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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Jun 10. 2023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리 북부여

부여사를 찾는 날이 역사 광복의 날이며 동방 한국사의 국통맥을 회복한다

서론

부여사를 찾는 날이 곧 역사 광복의 날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리 북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의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 원전강독 북부여기 1차 강독 총론ㅣ윤창열 교수ㅣ

우리 민족사에 나온 8개의 부여

우리역사에서 부여란 말이 처음 나온 것은 조선의 초대단군님 4째아드님 이름이 부여입니다.(규원사화) 부여란 뜻에는 광명, 불, "아침에 뿌였게 밝아온다"할때 뿌였에 있는 듯 합니다.

8개 부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첫번째 부여는 조선의 초대단군(B.C.2333)님의 4남 이름입니다.

1)고조선 초대단군의 4남 부여를 부여후로 임명.(규원사화)

 -1남 부루태자, 물을 잘 다스림 2대단군이 됨.

 -2남 부소, 불을 잘 다룸, 3남 부우, 의술에 뛰어남, 4남 부여 군사를 잘 다룸 모두에게 서쪽땅에 봉해주었다.

2)기원전 1286년 22대 색불루단군이 부여신궁(백악산 아사달, 지금의 길림성 농안, 장춘지역)에서 즉위하였는데 이곳 부여신궁이라고 하였으니 초대 단군님의 4남을 부여후로 봉한 지역으로 짐작됩니다.

❖서란시 근처에 웅심산이 있었다.



2. 두번째 고조선 제3왕조 국호를 대부여라 했습니다.

1)고조선 제3왕조. 44대 구물 단군~47대 고열가 단군

2)43세 물리단군때 우화충의 반란 -> 물리단군 도망가다 돌아가심 -> 44세 구물단군깨서 우화충의 반란을 평정하고 장경단(지금의 요령성 개원)에 도음을 정하고 국호를 대부여라고 개칭 - 이때 삼조선의 병권을 분권시켜, 고조선이 세력이 약해짐.

*단군조선때 4번의 큰 반란 (1) 9세 아술단군때 우착의 반란 - 하얼빈, (2)22대 색불루 단군때 신독의 반란 - 백악산아사달, (3)43세 물리단군때 우화충의 반란, (4)46세 보훌단군때 한개의 반란


3. 세번째 부여 해모수 단군의 북부여

북부여는 기원전 239~기원전 58년(182년 역사)의 역사로 범세동이 북부여기 상, 하 가섭원부여기를 지어서 부여사를 정리함. 북부여는 고조선과 고구려를 연결하는 고리이며,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원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북부여 국가의 존재에 대한 주요 고증 사료: 1)광개토태왕비 출자북부여. 2) 집안시 모두루무덤의 벽에 원출북부여. 3)삼국유사 국호북부여 이유립선생님게서는 북부여를 "원시고구려" 라고 했습니다.


1세 단군 해모수가 239년 임술년 4월8일 웅심산(지금의 길림성 서란) 북부여를 건국 했습니다. 해모수의 고향이 고구려(고리 고구리)입니다. 그래서 고구려라고도 했다고 합니다. 단군조선은 기원전 238년에 막을 내리고, 232년까지 6년간 오가가 공화정을 하다가 북부여에 통합하였습니다. 이때 기비(기원전 232~221)가 큰공을 세웠가. 이후 번조선의 왕이 된다고 전합니다. 백악산 아사달(장춘지방)에 도읍했습니다.

기원전 202년 연왕 노관과 패수를 국경으로 삼았는데, 패수는 조하(지금의 조백신하)이다.

기원전 195년 위만이 번조선에 망명을 청해왔고, 번조선왕 기준(하북성 창려에 도읍)이 그를 박사로 삼아 상하운장은 봉해주었습니다. 이해에 해모수가 붕어했습니다.

이해 겨울 낙랑왕 최숭이 낙랑산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에 와서 낙랑국(기원전195~기원후37)건국 했습니다. 232년-호동왕자 낙랑공주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바로그 낙랑국입니다.

❖서란시 근처에 웅심산이 있었다.

백록산 : 서부여가 개원북쪽에서 백록산으로 옮겨감

❖해모수의 고향이 고구려라서 북부여를 고고려라고도 함.

패수는 조하(지금의 조백신하), 지금의 천진시를 관통한다.

창려 : 험독, 평라라고도 함 번조선의 도읍이 있었던 곳

환인: 고구려 졸본(오녀산성)이라 하지만 전혀 아님

수양진. 수분하시 : 졸본 지역

동강시 : 해두왕, 대소의동생이 해두왕죽인곳

통하 : 동부여 지역

❖서압록: 요하를 말한다.

❖고두막한 호가 동명이다.


2세 단군 모수리(기원전 195~170)

기원전 194년 위만이 험독(지금의 하북성 창려현)을 함락하여 위만정권을 세웠습니다. 절대로 위만조선이라 불릴 수 없는 일부지역(번조선 일부지역)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 시기에 북부여는 건재하게 존재합니다.

