願請從而偕到하고 獻表於楊廣한대

광 어강중 수표이독미반

廣이 於舡中에 手表而讀未半이오

거발수중소노 중기흉 광 경도실신

遽發袖小弩하야 中其胸하니 廣이 驚倒失神이라.

우상양명 사부지 급이어소선이퇴

右相羊皿이 使負之하야 急移於小船而退하고

명회원진철병

命懷遠鎭撤兵하니라.

광 위좌우왈 여위천하주

廣이 謂左右曰 予爲天下主하야

친벌소국이불리 시비만세지소치호

親伐小國而不利하니 是非萬世之所嗤乎아 한 대

양명등 면흑무답

羊皿等이 面黑無答이러라.

<해설>

홍무25(단기 2947, 614)년에 양광이 또 다시 동쪽으로 쳐들어왔다. 이때 먼저 군사를 보내어 비사성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우리 군사가 맞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적이 곧 평양을 습격하러 하거늘, 열제(영양제)께서 소식을 들이시고 진격을 늦추기 위해 곡사정을 보내려 하셨다. 때마침 조의선인 일인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하므로 함께 진중에 도착하여 양광에게 표를 올렸다. 양광이 배 안에서 표를 손에 들고 절반도 채 읽기 전에 갑자기 일인이 작은 쇠뇌를 꺼내 쏘아 가슴에 맞혔다. 양광이 놀라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우상 양명이 양광을 업게 하여 급히 작은 배로 옮겨 타고 물러나서, 회원진으로 철병하기를 명하였다. 양광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작은 나라를 치다가 졌으니, 이것이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하였다. 양명 등은 얼굴빛이 검게 변하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인류문명의 종주국을 노래한 찬가

후인 가지왈

後人이 歌之曰

차여준준하가아 막향요동낭사가

嗟汝蠢蠢漢家兒아 莫向遼東浪死歌하라.

문무아선호환웅 면긍혈윤영걸다

文武我先號桓雄이시니 綿亘血胤英傑多라.

주몽태조광개토 위진사해공막가

朱蒙太祖廣開土는 威振四海功莫加하시고

유유일인양만춘 위타변색자미위

紐由一仁楊萬春은 爲他變色自靡踒라.

세계문명오최고 양척외국보평화

世界文明吾最古하야 攘斥外寇保平和라.

망풍궤주작구과

劉徹楊廣李世民은 望風潰走作駒過라.

영락기공비천척 만기일색태백아

永樂紀功碑千尺이니 萬旗一色太白峨라.

<해설>

뒷 사람이 이 일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아아,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너희 한나라 아이들아! 요동을 향해 헛된 죽음의 노래를 부르지 말지라. 문무에 뛰어나신 우리 선조 환웅이 계셨고, 면면히 혈통 이은 자손, 영걸도 많으셨네. 고주몽 성제, 태조무열제, 광개토열제께서 사해에 위엄 떨치시어 공이 더할 나위 없네. 유유.일인.양만춘은 저들이 얼굴빛 변하며 스스로 쓰러지게 하였네. 세계에서 우리 문명이 가장 오래고 바깥 도적 쫓아 물리치며 평화를 지켜 왔으니, 저 유철(한무제).양광(수양제).이세민(당태종)은 풍채만 보고도 무너져 망아지처럼 달아났구나. 광개토열제 공덕 새긴 비석 천 자나 되고 온갖 깃발 한 색으로 태백산처럼 높이 나부끼누나.


❖비사성: 지금의 만주 요동반도 끝에 있는 대련만 북안에 있던 고구려 성.

❖곡사정: 수나라 예부상서 양현감의 부하로서 시랑 벼슬에 있었다.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진중에서 고구려에 망명하였다. 수양제의 요구에 따라 곡사정을 수나라에 인도하였다.

❖유유:11세 동천열제 때의 충신.246년 위魏나라의 관구검이 침략, 환도성이 함락되자 열제는 남옥저(요동반도)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추격이 심하여 매우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그때 유유가 열제에게 계책을 올리고 항복을 가장하고 위의 군중에 들어가 위나라 장수를 비수로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장렬히 전사하였다.장수를 잃고 큰 혼란에 빠진 위군은 고구려군의 대반격을 받아 참패하고 낙랑(대동강 평양이 아님)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환도성이 난을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게 되자, 동천열제가 다음해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12. 신교神敎를 대각大覺한 을지문덕 장군의 큰 공적

을지문덕 고구려국석다산인야

乙支文德은 高句麗國石多山人也라

강입산수도 득몽천신이대오

嘗入山修道하야 得夢天神而大悟하고

매당삼월십육일즉치왕마리산 공물경배이귀

每當三月十六日則馳往摩利山하야 供物敬拜而歸하며

시월삼일즉등백두산제천 제천 내신시고속야

十月三日則登白頭山祭天하니 祭天은 乃神市古俗也라.

<해설>

을지문덕은 고구려 석다산(요령성 요양-돌이 많은 지역) 사람이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삼신의 성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고 신교 진리를 크게 깨달았다. 해마다 3월 16일(대영절)이 되면, 말을 달려 강화도 마리산에 가서 제물을 바쳐 경배하고 돌아왔다.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렸다. 이런 제천 의식은 배달 신시의 옛 풍속이다.


수양제隋煬帝의 대침공을 살수대첩으로 격퇴

홍무이십삼년 수군일백삼십여만

弘武二十三年에 隋軍一百三十餘萬이

병수륙이래공 문덕 능이기계 출병초격지

並水陸而來功이어늘 文德이 能而奇計로 出兵鈔擊之하고

추지살수 수대파지 수군 수륙구궤

追至薩水하야 遂大破之하니 隋軍이 水陸俱潰하야

생귀요동성 금창려자 근이천칠백인

生歸遼東城今昌黎者가 僅二千七百人이라.

광 견사걸화 문덕 불청 제역엄명추지

廣이 遣使乞和한대 文德이 不廳하고 帝亦嚴命追之시라

문덕 여제장 승승직구

文德이 與諸將으로 乘勝直驅할새

일자현도도 지태원 일자낙랑도 지유주

一自玄도道로 至太原하고 一自樂浪道로 至幽州하야

입기주현이치지 초기유민이안지

入其州縣而治之하며 招其流民而安之라.

어시 건안 건창 백암 창려제진 속어안시

於是에 建安.建昌.白岩.昌黎諸鎭은 屬於安市하고

창평 탁성 신창 용도제진 속어여기

昌平.涿城.新昌.용道諸鎭은 屬於如祈하고

고노 평곡 조양 누성 사구을 속어상곡

孤奴.平谷.造陽.樓城.沙溝乙은 屬於上谷하고

화룡 분주 환주 풍성 압록 속어임황

和龍.汾州.桓州.豐城.鴨綠은 屬於臨潢하니

개잉구이치리

皆仍舊而置吏라.

지시 강병 백만 경토 익대

至是하야 强兵이 百萬이오 境土가 益大라.

<해설>

홍무 23(단기 2945, 612)년에, 수나라 군사 130여 만 명이 바다와 육지로 쳐들어왔다. 을지문덕이 출병하여 기묘한 계략으로 그들을 공격하고 추격하여 살수(대상지; 1)요동반도-주남하, 2)대양하, 3)청천강 4)무심천) 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격파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바다와 육지에서 함께 궤멸되어, 살아서 요동성(지금의 하북성 창려)으로 들어간 자가 겨우 2천7백 명이었다. 양광이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구걸하였으나 을지문덕이 듣지 않았고, 열제(영양제) 또한 추격하도록 엄한 명을 내리셨다. 을지문덕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승리의 기세를 타고 곧바로 몰아붙여, 한 갈래는 현도 길로 태원에 이르고, 한 갈래는 낙랑 길로 유주에 이르러, 그곳의 주와 현에 들어가서 다스리고, 떠도는 백성을 불러모아 안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건안.건창.백암.창려 등 여러 진은 안시에 속하고, 창평.탁성.신창.용도 등 여러 진은 여기에 속하고, 고노.평곡.조양.누성.사구을은 상곡에 속하고, 화룡.분주.환주.풍성.압록은 임황에 속하게 되어 모두 옛 제도에 따라 관리를 두었다. 이때 강한 군사가 백만이었고 영토는 더욱 커졌다.

살수대첩 양광 추격 영역


만고의 영걸, 을지문덕

양광임신지구야 출사지성 전고미지유야

楊廣壬申之寇也에 出師之盛이 前古未之有也로대

이아조의이십만 멸기군기진

以我皂衣二十萬으로 滅其軍幾盡하니

차비을지문덕장군일인지력호

此非乙支文德將軍一人之力乎아

약을지공자 내만고조시세지일성걸야재

若乙支公者는 乃萬古造時勢之一聖傑也哉로다.

문충공조준 여명사축맹

文忠公趙浚이 與明使祝孟으로

공등백상루 부시왈

共登百祥樓하야 賦詩曰

살수상상양벽허 수병백만화위어

薩水漡漡漾碧虛하니 隋兵百萬化爲魚라.

지금유득어초어 불만정부일신여

至今留得漁樵語하니 不滿征夫一哂餘라.

<해설>

양광이 임신(단기 2945, 612)년에 쳐들어올 때, 전에 없이 많은 군사를 몰고 왔으나 우리는 조의 20만으로 적군을 거의 다 멸하였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공 같은 사람은 한 시대의 흐름을 지어내는 만고에 드문 거룩한 영걸이다. 뒤에 문충공 조준이 명나라 사신 축맹과 함께 백상루에 올라 이렇게 시를 읊었다. 살수 물결 세차게 흘러 푸른 빛 띠는데 옛적 수나라 백만 군사 고기밥이 되었구나. 지금도 어부와 나무꾼에게 그 때 이야기 남았건만 명나라 사신은 언짢아 한 번 웃고 마는구나.


❖신교를 대각한 을지문덕: 고구려의 을파소,광개토열제,을지문덕,연개소문 같은 영걸은 모두 한민족의 뿌리인 환인.환웅.단군성조 이래 한민족의 국교요,동방 문명의 정교政敎인 신교 문화를 부흥시켜 꽃피운 역사적 인물이다.

❖낙랑: 낙랑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었다. 종래의 통설인 평양 위치설은 한국고대사를 왜곡·말살하기 위해 일제 식민사관이 심혈을 기울여 날조한 것이다.

❖조준: 고려말, 조선 초의 정치가

❖백상루:평안도 안주읍 안주 군청에서 북쪽으로 백 보 되는 거리에 있다. 고구려 때 누각으로 관서 제일루라 불린다.

❖난하: 하북성 창려 지역. 고구려 당시의 요수遼水로 요동과 요서를 구분 짓는 경계였다. 중국에서 가장 동쪽의 국경지대를 뜻하는 말로 ‘요遼(멀다)’라 했다. 따라서 요수는 국경지대의 큰 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대진국 때까지도 요수는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난하였다. 지금의 요하는 고구려때 구려하九黎河,고구려하라 불렸다. 백하.난하.대릉하 등이 시대와 국경 변천에 따라 요수라 불리다가, 거란족이 요遼나라를 세운 후에 비로소 지금의 요하라는 명칭으로 고정된 것이다.


13. 고구려 백제의 통치 영역과 수 문제의 대침략

구사 왈 영양무원호태열제홍무구년

舊史에 曰 「嬰陽武元好太烈帝弘武九年에

제견서부대인연태조

帝遣西部大人淵太祚하사

왕토등주 금살총관위충

往討登州하시고 擒殺摠管韋冲하시니라.」

선시 백제이병 평정제노오월지지

先是에 百濟以兵으로 平定齊魯吳越之地하고

설관서 색적민호 분봉왕작 둔수험새

設官署하야 索籍民戶하며 分封王爵하야 屯戍險塞하며

군정부조 실준내지

軍征賦調를 悉準內地러니

명치년간 백제군정 쇠퇴부진

明治年間에 百濟軍政이 衰頹不振하고

권익집행 진귀성조 획정성읍 문무치리

權益執行이 盡歸聖朝하야 劃定城邑하고 文武置吏라

급수작병 유사남북 소요사기

及隋作兵하야 有事南北하고 騷擾四起하야

해급생민 제위혁노 공행천토

害及生民일새 帝威赫怒하사 恭行天討하시니

사해지내 막불청명야

四海之內에 莫不聽命也라.

연 수주양견 음장화심 감출수병

然이나 隋主楊堅이 陰藏禍心하고 敢出讐兵하야

밀견위충 총관위명 궤파관가 분략읍락

密遣韋冲하야 總管爲名하고 潰破官家하며 焚掠邑落하니

내견장병 금살적괴 산동평복 해성밀연

乃遣將兵하사 擒殺賊魁하시니 山東平服하고 海城謐然이라.

<해설>

옛 역사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영양무원호태열제(26세) 홍무 9년(단기 2931, 598)에 열제께서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어 등주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사로잡아 죽이셨다. 이에 앞서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제.노.오.월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과 호수구를 정리하고, 왕의 작위를 나누어 봉하고 험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군역과 세금과 특산물 납부를 모두 본국에 준하여 하게 하였다. 명치연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권익 집행을 고구려 조정에서 하게 되었다. 성읍의 구획을 짓고 문무 관리를 두었다. 그 후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남북에서 사변이 생기고 사방에서 소요가 일어나 그 피해가 생민에게 미치게 되었다. 열제께서 크게 노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어 토벌하시니, 사해 안에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수나라 왕 양견은 속으로 앙심을 품고 감히 원수를 갚겠다고 군사를 내어 은밀히 위충을 보내 총관이라는 이름으로 관가를 파괴하고 읍락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하였다. 이에 장수와 병사들을 보내어 도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시니 산동 지역이 평정되고 해성이 평온해졌다.


수문제(양견)의 침략과 격퇴

시세 견 우견양량왕세적등삼십만 내여전

是歲에 堅이 又遣楊諒王世績等三十萬하야 來與戰할새

재발정주 미지요택

纔發定州하고 未至遼澤하야

치수란이궤전두절 여역병치

値水亂而饋轉杜絶하고 癘疫幷熾라

주라구 이병거등주 징집전함수백

周羅緱가 以兵據登州하고 徵集戰艦數百하야

자동래 범선 취평양 위아소각

自東萊로 泛船k하야 趣平壤이라가 爲我所覺하야

전이거지이진 홀조대풍이전군 표몰

殿而拒之以進이라가 忽遭大風而全軍이 漂沒하니라.

시 백제 청수위군도 수아밀유이미과

時에 百濟가 請隋爲軍導라가 受我密諭而未果하니라.

<해설>

이해(단기 2931, 598)에 양견이 또다시 양량, 왕세적 등 30만 명을 보내 전쟁할 때, 겨우 정주를 출발하여 요택(안시, 석성, 건안, 요동(창려), 풍성, 한성, 옥정보, 택성, 요택(황하북쪽))에 이르기도 전에 물난리를 만나 군량 수송이 끊기고 유행병이 크게 번졌다. 주라구가 병력을 동원하여 등주를 점거하고, 전함 수백 척을 징집하여 동래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향하다가 아군에게 발각되었다. 주라구가 후진을 맡아 막으면서 전진하다가, 문득 큰바람을 만나 전군이 표류하다 빠져 죽었다. 이때 백제가 수나라 군대에게 길을 인도해 주겠다고 제의하였으나, 고구려에서 은밀히 타이르자 실행하지 못하였다.

요동10성의 위치비교


고구려高句麗의 남수북벌南守北伐 정책

좌장고성 밀유친수지심 음괴막리지북벌지계

左將高成이 密有親隋之心하야 陰壞莫離支北伐之計러니

지시 누청견사 공파백제유공

至是하야 屢請遣師하야 攻破百濟有功이라

독막리지역배중의 강집이남수북벌지책

獨莫離支力排衆議하고 强執以南守北伐之策하야

누진이해이종

屢陳利害以從하니라.

<해설>

고구려 좌장 고성(고건무)이 몰래 수나라와 친하려는 마음을 품고 은밀히 막리지의 북벌 계획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성은 여러 번 군대를 보낼 것을 청원하여 백제를 쳐부수고 공을 세웠다. 그러나 막리지가 홀로 힘써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쪽은 지키고 북쪽을 치는 계책을 강하게 고수하여 여러 번 이해를 따져 말하므로, 이를 따르게 되었다.


❖연태조: 연개소문의 아버지, 중국 낙양 북망에서 출토된 천남생의 묘지명에 따르면, 남생의 할아버지를 태조太祚라 하였고 그 벼슬이 막리지라 하였다.

❖등주: 지금의 산동성 봉래蓬萊

❖명치明治: 21세 문자열제(491~519)의 연호, 명치 연간은 곧 백제의 동성왕.무령왕 때에 해당한다.

❖양견: 隋나라를 세운 문제의 이름. 처음에 북주(557~581)를 섬겨 相國이 되었다가 임금을 죽이고 자립하여 수나라를 세웠다.

❖양량:수 문제의 넷째 아들.

❖왕세적: 수나라 때 강남의 陳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형주총관이 되었다.

❖정주:지금의 하북성 정주시

❖막리지: 고구려 때 군사와 정치를 총 관리하던 관직명

❖남수북벌: 즉, 백제.신라 쪽은 방어만 하고 북쪽, 즉 중국 지역을 공격하자는 고구려 국방.외교의 기본 정책. 엄밀한 의미에서는 남수북벌이 아니고 남수서벌이라 해야 옳다. 단재 신채호에 의하면 고구려는 국초 이래 한반도 쪽은 지키기만 하고 서쪽의 중국 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장수제 때에 이르러 서수남진으로 변경하였다는 것이다. 후일 서수남진파를 쿠데타로 실각시키거나 살해하고 대對 중국 강경 노선을 채택한 연개소문을 단재는 극찬하였다.(신재호, 『조선상고사)


14. 연개소문의 강렬한 주체정신

급고성 즉위 진기전제지유법

及高成이 卽位하사 盡棄前帝之遺法하시고

견당구노자상 사국인 청강도덕경

遣唐求老子像하사 使國人으로 聽講道德經하시고

우동중수십만 축장성

又動衆數十萬하사 築長城하시니

자부여현 지남해부 천유여리

自夫餘縣으로 至南海府히 千有餘里라.

시 서부대인연개소문

時에 西部大人淵蓋蘇文이

청파강도교 우이정장성지역 극진이해

請罷講道敎하고 又以停長城之役으로 極陳利害로대

제심불열 탈소문지병 명감축장성지역

帝甚不悅하사 奪蘇文之兵하시고 命監築長城之役하사

밀여제대인 의주멸지

密與諸大人으로 議誅滅之하시니라.

소문 선득문지 내탄왈

蘇文이 先得聞知하고 乃嘆曰

기유신사이국전지리호 사급의 시불가실야

豈有身死而國全之理乎아 事急矣오 時不可失也라 하고

실집부병 약장열무자 성진주찬

悉集部兵하야 若將閱武者하고 盛陳酒饌하야

소제대신 공림시지 개지

召諸大臣하야 共臨視之하니 皆至라.

소문 여성왈 문근호앙이불구

蘇文이 勵聲曰 門近虎狼而不救하고

반욕살아호 수제지 제문변이미복잠도

反欲殺我乎아 하고 遂除之라 帝聞變而微服潛逃하사

지송양이하조초모 국인 무일인지자

至松壤而下詔招募이시나 國人이 無一人至者라

자불승괴한 수자운쇄이붕

自不勝愧汗하사 遂自殞碎而崩하시니라.

<해설>

고성(27세 영류제)이 즉위하자 이전의 열제들이 남긴 법을 모두 버리고 당에 사신을 보내어 노자상老子像을 구해 와서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노자 『도덕경』강론을 듣게 하셨다. 또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시어 장성을 쌓는데 부여현에서 남해부까지 그 거리가 천여리였다. 이때에 서부대인 연개소문이 도교 강론을 그만 두도록 청원하고, 또 장성을 쌓는 일을 중지시키도록 이해를 따져 간절히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이 매우 언짢게 생각하여 연개소문의 군사를 빼앗고, 장성 쌓는 일을 감독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비밀리에 여러 대인과 함께 연개소문을 주멸하려고 의논하였다. 연개소문이 이 일을 먼저 전해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몸이 죽고 나서 나라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겠는가? 일이 급박하니 때를 놓쳐서는 안 되리라”하고, 휘하 군사를 모두 모아 장차 열병할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 술과 음식을 많이 차리고 이때 연개소문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범과 이리가 문 가까이 왔거늘, 나를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나를 죽이려 하는가?”하고, 마침내 그들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임금이 변고를 전해 듣고 평복으로 몰래 달아나다가 송양에 이르러 조칙을 내려 병사를 모집하셨으나, 나라 사람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이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붕어하시고 말았다.


❖영류제의 붕어: 고구려의 정통 역사를 파괴한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은 영류제를 시해한 살인자’로 몰고, 이러한 연개소문의 패륜으로 인해 고구려가 멸망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환단고기』에서는 영류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여, 김부식이 왜곡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있다. 

❖영류제의 굴욕적 대당외교

1) 2, 4, 5, 6, 7, 12, 25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遣使如唐) 조공함

2)8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遣使如唐) 불교와 도교를 가르쳐달라고 함(求學佛老敎法)

3)11년: 가을 구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遣使如唐) 당태종에게 돌궐가한(고구려 동맹)을 잡은 것을 축하하고, 겸하여 지도를 보냈다.(겸상봉역도-兼上封或圖)

4)14년: 당이 광주사마 장손사를 보내 수나라 병사들의 유골의 무덤에 제사 지내고 그때세운 경관을 훼손(전승 기념관) 

5)23년:춘삼월에 당나라에 세자를 보내 조공했음.


15. 연개소문의 생애와 대인大人의 풍모

조대기 왈

朝代記에 曰

연개소문 일운개금 성 연씨 기선 봉성인야

「淵蓋蘇文은 一云蓋金이니 姓은 淵氏오 其先은 鳳城人也라

부왈태조 조왈자유 증조왈광 병위막리지

父曰太祚오 祖曰子游오 曾祖曰廣이니 並爲莫離支라」

홍무십사년오월십일 생

弘武十四年五月十日에 生하고

년구세 선위조의선인 의표웅위

年九歲에 選爲皂衣仙人하니 儀表雄偉하고

의기 호일 매여군오 열신이와

意氣豪逸하야 每與軍伍로 列薪而臥하고

수호이음 군언이진기 혼언이변미

手瓠而飮하며 群焉而盡己하고 混焉而辨微하야

상사 필분급 성신주호

賞賜를 必分給하며 誠信周護하야

유추심치복지아량 지유위지경천지재

有推心置腹之雅量하며 至有緯地經天之才하니

인개감복 무일인이회자야

人皆感服하야 無一人異懷者也러라.

연 용법엄명 귀천일률 약유범자

然이나 用法嚴明하야 貴賤一律하고 若有犯者면

일무가차 수당대난

一無假借하며 雖當大難이라도

소불경심 여당사수언 역불굴지

少不驚心하며 與唐使酬言호대 亦不屈志하야

상이자족음해 위소인 능적당인 위영웅

常以自族陰害로 爲小人하며 能敵唐人으로 爲英雄이라

희언이하천가근 노언이권귀구진

喜焉而下賤可近이오 怒焉而權貴俱진하니

진일세지쾌걸야

眞一世之快傑也니라

자언생어수중 능잠영경일 우건불피

自言生於水中하야 能潛泳竟日이라도 尤健不疲라 하니

중 함경복지 나배왈

衆이 咸驚伏地하야 羅拜曰

창해용신 부위화신의

滄海龍神이 復爲化身矣라 하니라

소문 기방고성제

蘇文이 旣放高成帝하고

여중 공영고장 시위보장제

與衆으로 共迎高臧하니 是爲寶臧帝시니라

소문 기득지 행만법위공지도

蘇文이 旣得志에 行萬法爲公之道하야

성기자유 개물평등

成己自由하고 開物平等하며

삼홀위전 조의유율

三忽爲佺하고 皂衣有律하니라.

<해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이고, 선조는 봉성(봉황산 아래쪽)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태조(연태조),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부는 광이고 나란히 막리지를 지냈다. 연개소문은 홍무 14년(26세 영양제, 단기 2936, 603) 5월 10일에 태어났고 아홉 살에 조의선인(三郞仙人)에 뽑혔다. 몸가짐이 웅장하고 훌륭하였고 의기가 장하고 호탕했다.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나란히 누워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하사 받은 상은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고 상대방의 진심어린 마음을 헤아려서 거두어 품어 주는 아량이 있었다. 또한 온 천하를 잘 계획하여 다스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다 감복하였고 딴 마음을 품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법을 운용할 때는 엄격하고 명백히 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다스렸다. 만약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비록 큰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눌 때에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항상 자기 겨레를 음해하는 자를 소인이라 여기고, 당나라 사람을 능히 대적하는 자를 영웅으로 여겼다. 기뻐할 때는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지만,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도 모두 두려워하니 진실로 일세를 풍미한 시원스러운 호걸이었다. 연개소문이 스스로 말하기를, “물 속에서 태어나서 종일 물에 잠겨 헤엄쳐도 더욱 기력이 솟고 피로한 줄 모른다”하니, 무리가 모두 놀라서 땅에 엎드려 절하며, “창해의 용신이 다시 화신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연개소문이 고성제(27세 영류제)를 내쫓고 무리와 함께 고장을 맞이하였다. 이분이 보장제(28세, 단기 2975, 642~단기 3001, 668)이시다. 연개소문이 드디어 뜻을 이루자, 모든 법을 공정무사한 대도로 집행하였다. 이로써 자신을 성취하여 자신의 주인이 되고, 만물의 이치를 깨쳐 차별이 없게 되었다. 또한 세 마을에 전을 두고 조의선인들에게 계율을 지키게 하였다.


❖중국 낙양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큰아들 남생의 묘지에는 “남생의 증조부 자유와 조부 태조가 모두 막리지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6. 고조선 땅 회복을 위한 외교 정책

주력국방 비당심성 선여백제상좌평

注力國防하야 備唐甚盛할새 先與百濟上佐平으로

구존입의 우청신라사김춘추 관어사저왈

俱存立義하며 又請新羅使金春秋하야 舘於私邸曰

당인 다패역 근어금수 청오자

唐人이 多悖逆하야 近於禽獸하니 請吾子하노니

수망사구 자금삼국 서족합력

須忘私仇하고 自今三國이 叙族合力하야

직도장안 당추 기가금야

直屠長安이면 唐醜를 其加擒也라

전승지후 잉구지이연정 인의공치

戰勝之後에 仍舊而聯政하야 仁義共治오

이약상물침 위영구준수지계 하여

而約相勿侵하야 爲永久遵守之計가 何如오

권재삼 춘추 종불청 석재

勸再三호대 春秋가 終不聽하니 惜哉로다.

<해설>

연개소문은 국방에도 힘써 당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에 대비하였다. 먼저 백제 상좌평(성충)과 양국이 병존할 수 있는 방안을 세웠다. 또 신라 사신 김춘추를 청하여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고 이렇게 말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도의에 어긋나고 불순하여 짐승에 가깝소. 그대에게 청하노니, 모름지기 사사로운 원한은 잊어버리고 이제부터 핏줄이 같은 우리 삼국 겨레가 힘을 모아 곧장 장안을 무찌른다면, 당나라 괴수(아버지를 쫓아내고, 형과 아우를 죽인 자)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승리한 후에는 우리 옛 영토에 연합 정권을 세워 함께 인의로 다스리고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하여 그것을 영구히 지켜 나갈 계책으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소?” 이렇게 두 번, 세 번 권유하였으나, 김춘추가 끝내 듣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17.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대침략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격돌

개화사년 당주이세민 위군신왈

開化四年에 唐主李世民이 謂群臣曰

요동 본제하지지 수씨 사출사이불능득

遼東은 本諸夏之地어늘 隋氏가 四出師而不能得하니

여금출병 욕위보제하자제지수

予今出兵은 欲爲報諸夏子弟之讐라 하고

세민 친패궁시 솔이세적 정명진등수십만

世民이 親佩弓矢하고 率李世勣.程名振等數十萬하야

도요택 이뇨이백여리 인마 불가통

到遼澤하니 泥淖二百餘里에 人馬가 不可通이라

도위마문거 책마분격 기합전

都尉馬文擧가 策馬奔擊하야 旣合戰이러니

행군총관장군차 대패 이도종 수산군

行軍總管張君叉가 大敗하니 李道宗이 收散軍하고

세민 자장수백기 여세적 회

世民이 自將數百騎하야 與世勣으로 會하야

공백암성서남 성주손대으므 사견청항

攻白岩城西南하니 城主孫代音이 詐遣請降이나

이실 욕승극반격

而實은 欲乘隙反擊이라.

<해설>

개화 4년(28세 보장제, 단기 2978, 645)에, 당나라 왕 이세민이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요동은 본래 우리 중국 땅이다. 수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그곳을 얻지 못하였다. 내가 이제 출병하여 우리 자제들의 원수를 갚고자 하노라.” 이에 세민이 친히 활과 화살을 메고 이세적, 정명진 등 수십만을 거느리고 요택에 이르렀다. 진창이 200여 리나 되어 인마가 통과할 수 없었다. 도위 마문거가 채찍으로 말을 치며 돌진하여 맞붙어 싸웠고, 행군총관 장군차가 대패하니 이도종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다. 세민이 스스로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세적과 합세하여 백암성 서남쪽을 공격하였다. 성주 손대음이 거짓으로 사람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으나 실은 빈틈을 타서 반격하려는 것이었다.


❖이세적(594~669):당나라의 장수, 본성은 徐, 일찍이 수나라 군웅 가운데 한 사람인 이밀의 부하로 있다가 당나라에 망명하였다. 당고조의 신임을 얻어 여주 총관이 되고 이씨 성을 하사 받았다. 이정과 함께 당태종 때 무장의 쌍벽이라 불린다.

❖요택: 당태종이 고구려 군에게 쫓겨 사경을 헤매었다는 진흙탕 길로, 황하의 북쪽 지류 왼쪽 지역이다. 지금의 하북성 천진 일대.

❖백암성: 갈석산 밑에 있고, 당나라 때는 암주라 하였다


안시성 공방전

세민 지안시성 선자당산

世民이 至安市城하야 先自唐山으로

진병공지

進兵攻之라

북부욕살고연수 남부욕살고혜진 솔관병

北部褥薩高延壽와 南部褥薩高惠眞이 率官兵과

급말갈병십오만 인지직전 연안시위루

及靺鞨兵十五萬하야 引至直前하고 連安市爲壘하야

거고산지험 식성중지속 종병약기군마

據高山之險하며 食城中之粟하야 縱兵掠其軍馬하니

당노불감범 욕귀 즉이뇨위조 좌곤필패

唐奴不敢犯이오 欲歸나 則泥淖爲阻하야 坐困必敗라

연수 인군직전이진 요거안시사십리

延壽가 引軍直前以進하니 料去安市四十里라

견인 문어대로고정의 이기연로습사야

遣人하야 問於對盧高正義하니 以其年老習事也라.

정의왈세민 내삼군웅 화가위국 역불범상

正義曰世民이 內芟群雄하야 化家爲國하니 亦不凡常이라

금거전당지병이래 기에 불가경야

今據全唐之兵而來하니 其銳를 不可輕也라

위오계자 박약돈병부전 광일지구

爲吾計者는 莫若頓兵不戰하고 曠日持久하야

분견기병 단기양도 양도기진

分遣奇兵하야 斷其糧道니 糧道旣盡이면

구전부득 욕귀무로 내가승야

求戰不得이오 欲歸無路리니 乃可勝也라.

연수 종기계 적래즉거 적거즉지

延壽가 從其計하야 賊來則拒하고 賊去則止하며

우견기병 분탈양로

又遣奇兵하야 焚奪糧路하니

세민 백게유지이회 면종이내위

世民이 百計誘之以賄나 面從而內違하야

삭견음습함렬 적지사상 혹다

數遣陰襲陷裂하니 賊之死傷이 酷多라.

<해설>

세민이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으로부터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북부 욕살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이 관병과 말갈 군사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에 도착하여, 주저없이 바로 앞으로 나아가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작은 성)를 쌓고 높은 산의 험준한 곳을 차지하였다. 성중의 곡식을 먹으면서 군사를 풀어 당나라 군마를 빼앗았다. 당나라 군사가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돌아가려 해도 진창에 가로막혀 그냥 주저앉아 괴로워하며 패할 수 밖에 없었다. 연수가 군사를 이끌고 곧장 전진하여 안시성과 40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어 대로 고정의에게 대책을 물었다. 이는 고정의가 연륜이 깊어 일처리에 능숙하였기 때문이었다. 정의가 대답하였다. “세민이 안으로는 군웅을 제거하고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역시 범상한 인물이 아니오. 지금 모든 당나라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그 예봉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오. 우리 계책은 병력을 움직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 여러 날을 끌면서 기습부대를 나누어 보내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끊는 것이 가장 좋소. 양식이 떨어지면 싸울래야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이길 것이오.” 연수가 그 계책을 좇아 적이 오면 막고, 물러가면 움직이지 않았다. 또 기습 부대를 보내어 군량을 불태우고 빼앗았다. 세민이 온갖 계략으로 뇌물까지 쓰며 꾀었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고 속으로 거부하여 자주 군사를 내어 몰래 습격하고 함락시켜 흩어지게 하니 적군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요동 출병으로 천추에 한을 남긴 당태종

연수등 여말갈 합병위진 지구작전

延壽等이 與靺鞨로 合兵爲陣하고 持久作戰이라가

일야표변 급습전격

一夜豹變하야 急襲電擊하니

세민 기피위박 시유구색

世民이 幾被圍迫하야 始有懼色이라

세민 우부견사 회재보

世民이 又復遣使하야 懷財寶하고

위연수왈 아이귀국강신 시기군상고 내문죄

謂延壽曰 我以貴國强臣이 弑其君上故로 來問罪오

지어교전 입귀경 추속 불급고

至於交戰하야 入貴境에 蒭粟이 不給故로

간유분략기처이이 사귀국수례납교즉필복의

間有焚掠幾處而已오 俟貴國修禮納交則必復矣리라

연수왈낙 퇴귀병삼십리즉오장현제의

延壽曰諾다 退貴兵三十里則吾將見帝矣리라.

연 막리지 위국주석

然이나 莫離支는 爲國柱石이오

군법자재 불수다언

軍法自在하니 不須多言이오

여군세민 패부시형 음납제비

汝君世民은 廢父弑兄하고 淫納弟妃하니

차가문죄야 이차전지

此可問罪也라. 以此傳之어다

어시 사견독찰 익가수비 의산자고

於是에 四遣督察하야 益加守備하고 依山自固하야

승허기습 세민 백계무술

乘虛奇襲하니 世民이 百計無術하야

통한요동출병지불리 이이회무급언

通恨遼東出兵之不利나 而已悔無及焉이러라

<해설>

연수 등이 말갈병과 더불어 함께 진을 치고 지구전을 펴다가, 어느날 밤 돌변하여 번개같이 습격하니, 거의 포위를 당하게 된 세민이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세민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 재물과 보화로 달래며 연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귀국의 힘 있는 신하(연개소문)가 임금을 시해하였기로 이렇게 와서 죄를 묻는 것이다. 이제 귀국에 들어와 전쟁을 하는데 말 먹일 꼴과 식량을 공급할 수 없어 몇 곳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했을 뿐이다. 귀국이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린다면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이에 연수가 말하였다. “좋다. 그대들 군사가 30리를 물러 난다면 내가 장차 우리 황제(보장제)를 만나 뵈리라. 그러나 막리지는 우리나라의 주석이고, 군법이 있으니 여러 말이 필요 없다. 너희 임금 세민은 아버지를 폐하여 형을 죽이고, 음란하게도 아우의 아내를 취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가히 죄를 물을 만하다. 이대로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찰관을 보내어 수비에 더욱 힘쓰게 하고 산을 의지해 스스로 견고히 하고 적의 허점을 틈타 기습하였다. 세민이 온갖 꾀를 다 내어 보아도 아무 방법이 없었다. 요동으로 출병하여 전쟁에 진 것을 몹시 한탄하였으나,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중화사필中華史筆의 역사 왜곡: 위국휘치爲國諱恥

류공권소설 왈

柳公權小說에 曰

육군 위고구려소승 태장부진

「六軍이 爲高句麗所乘하야 殆將不振하고

후자고영공지휘 흑기피위 세민 대공

候者告英公之麾가 黑旗被圍라 한데 世民이 大恐이라」하니

수종자탈 이위구여피

雖終自脫이나 而危懼如彼어늘

신구당서 급사마공통감

新舊唐書와 及司馬公痛鑑에

불언자 기비위국휘치호

不言者는 豈非爲國諱恥乎아.

이세적 언어세민왈 건안 재남 안시 재북

李世勣이 言於世民曰 建安은 在南하고 安市는 在北하니

오군량 조이실수요동금창려

吾軍糧을 早已失輸遼東今昌黎이어늘

금유안시이공건안

今踰安市而功建安이라가

약고구려 단기수송 세필궁의

若高句麗가 斷其輸送이면 勢必窮矣리니

불약선공안시 안시하즉고행이취건안이

不若先攻安市니 安市下則鼓行而取建安耳로이다.

안시성인 망견세민기개

安市城人이 望見世民旗蓋하고

첩승성고조 태매세민 수기죄목 이고우중

輒乘城鼓譟하야 唾罵世民하고 數其罪目하야 以告于衆하니

세민 노기극심 이위함성지일 남녀 진갱지

世民이 怒氣極甚하야 以爲陷城之日에 男女를 盡坑之라 하니

안시성인 문지 익견수 공지불하

安市城人이 聞之하고 益堅守하야 功之不下러라.

시 장량병 재사비성 니욕소지미과 저회실기

時에 張亮兵이 在沙卑城이나 而欲召之未果하야 低回失機하고

장량 장이병 습오골성 반위관병소패

張亮은 將移兵하야 襲嗚骨城이라가 反爲官兵所敗라

이도종 역재조험부진

李道宗이 亦在遭險不振하니

어시 당노제장 의자상기 세적 독이위고구려

於是에 唐奴諸將이 議自相歧하야 世勣은 獨以爲高句麗가

경국구안시 불약사안시이직도평양

傾國救安市하니 不若捨安市而直擣平壤이라 하고

장손무기 이위천자친정

長孫無忌가 以爲天子親征은

이어제장 불가승위요행

異於諸將하야 不可乘危僥幸이니

금건안신성지적중 수십만

今建安新城之敵衆이 數十萬이오

고연수소솔말갈 역수십만

高延壽所率靺鞨이 亦數十萬이니

국내성병 약우회오골성 이차낙랑제로지험

國內城兵이 若又回烏骨城하야 而遮樂浪諸路之險이면

여시즉피세일성 급어박위 이아완적

如是則彼勢日盛하야 急於迫圍오 而我翫敵이라가

회무급언 불여선공안시 차취건안연후

悔無及焉하리니 不如先攻安市하고 次取建安然後에

장구이진 차만전지계야 미지결

長驅而進이 此萬全之計也라 하야 未之決이라.

안시성주양만춘 문지 승야심

安市城主楊萬春이 聞之하고 乘夜深하야

이수백정예 추성이하

以數百精銳로 縋城而下하니

적진 자상천답 살상심다

敵陣이 自相踐踏하야 殺傷甚多라

세민 사이도종 축토산어성동남우

世民이 使李道宗으로 築土山於城東南隅러니

관병 종성결출격 수탈토산

官兵이 從城缺出擊하야 遂奪土山하고

참이수지 군세익진 당노제진 태실전의

塹而守之하야 軍勢益振하니 唐奴諸陣이 殆失戰意라

부복애 이전패 참 도종이하 개도선청죄

傅伏愛는 以戰敗로 斬하고 道宗以下는 皆徒跣請罪라.

<해설>

류공권의 소설에, “당나라 6군은 고구려가 세를 타게 되자 장수들이 전공을 떨치지 못하였고, 척후병이 와서 영공(이세적-이적)의 군기가 흑기에 포위당했다고 보고하니, 세민이 크게 두려워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이세민이 비록 끝내 탈출하였으나 위태롭고 두려워함이 이러하였던 것이다. 『신.구당서』와 사마공의 『통감』에 이러한 사실을 적지 않은 것은, 어찌 자기 나라를 위해서 수치스런 일을 숨기려 한 것 아니겠는가? 이세적이 세민에게 말하기를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쪽에 있습니다. 아군의 군량은 이미 요동(지금의 창려)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를 넘어 건안을 치다가 만약 고구려가 군량을 수송하는 길을 끊는 다면 대세가 반드시 궁하게 될 것이니 먼저 안시를 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안시가 함락되면 북을 두드리며 여유있게 가서 건안을 뺏앗으면 될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멀리서 세민의 깃발과 일산을 바라보고 성에 올라 북을 치고 고함을 질렀다. 침을 뱉으며 세민을 욕하고 죄목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군중에게 고하니 세민이 노기가 극도에 달하여, 성이 함락되는 날에는 남녀 모두 생매장시킬 것이라 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건히 지키므로 공격을 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에 수군 제독 장량의 군사는 사비성(비사성)에 있었는데 그들을 부르려다 시행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에 기회를 잃고 말았다. 장량은 병력을 이동시겨 오골성을 습격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관병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도종 역시 험준한 길을 만나 군세를 떨치지 못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당나라 여러 장수의 의견이 서로 갈라졌다. 세적은 홀로 , ‘고구려는 나라의 온 힘을 기울여 안시성을 구하려 하니, 안시를 버리고 곧장 평양을 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장손무기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천자가 친히 정벌에 나섬은 여러 장수와는 달라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된다. 지금 건안.신성에 있는 적군의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거느린 말갈 군사 또한 수십만이다. 만약 국내성 군사가 오골성을 돌아서 낙랑의 여러 길의 험한 곳을 차단한다면 적의 세력은 날로 강해져서 우리를 포위하고 압박하여 급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적을 갖고 놀려고 하다가는 뉘우쳐도 소용없을 것이다. 먼저 안시를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그 다음에 멀리 적을 몰아 쫓으며 진격하는 것이 만전의 계책이다.’ 이 문제가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안시성주 양만춘이 그 사정을 듣고 야밤을 틈타 수백 명의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 공격하였다. 적진에서는 서로 짓밣혀 죽고 상처를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세민이 이도종을 시켜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흙으로 산을 쌓게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성 한 귀퉁이가 무너진 곳으로 나와 쳐서 드디어 토산을 빼앗았다. 거기에 참호를 만들어 지키니 군세를 더욱 떨쳤다. 이리하여 당나라 모든 진영은 싸울 생각을 거의 잃어버렸다. 부복애는 패전 책임으로 참수당하고, 도종과 그 부하들은 모두 맨발로 나아가 죄를 인정하고 처벌을 기다렸다.


양만춘의 대승

막리지 솔수백기 순주난파 상문정형

莫離支가 率數百騎하고 巡駐灤坡하야 詳問情形이오

견명총공사격 연수등 여말갈 협공

遣命總攻四擊할새 延壽等은 與靺鞨로 夾功하고

양만춘 등성독전 사기익분 무불일당백의

楊萬春은 登城督戰하니 士氣益奮하야 無不一當百矣라

세민 분부자승 감출결전

世民이 憤不自勝하야 敢出決戰이나

양만춘 내호성장궁 세민 출진

楊萬春이 乃呼聲張弓하야 世民이 出陣이라가

시부반공 수위소중 좌목몰언

矢浮半空하니 遂爲所中하야 左目沒焉이라

세민 궁무소조 종간도둔

世民이 窮無所措하야 從間逃遁할새

명세적도종 장보기수만 위전

命世勣道宗하야 將步騎數萬하야 爲殿하니

요택이뇨 군마난행

遼澤泥淖하야 軍馬難行이라

명무기 장만인 전초전도

命無忌하야 將萬人하야 剪草塡道하고

수심처 이거위량

水深處는 以車爲梁하고

세민 자계신어마초 이조역

世民이 自繫薪於馬鞘하야 以助役하니라

동시월 지포오거 주마 독전도

冬十月에 至蒲吾渠하야 駐馬하고 督塡道하며

제군 도발착수 폭풍설 점습

諸軍이 渡渤錯水할새 暴風雪이 占濕하야

사졸 다사자 사연화어도 이대지

士卒이 多死者어늘 使燃火於道하야 以待之라.

<해설>

막리지(연개소문)가 기마병 수백을 거느리고 순시하다가 난하 언덕에서 멈추고 전황을 자세히 물은 뒤에, 사방에서 총공격하라고 명하였다. 연수 등이 말갈 군사와 함께 양쪽에서 협공하고, 양만춘이 성에 올라 싸움을 독려하니 사기가 더욱 높아져서, 하나가 백을 당하는 용맹스러움을 보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세민이 스스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감히 나서서 결판을 내려 하였다. 이때 양만춘이 소리를 지르며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세민이 진을 나서다가 공중을 가르며 날아온 화살에 적중되어 왼쪽 눈이 빠져 버렸다. 세민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 달아나며,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기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후군으로 따르게 하였다. 요택에 이르자 진창 때문에 군마의 행군이 어려워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서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세민 자신도 스스로 말채찍으로 땔나무를 묶어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 메우는 일을 독려 하였다. 모둔 군사가 발착수를 건널 때에 거센 눈보라가 몰아쳐 군사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았다. 이에 길에 불을 피우게 하고 기다렸다.


연개소문의 장안長安 입성과 환단桓檀이래 실지失地 회복

시 막리지연개소문 승승장구 추지심급

時에 莫離支淵蓋蘇文이 乘勝長驅하야 追之甚急하니

추정국 자적봉 지하간현 양만춘 직향신성

鄒定國은 自赤峰으로 至河間縣하고 楊萬春은 直向新城하야

군세대진 당노다기갑병이주 방도역수

軍勢大振하니 唐奴多棄甲兵而走하야 方渡易水라

시 막리지 명연수 개축용도성 금고려진야

時에 莫離支가 命延壽하야 改築桶道城하니 今高麗鎭也라

우분견제군 일군 수요동성 금창려야

又分遣諸軍하야 一軍은 守遼東城하니 今昌黎也오

일군 근수세민 일군 수상곡 금대동부야

一軍은 跟隨世民하고 一軍은 守上谷하니 今大同府也라.

어시 세민 궁무소조 내견인걸항

於是에 世民이 窮無所措하야 乃遣人乞降하니

막리지 솔정국만춘등수만기

莫離支가 率定國萬春等數萬騎하야

盛陣儀仗하고 鼓吹前導하야 入城長安하야

여세민 약 산서 하북 산동 강좌 실속어아

與世民으로 約하니 山西.河北.山東.江左가 悉屬於我라.

<해설>

이때 막리지 연개소문이 싸움에 이긴 김에 계속 휘몰아쳐서 급히 이들을 뒤쫓았다. 추정국은 적봉에서 하간현에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을 향하며 군세를 크게 떨쳤다. 많은 당나라 군사가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 바아흐로 역수를 건너려 하였다. 이때 막리지가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하게 하였는데, 용도성은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전군을 나누어 보내되, 일군은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그곳은 지금의 창려이고, 일군은 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은 상곡을 지키게 하니 상곡은 지금의 대동부이다. 이에 세민이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받아 달라고 애걸하였다. 막리지가 정국.만춘 등의 기병 수만을 거느리고 성진의장 고취전도 입성장안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어 북 치고 나팔 부는 군악대를 앞세우고 장안에 입성하였다. 세민과 더불어 약정하여, 산서성.하북성.산동성.강좌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세적(594~669):당나라의 장수, 본성은 徐, 일찍이 수나라 군웅 가운데 한 사람인 이밀의 부하로 있다가 당나라에 망명하였다. 당고조의 신임을 얻어 여주 총관이 되고 이씨 성을 하사 받았다. 이정과 함께 당태종 때 무장의 쌍벽이라 불린다.

❖요택: 당태종이 고구려 군에게 쫓겨 사경을 헤매었다는 진흙탕 길로, 황하의 북쪽 지류 왼쪽 지역이다. 지금의 하북성 천진 일대.

❖백암성: 갈석산 밑에 있고, 당나라 때는 암주라 하였다.

사료에 근거한 요동10성


18. 중국 본토까지 뻗었던 백제, 신라의 영토

선시 고구려 여백제 외경구존 요서지

先是에 高句麗가 與百濟로 外競俱存하니 遼西地에

유백제소령왈요서진평 강남 유월주 기속현

有百濟所領曰遼西晉平이오 江南에 有越州하니 其屬縣은

일왈산음 이왈산월 삼왈좌월

一曰山陰이오 二曰山越이오 三曰左越이러니

지문자제명치십일년십일월 공취월주

至文咨帝明治十一年十一月하야 功取越州하고

개서군현 왈송강 회계 오성 좌월 산월 천주

開署郡縣하니 曰松江.會稽.吳城.左越.山越.泉州오

십이년 이신라민어천주 이실지

十二年에 移新羅民於泉州하야 以實之라

시세 이백제불공 견병공취요서진평등군

是歲에 以百濟不貢으로 遣兵攻取遼西晉平等郡하니

백제군 폐

百濟郡이 廢하니라.

<해설>

이보다 먼저 고구려는 백제와 밖에서 서로 경쟁하며 공존하였다. 요서 땅에 백제의 영지가 있었는데, 곧 요서.진평이고,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으니, 여기에 소속된 현은 첫째 산음, 둘째 산월, 셋째 좌월이다. (21세 문자제)명치 11년(단기 2834, 501)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쳐서 취하고 군현의 이름을 바꾸어 송강.회계.오성.좌월.산월.천주라 하였다. 명치 12년(단기 2835, 502)에 신라 백성을 천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이 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므로 군대를 보내어 요서.진평 등의 군을 쳐서 빼앗으니 백제군이 없어지고 말았다.


❖요서군: 중국 본토에 있던 백제 식민지. 요서군은 지금의 하북성 난하(당시의 요수) 서쪽 하북성 일대에 있었고, 약 200년간 백제가 통치하였다.

❖월주: 지금의 절강성 소홍현이다.

❖산음: 秦나라때 설치한 현으로, 수나라때 폐하여 회계현에 귀속되었다가 지금은 회계현과 함께 절강성 소홍현이 되었다.

❖송강: 지금의 上海

❖천주: 지금의 복건성 福州 서남쪽.『晉書』「지리지」에는 진안군에 속한 현 가운데 신라현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으므로 본문의 이 내용을 입증한다.


연개소문淵蓋蘇文에 대한 왕개보王介甫의 인물평

왕개보왈 연개소문 비상인야 과연

王介甫曰 淵蓋蘇文은 非常人也라 하니 果然이로다.

막리지 재즉고구려 여백제 구존

莫離支가 在則高句麗가 與百濟로 俱在하고

막리지 거즉백제 여고구려 구망

莫離支가 去則百濟가 與高句麗로 俱亾하니

막리지 역인걸야재

莫離支는 亦人傑也哉로다.

막리지 임종 고위남생남건왈

莫離支가 臨終에 顧謂男生男建曰

이형제 재지여수 속전즉강 분전즉절

爾兄弟는 愛之如水하라 束箭則强하고 分箭則折하나니

수무망차장사지언 이소어천하인국지인

須無忘此將死之言하야 貽笑於天下隣國之人하라

시즉개화십육년시월칠일야

時則開化十六年十月七日也오

때는 개화 16년(28세 보장제, 단기 2990, 657) 10월 7일이었다.

묘 재운산지구봉산야

墓는 在雲山之九峰山也라.

<해설>

왕개보가 이렇게 말했다. “연개소문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 하더니 과연 그렇다. 막리지(연개소문)가 살아 있을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건재하였으나, 막리지가 세상을 뜨자(657년)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망하였으니, 막리지는 역시 걸출한 인물이로다.” 막리지가 임종에 남생,남건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형제는 사랑하기를 물과 같이 하여라. 화살을 묶으면 강하고 나누면 꺽어지나니, 부디 이 유언을 잊지 말고 천하 이웃 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여라.” 묘는 운산(평안북도)의 구봉산에 있다.


❖왕개보:(1021~1086):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송나라 때 문필가이자 정치가인 왕안석을 말한다. 자는 개보, 호는 半山이다.

❖남건: 연개소문의 둘째 아들. 아우 남산과 함께 대막리지인 형 남생을 몰아내고 대막리지가 되었다. 형제간에 일어난 세력 쟁탈전은 고구려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19. 요동과 요서의 고구려 영토

고려진 재북경안정문외육십리허

高麗鎭은 在北京安定門外六十里許하고

안시성 재개평부동북칠십리 금탕지보

安市城은 在開平府東北七十里하니 今湯池堡오

고려성 재하간현서북십이리

高麗城은 在河間縣西北十二里하니

개태조무열제소축야

皆太祖武烈帝所築也라.

<해설>

고려진은 북경 안정문 밖 60리쯤에 있다. 안시성은 개평부 동북쪽 70리에 있는데, 지금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 서북쪽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 무열제(6세, 단기 2386, 53~단기 2479, 146)께서 쌓으신 것이다.


이방인이 노래한 고려성의 옛 추억

당번한 유고려성회고시일수 전어세

唐樊漢이 有高麗城懷古詩一首하야 傳於世하니

기시 왈

其詩에 曰

벽지성문벽 운림치첩장

僻地城門闢하니 雲林雉堞長이라.

수명유만조 사암촉성광

水明留晩照오 沙暗燭星光이라.

첩고연운기 신화불지장

疊鼓連雲起하고 新花拂地粧이라.

거연조시변 무부관현장

居然朝市變하야 無復管絃鏘이라.

형극황진리 호봉고도방

荊棘黃塵裡오 蒿蓬古道傍이라.

경진매비취 항롱상우양

輕塵埋翡翠오 荒隴上牛羊이라.

무내당년사 추성숙안행

無奈當年事하니 秋聲肅鴈行이라.

여수불문 추기운이차지 왈

予雖不文이나 追其韻而次之하니 曰

요서상존고성허 상필명방운조장

遼西尙存古城墟하니 想必名邦運祚長이리라.

연수층희다전색 요하탕양공천광

燕峀층巇多戰色이오 遼河湯漾共天光이라.

풍림공곡연무태 선금고수욕제장

風林空谷演舞態하고 仙禽高樹欲啼粧이라.

간모관방일석변 호매진령문처장

干旄關防一夕變하야 呼賣振鈴聞凄鏘이라

연량원래진아유 관병구진음마방

燕凉元來盡我有오 官兵久鎭飮馬傍이라.

영웅부작시사거 무부구적여구양

英雄不作時事去하니 無復驅敵如驅羊이런가.

금아조고무한의 위신핵랑만리행

今我조古無限意를 爲贐核郞萬里行하노라.

<해설>

당나라 사람 번한이 「고려성 회고시」한 수를 지어 세상에 전하니 이러하다. 외진 땅에 성 문은 열리고 구름 숲 속 성 위에 담장은 길게 이어졌네 물은 맑아 저녁 노을 반짝이고 어둠 깃든 모래 땅엔 별빛이 비치네 북소리 둥둥 울리니 구름도 따라 일고 새로 핀 고운 꽃은 흙을 털고 단장했네 슬구머니 하루아침에 저자거리로 바뀌어 피리.나팔 소리 다시 들을 길 없어라. 누런 흙먼지 속 무성한 가시나무, 옛 길 옆에는 쑥대만 우거져 있네. 무상한 세월의 티끌 아름답던 비취 묻어 버렸고 거친 언덕에 소와 양이 오르는구나. 화려하던 옛 시절 이미 사라졌는데 깊어가는 가을 소리에 기러기만 날아가누나. 내가 비록 글재주는 없으나 그 운을 따라 한 수 읊는다. 요서에 옛 성터 아직 남아 있으니 생각건대 명성 높은 나라의 운수 틀림없이 길었으리. 연나라 험한 산에 전쟁도 많았지만 요하의 도도한 물결은 하늘빛 같네. 바람 불어 나무는 빈 골짜기에서 춤추고 학은 자태를 꾸미며 높은 나무에서 우는구나. 변방 지키던 방패와 깃발 하루저녁에 바뀌어 값을 외치는 장사꾼 방울소리 처량하게 들리네. 연(하북.산서)과 양(감숙)은 본래 우리 땅이니 관병이 오래도록 지키며 말 먹이던 곳이자. 영웅은 다시 오지 않고 그때 일은 아득하니 양떼 내몰 듯 도둑떼 몰아낼 날 다시 없을런가. 이제 와 옛일 한없이 슬퍼하는 이 내 마음 만리 길 떠나는 핵랑의 노자로나 쓰시게.


20. 요서遼西 지방에 십성十城을 구축함

조대기 왈

朝代記에 曰

태조융무삼년 축요서십성 이비한

「太祖隆武三年에 築遼西十城하사 以備漢하시니

십성 일왈안시 재개평부동북칠십리

十城은 一曰安市니 在開平府東北七十里오

이왈석성 재건안서오십리

二曰石城이니 在建安西五十里오

삼왈건안 재안시남칠십리

三曰建安이니 在安市南七十里오

사왈건흥 재난하서

四曰建興이니 在灤河西오

오왈요동 재창려서남경

五曰遼東이니 在昌黎西南境이오

육왈풍성 재안시서북일백리

六曰豐城이니 在安市西北一百里오

칠왕한성 재풍성남이백리

七曰韓城이니 在豐城南二百里里오

팔왈옥전보 구요동국 재한성서남육십리

八曰玉田堡니 舊遼東國이니 在韓城西南六十里오

구왈택성 재요택서남오십리

九曰澤城이니 在遼澤西南五十里오

십왈요택 재황하북류좌안

十曰遼澤이니 在黃河北流左岸이라

오년춘정월 우축백암성용도성

五年春正月에 又築白岩城桶道城하시니라.」

삼한비기 왈 구지 운 요서 유창료현

三韓秘記에 曰「舊志에 云 遼西에 有昌遼縣하니

당시 개요주 남유갈석산이기하즉백암성

唐時에 改遼州하고 南有碣石山而其下則白岩城이니

역당시소위암주 즉차야

亦唐時所謂岩州가 卽此也라

건안성 재당산경내 기서남위개평 일운개평

建安城은 在唐山境內하고 其西南爲開平이오 一云蓋平이니

당시 역칭개주 시야

唐時에 亦稱蓋州가 是也라.」

자치통감 왈 현도군 재유성노룡지간

自治通鑑에 曰 「玄도郡은 在柳城盧龍之間하니

한서 마수산 재유성서남 당시 축토성

漢書에 馬首山이 在柳城西南이오 唐時에 築土城이라」하니라.

<해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조 융무 3년(6세 태조 무열제, 단기 2388, 55)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셨다. 그 10성은 이러하다. 첫째는 안시성이니, 개평부에서 동북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둘째는 석성이니,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셋째는 건안성이니,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넷째는 건흥성이니, 난하의 서쪽에 있고, 다섯째는 요동성이니 ,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여섯째는 풍성이니, 안시성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일곱째는 한성이니, 풍성에서 남쪽으로 2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여덟째는 옥전보이니, 옛날의 요동국으로 한성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아홉째는 택성이니, 요택성에서 서남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열째는 요택성이니, 황하 북류의 왼쪽 언덕에 있다. 융무 5년(단기 2390, 57) 봄 정월에, 또 백암성과 용도성을 쌓으셨다. 『삼한비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구지」에 말하기를 , 요서에 창료현이 있는데, 당나라 때 요주로 고쳤다. 그곳 남쪽에 갈석산이 있고, 그 아래가 곧 백암성이다. 당나라 때에 암주라 부른 곳이 이곳이다. 건안성은 당산 경계 안에 있고, 그 서남은 개평인데 일명 개평이라 하였으니, 당나라 때 개주는 이곳이다. 『자치통감』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현도군은 유성과 노룡 사이에 있다. 『한서』에 ‘마수산이 유성 서남에 있는데 당나라 때 여기에 토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21. 고구려의 개국 공신 연타발延佗渤

연타발 졸본인 내왕어남북갈사이아재치부

延佗渤은 卒本人이니 來往於南北曷思而理在致富하야

지누거만 음조주몽 기창기입도지공 거다

至累巨萬이라 陰助朱蒙하야 其創基立都之功이 居多라

후 솔중 전사구려하이고어염지리

後에 率衆하야 轉徙九黎河而賈漁鹽之利러니

급고주몽성제 벌북옥저 납곡오천석

及高朱蒙聖帝가 伐北沃沮하실새 納穀五千石하고

이도눌견이선자원납 초무유망 이근왕사

移都訥見而先自願納하야 招撫流亡하야 以勤王事하니

이공 득봉어좌원

以功으로 得封於坐原이오

이년팔십 몰 시 평락십삼년병신춘삼월야

而年八十에 歿하니 時는 平樂十三年丙申春三月也라.

지누거만 음조주몽 기창기입도지공 거다

至累巨萬이라 陰助朱蒙하야 其創基立都之功이 居多라

후 솔중 전사구려하이고어염지리

後에 率衆하야 轉徙九黎河而賈漁鹽之利러니

급고주몽성제 벌북옥저 납곡오천석

及高朱蒙聖帝가 伐北沃沮하실새 納穀五千石하고

이도눌견이선자원납 초무유망 이근왕사

移都訥見而先自願納하야 招撫流亡하야 以勤王事하니

이공 득봉어좌원

以功으로 得封於坐原이오

이년팔십 몰 시 평락십삼년병신춘삼월야

而年八十에 歿하니 時는 平樂十三年丙申春三月也라.

<해설>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 갈사를 오가면서 이재를 잘하여 부자가 되어 엄청난 돈을 모았는데 남 몰래 주몽을 도와 창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도읍을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 물고기와 소금을 사고 팔아 이익을 얻었다. 고주몽 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 양곡 5천 석을 바쳤다. 눌견으로 도읍을 옮길 때 연타발이 먼저 양곡을 자원하여 바치고 떠도는 백성을 불러 모아 이루만져 위로하며 임금의 일을 부지런히 도왔다. 그 공덕으로 좌원에 봉토를 얻었다. 여든에 죽으니, 때는 평락 13년(단기 2309, BCE 25) 병신년 봄 3월이었다. 엄청난 돈을 모았는데 남 몰래 주몽을 도와 창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도읍을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 물고기와 소금을 사고 팔아 이익을 얻었다. 고주몽 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 양곡 5천 석을 바쳤다. 눌견으로 도읍을 옮길 때 연타발이 먼저 양곡을 자원하여 바치고 떠도는 백성을 불러 모아 이루만져 위로하며 임금의 일을 부지런히 도왔다. 그 공덕으로 좌원에 봉토를 얻었다. 여든에 죽으니, 때는 평락 13년(단기 2309, BCE 25) 병신년 봄 3월이었다.


22. 백제의 시조와 건국 과정

소서노召西弩와 두 아들의 자립

고주몽 재위시 상언왈

高朱蒙이 在位時에 嘗言曰

약적자유리래 당봉위태자

若嫡子琉璃來면 當封爲太子라 하야시늘

소서노 여장불리어이자

召西弩가 慮將不利於二子라 하야

세경인삼월 인인득문패대지지비물중

歲庚寅三月에 因人得聞浿帶之地肥物衆하고

남분지진번지간근해벽지

南奔至辰番之間近海僻地하니라.

<해설>

고주몽 성제가 재위하실 때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만약 적자 유리가 오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소서노는 장차 자신의 두 아들(비류와 온조)에게 이롭지 못할 것을 염려하다가, 경인(단기 2292, BCE 42)년 3월에 사람들에게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달려가 진.번(옛 진한과 번한)사이에 있는 바다 가까운 외진 땅에 이르렀다.


소서노의 어하라於瑕羅 피봉被封과 비류沸流의 계승

이거지십년 매전치장 치부누만

而居之十年에 買田置庄하야 致富累萬하니

원근 문풍 내부자중

遠近이 聞風하고 來附者衆이러니

남지대수 동빈대해 반천리지토경 개기유야

南至帶水하고 東濱大海하야 半千里之土境이 皆其有也라

견인치서우주몽제 원이내부

遣人致書于朱蒙帝하야 願以內附어늘

제심열이장지 책호소서노 위어하라

帝甚悅而獎之하시고 冊號召西弩하사 爲於瑕羅시라

급지십삼년임인이훙 태자비류 입

及至十三年壬寅而薨하고 太子沸流가 立하니

사경 불부

四境이 不附라.

<해설>

그곳에 산 지 10여년 만에 밭을 사서 장원을 두고 재산을 모아 수만 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따르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 대수에 이르고 동으로 큰 바다에 닿은, 5백리 되는 땅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 그리고 주몽제에게 사람을 보내어 글을 올려, 섬기기를 원한다고 했다. 임금께서 매우 기뻐서 칭찬하시고 소서노를 책봉하여 어하라라는 칭호를 내리셨다. (어하라 재위) 13년 임인(단기 2315, BCE 19)년에 이르러 소서노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온조의 백제 건국

어시 마려등 위온조왈

於是에 馬黎等이 謂溫祚曰

신 문마한 쇠패입지 내가왕입도지시야

臣이 聞馬韓이 衰敗立至하니 乃可往立都之時也니이다

온조왈 낙 내편주도해이시저마한미추홀

溫祚曰 喏다 乃編舟渡海而始抵馬韓彌鄒忽하니

행지사야 공무거인 구이득도한산

行至四野에 空無居人이라 久而得到漢山하야

등부아악이망가거지지 마려오간등십신 왈

登負兒岳而望可居之地할새 馬黎烏干等十臣이 曰

유차하남지지 북대한수 동거고악

惟此河南之地는 北帶漢水하고 東據高岳하고

남계옥택 서조대해 차천험지리난득지세

南開沃澤하고 西阻大海하니 此天險地利難得之勢라

의가도어차 갱불가타구야

宜可都於此오 更不可他求也하소서 한 대

온조 종십신의 수정도우하남위지성

溫祚가 從十臣議하야 遂定都于河南慰支城하고

잉칭백제 이백제래고 득호야

仍稱百濟하니 以百濟來故로 得號也라

후 비류 훙 기신면 이기지 귀부

後에 沸流가 薨하니 其臣民이 以其地로 歸附하니라.

<해설>

이때 마려 등이 온조에게 이르기를 “신이 듣기로 마한의 쇠망이 임박하였다 하니 가서 도읍을 세울 때라 생각하옵니다”하니 온조가 “좋다”라고 하였다. 이에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먼저 마한의 미추홀(지금의 인천 부근)에 이르러 사방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오랜 뒤에 드디어 한산(지금의 서울)에 이르러 부아악(북악산)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그때 마려,오간 등 신하 열 명이 간하였다. “오직 이곳 하남땅은 북으로 한수를 끼고, 동으로 높은 산이 자리잡고, 남쪽으로 기름진 평야가 열리고 서쪽은 큰 바다(황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처럼 천연적으로 험준한 지형과 지리적인 이로움은 얻기가 쉽지 않은 형세이오니, 마땅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른 곳을 더 찾지 마옵소서.” 온조가 신하 열 명의 의견을 좇아 드디어 하남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백제(요서지방)에서 사람이 건너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뒤에 비류가 세상을 떠나자 그 신하와 백성이 그 땅을 바치며 복종했다.


❖부아악:『동국여지승람』에는 북악산이라 하였다.

❖하남 위지성: 하남 위례성, 위지성의 위치는 고대사에서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1,500년 동안 잊혀졌던 위지성은 최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서울 송파구의 풍납토성으로 밝혀지고 있다.


23. 신라의 기원과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혈통

사로시왕 선도산성모지자야

斯盧始王은 仙桃山聖母之子也라

석 유부여제실지여녀파소 불부이잉 위인소의

昔에 有夫餘帝室之女婆蘇가 不父而孕하니 爲人所疑하야

자눈수 도지동옥저 우범주이남하

自嫩水로 逃至東沃沮하고 又泛舟而南下하야

저지진한나을촌

抵至辰韓奈乙村하니

시 유소벌도리자 문지 왕수양어가

時에 有蘇伐都利者하여 聞之하고 往收養於家러니

이급년십삼 기억숙성 유성덕

而及年十三에 歧嶷夙成하야 有聖德이라

어시 진한육부 공존 위거세간

於是에 辰韓六部가 共存하야 爲居世干하니

입도서라벌 칭국진한 역왈사로

立都徐羅伐하고 稱國辰韓이오 亦曰斯盧라.


사로의 첫 임금(박혁거세)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적에 부여 황실의 딸 파소(고두막한의 딸)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또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의 나을촌에 이르렀다. 그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이 소식을 듣고 가서 아이를 집에 데려가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총명(기억歧嶷)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가 함께 받들어 거세간이 되었다. 서라벌에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진한이라 하였고, 사로라고도 하였다.


24. 왜倭와 고구려의 관계

구주九州 대마도對馬島는 본래 삼한三韓이 다스린 땅

임나자 본재대마도서북계 북조해

任那者는 本在對馬島西北界하니 北阻海하고

유치왈국미성 동서 각유허락 혹공혹반

有治曰國尾城이오 東西에 各有墟落하야 或貢或叛이러니

후 대마이도 수위임나소제고

後에 對馬二島가 遂爲任那所制故로

자시 임나 내대마전칭야

自是로 任那는 乃對馬全稱也라

자고 구주대마 내삼한분치지야

自古로 仇州對馬는 乃三韓分治之也오

본비왜인세거지

本非倭人世居地라

임나 우분위삼가라 소위가라자 수읍지칭야

任那가 又分爲三加羅하니 所謂加羅者는 首邑之稱也라.

자시 삼한 상쟁 세구불해 좌호가라 속신라

自是로 三汗이 相爭하야 歲久不解하니 佐護加羅는 屬新羅하고

인위가라 속고구려 계지가라 속백제 시야

仁位加羅는 屬高句麗하고 雞知加羅는 屬百濟가 是也라

<해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하여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다. 다스리는 곳을 국미성이라 했다. 동쪽과 서쪽 각 언덕에 마을이 있어 혹은 조공을 바치고 혹은 배반하였다. 뒤에 대마도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옛날부터 큐슈仇州와 대마도는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이 대대로 산 곳이 아니다. 임나가 또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는데, 이른바 가라라는 것은 중심이 되는 읍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三汗(삼가라의 왕)이 서로 다투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화해하지 못하였다. 좌호가라가 신라에 속하고, 신위가라가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가 백제에 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고구려의 식민지, 왜倭의 전 영역

영락십년 삼가라 진귀아

永樂十年에 三加羅가 盡歸我하니

자시 해륙제왜 실통어임나

自是로 海陸諸倭가 悉統於任那하야

분치십국 호위연정

分治十國하니 號爲聯政이라.

연 직할어고구려 비열제소명 부득자전야

然이나 直轄於高句麗하야 非烈帝所命이면 不得自專也니라.

<해설>

영락(광개토열제) 10년(단기 2733, 400)에 삼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큐슈)의 여러 왜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열 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직접 관할하였으므로 열제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삼국이 분할 통치한 대마도


아유타국은 어디인가?

아유타 삼국유사 이위서역운

阿踰佗는 三國遺事에 以爲西域云이나

이금고제고기즉아유타 금섬라운

而今考諸古記則阿踰佗는 今暹羅云하니

연즉아유타인 혹위대식소침축 도차이거여

然則阿踰佗人이 或爲大寔所侵逐하야 到此而居歟아.

이명유기 운

李茗留記에 云

고유백제상 해왕아유타 다득재보이귀

「古有百濟商하야 海往阿踰佗하야 多得財寶而歸할새

기인 종아이래왕 일우교밀야

其人이 從我而來往하야 日尤交密也라

연 기속 나불관병 다위인소제

然이나 其俗이 懦不慣兵하야 多爲人所制라」

<해설>

아유타는 『삼국유사』에서 서역(인도)이라 하였으나, 이제 모든 고기를 살펴보면 아유타는 지금의 섬라(태국)이다. 그렇다면 인도의 아유타인이 혹시 대식국의 침입을 받고 쫓겨나서 이곳(태국)에 이르러 살게 되었던 것일까? 이명의 『진역유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적에 백제 상인들이 바다로 아유타에 가서 재물과 보화를 많이 싣고 돌아올 때, 그곳 사람도 백제 사람을 따라 왕래하여 날로 교류가 친밀해졌다. 그러나 그 풍속이 겁이 많고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서 남의 제재를 많이 받았다.


신교神敎와 유불선儒佛仙의 정신 집대성: 다물흥방가 多勿興邦歌

우왈 평양 유을밀대 세전을밀선인소건야

又曰 「平壤에 有乙密臺하니 世傳乙密仙人所建也라」

을밀 안장제시 선위조의

乙密은 安臧帝時에 選爲皂衣하고

유공어국 본을소지후야

有功於國하니 本乙素之後也라

거가 독서습사 가영삼신

居家에 讀書習射하고 歌詠三神하며

납도수련 의용봉공 일세조의 기도삼천

納徒修練하고 義勇奉公하니 一世皂衣가 其徒三千이라

소도운집 제창다물흥방지가

所徒雲集하야 齊唱多勿興邦之歌하니

인차 가고기사신전의지풍자이

因此하여 可鼓其捨身全義之風者耳라

기사 왈

其歌에 曰

선거자위법혜 후래위상

先去者爲法兮여 後來爲上이로다.

위법고 불생불멸 위상고 무귀무천

爲法故로 不生不滅이오 爲上故로 無貴無賤이로다.

신중천지위일혜 심여신 즉본

人中天地爲一兮여 心與身이 卽本이로다.

위일고 기허기조 시동

爲一故로 其虛其粗가 是同이오

즉본고 유신유물 불이

卽本故로 惟神惟物이 不二로다.

진위만선지극치혜

眞爲萬善之極致兮여

신주어일중

神主於一中이로다.

극치고 삼진귀일

極致故로 三眞歸一이오

일중고 일신즉삼

一中故로 一神卽三이로다.

천상천하 유아자존혜

天上天下에 惟我自存兮여

다물기흥방

多勿其興邦이로다.

자존고 처무위지사

自存故로 處無爲之事오

흥방고 행불언지교

興邦故로 行不言之敎라.

진명지대생 성통광명혜

眞命之大生이 性通光明兮여

입즉효 출즉충

入則孝하고 出則忠하라.

광명고 중선 무불봉행

光明故로 衆善을 無不奉行이오

효충고 제악 일절막작

孝忠故로 諸惡을 一切莫作하라.

유민지소의 내국위중혜

惟民之所義는 乃國爲重兮여

무국아하생

無國我何生고

국중고 민유물이위복

國重故로 民有物而爲福이오

아생고 국유혼이위덕

我生故로 國有魂而爲德이라.

혼지유생유각유령혜

魂之有生有覺有靈兮여

일신유거지위천궁

一神攸居之爲天宮이로다

삼혼고 지생 가이쌍수

三魂故로 智生을 可以雙修오

일신고 형혼 역득구연

一神故로 形魂을 亦得俱衍이라.

비아자손 선위방혜

俾我子孫으로 善爲邦兮여

태백교훈 오소사

太白敎訓이 吾所師로다.

아자손고 통무불균

我子孫故로 統無不均이오

오소사고 교무불신

吾所師故로 敎無不新이라.

을민선인 상거대 전이제천수련 위무

乙密仙人이 嘗居臺하야 專以祭天修鍊으로 爲務하니

개선인수련지법 참전위계 건명상영

盖仙人修練之法이 參佺爲戒하고 健名相榮하야

공아존물 사신전의 위국인식

空我存物하며 捨身佺義하야 爲國人式하니

풍양천추 족이기감 역위인존지상징야

風仰千秋에 足以起感이오 亦爲人尊之象徵也라

후인 칭기대왈을밀 내금수강산지일승야

後人이 稱其臺曰乙密이라 하니 乃錦繡江山之一勝也라.

<해설>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평양에 을밀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을밀선인이 세운 것이라 한다. 을밀은 안장제(519~531)때 조의선인으로 뽑혀 나라에 공을 세웠는데, 본래 을소의 후손이다. 을밀은 집에서 글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고 삼신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무리를 받아들여 수련시키고, 정의와 용기로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당대에 이름난 조의가 되었고, 따르는 무리가 3천이었다. 가는 곳마다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함께 「다물흥방가」를 불렀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몸을 던져 의를 다하는 기풍을 고취하였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먼저 가신 선령님은 우리 삶의 법이시고 뒤에 오는 후손들은 조상님을 잘받드네 선령님을 본받음은 그 정신이 불생불멸 후손들 선령 위함 귀천이 어디 있나 사람은 천지중심 대천지와 하나이니 마음은 몸과 함께 온 우주의 근본일세 사람이 태일됨에 차고비나 같은 경계 우주의 근본이라 신과만물 둘 아니네 참될진은 온갖선의 극치에 이름일세 삼신님은 일심중도 만사만물 주장하네 참과선의 극치에서 세가지참 귀일하고 삼신님이 일심에서 삼신일체 창조할세 하늘아래 온땅에서 오직내가 있음이여 옛땅옛혼 다물하니 나라를 부흥하네 


스스로 생존함에 함이없이 일을하고 나라를 부흥함에 말이없이 가르치네 참목숨이 크게생함 성통광명 이유라네 들어와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충성이라 광명하여 모든선을 다받들어 행하옵고 효도충성 다함으로 일체악행 짓지말라 만백성의 정의로움 나라위한 중한마음 나라가 없다면 내가어찌 살아가리 백성에게 만물있어 우리나라 복이되고 이나라에 혼이있어 우리백성 덕이되네 우리혼은 생함과 깨달음과 신령함이 예있구나 조화신이 머무르는 천궁이여 이내몸이여 삼혼이니 삶과 지혜 닦아보세 일신이니 몸과영혼 함께닦아 영원불멸 얻으리라 우리들 자자손손 나라 잘 다스리고 대광명의 신교배움 영원한 스승일세 우리자손 통일되면 모두 잘 살으리니 우리스승 가르침은 새롭고도 새로워라 을밀선인이 일찍이 을밀대에 거주하며 오직 하늘에 천제를 올리고 수련하는 것을 직분으로 여겼다. 대개 신선의 수련법은 참전으로 계율을 삼고 그 이름을 더욱 굳세게 지켜 서로 영광되게 하고, 나의 마음을 비워 만물을 살리고 몸을 던져 정의로움을 온전하게 하였다. 이로써 나라 사람들에게 사표가 되었으니, 천추만세에 추앙을 받아 능히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또한 인존의 상징이 되었다. 후세 사람이 그 대를 을밀대라 불렀으니, 금수강산의 한 명승이다.


❖을밀대: 평양 금수산 마루에 있는 대

❖다물多勿 : 옛 영토를 찾는다는 뜻(복구토復舊土)이나 대물림?의 어원이 아닌가 싶다

고구려 사냥도

자료출처


환단고기 원전강독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안병우교수님

https://www.youtube.com/watch?v=hPTtRUXAglc

https://www.youtube.com/watch?v=GVnLD8G0q4A

https://www.youtube.com/watch?v=Ci-D2knVDu8

https://www.youtube.com/watch?v=R2lrdMab8zY

https://www.youtube.com/watch?v=xn4HzDVbsnM

https://www.youtube.com/watch?v=lI1qm_UXXk0

https://www.youtube.com/watch?v=9vHiZDaVodA

https://www.youtube.com/watch?v=4S4NhZH-8ZA

https://www.youtube.com/watch?v=wBXV8o-DCmA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https://www.jsd.or.kr/b/jsd708/2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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