위만정권 위치도와 한무제의 동방침략

위만에게 쫓겨난 기준왕은 금강 하구로 들어와 왕이 되었으나 후손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지금도 익산 지역에 미륵산 꼭대기에 기준성이 있습니다. 금강하구에 어래(임금이 온)산, 입마산, 목군둔(군사주둔) 이라는 지명도 있습니다. 이때 상장 탁이 월지(지금의 익산)에 이르러 중마한-(후삼한의 중주국)(기원전 194~9) 203년지속, 아방강역고) 건국했으며  -> 이후에 백제 온조에게 망합니다. 이때 무강왕 탁이 박사 악롱건을 명해 중진한(경주부근)(기원전 193~57)을 다스리게 하고 좌대부 진왕을 명해 중번한(기원전 193~39)을 다스리게 했다고합니다.(동사년표)

기원전 192년 활제(모수리단군의 동생) 고진(해모수의 둘째아들)으로 해성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3세 단군 고혜사(기원전 170~121)

기원전 169년 낙랑왕 최숭이 곡식 300석을 해성에 보냄.

기원전 128년 예군남려가 우거왕에 반기를 들고 한에 귀순, 한이 창해군 설치. 가원전 126년까지 2년지속.

우거를 배신한 신하들 5명에 제후 책봉

4세 단군 고우루(해우루)(기원전 121~87)

기원전 120년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지금의 서요하)을 지키게 함. 우거를 막는데 공을 세워 고구려후로 승진시킴

기원전 115년 해성을 수복하고 구려하(지금의 요하) 동쪽을 모두 되찾음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우거를 멸망시키고, 북부여로 쳐들어오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물리침

백록산 서부여의 수도가 있었던 곳  창려(험독, 평라)

지금의 하북성 조하(조백신하),  창려현 번조선의 도읍지, 기준이 도읍, 위만이 탈취, 한문제가 우거를 물리치고 한사군설치 지역

지금의 흑룡강성 하얼빈시 동쪽에 통하가 있는데 동부여가 있던곳, 동강시: 대소가 해두왕을 죽인장소 사냥터  수분하시 수양진 -졸본지역이다.

192년 해성에서 고진을 발탁해서 위만을 막아내게 했는데

한무제와 고두막한 전쟁


4. 네번째부여 졸본부여, 동명부여, 후기 북부여

5세 단군 고두막한(기원전 108년~60년)-고열가의 후손

기원전 108년 졸본(흑룡강성 수분하시 수양진에서 즉위) - 정인보, 이유립 주장

강단사학자들은 환인-오녀산성-고구려 졸본 도읍지라고 하는데 절대 아니다.

나라를 동명이라고 칭함. - 고두막한의 호가 동명, 동명부여라고도 함

기원전 106년 군사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서안평(내몽고 자치구의 파림좌기, 요나라의 상경)까지 추격. 서안평은 옛고리국 해모수의 고향이다.

기원전 86년 해부루를 후로 강등시켜 차릉으로 옮김(동부여)

해부루는 여전히 북부여라 일컬음.

고두막한도 여전히 북부여라고 칭함


6세 단군고무서(기원전60~58)

고무서 단군은 자식이 없어 소서노와 고주몽을 결혼시켜 사위에게 제위를 넘겼다.

고주몽은 기원전 58년 북부여의 7대 간군이 되고 기원전 37년 고구려로 국호를 바꾸었다. - 연호를 다물이라 하였다.

북부여 연대기

5. 다섯번째 가섭원부여, 동부여(기원전86~기원후22, 108년지속)

1세 해부루(기원전87~48)

기원전 86년 고두막한의 위협과 국상 아란불의 권유로 통하(지금의 흑룡강성 통하현)로 옮겨감

기원전 77년 곤연에서 금와를 얻음.

2세 금와(기원전 48~7)

기원전 24년 유화부인이 돌아기심, 주몽이 졸본으로 모셔감

3세 대소(기원전 7~기원후 22)

기원후 22년2월 대소왕이 고구려 상장 괴유에게 죽임을 당함.

부여사의 흐름과 위치

6. 여섯번째 갈사부여(기원후 22~68)

1세 대소의 동생(기원후 22~?)

여름 4월에 대소왕의 동생이 추종자 수백명을 거느리고 압록곡(흑룡강과 송화강의 합류처)에서 해두왕을 죽이고 갈사수(오소리강)유역에 갈사국 세움

2세 도두왕(?~68)

기원후 68년 3대 도두왕이 고구려에 항복, 고구려는 도두왕을 우태로 삼고 훈춘을 식읍으로 삼아 동부여 후에 봉해주었습니다..-남갈사라고도 함.


7.일곱번째 연나부부여, 서부여, 낙씨부여(기원후22~494)

1)기원후 22년 7월에 대소의 종제가 고구려에 항복하자 왕으로 봉해 연나부(서북)에 안치

2)그의 등에 낙문이 있어 낙씨성을 하사

3)개원서북에서 백랑곡(객좌현성 서남쪽 백록산 )으로 이주하여 번성. -서쪽에 위치하여 서부여라 명명했지만 그들은 그냥 "부여"라 했습니다. 중국사서에서 말한 대부분의 부여는 이 서부여입니다.

4)의려왕이 285년 모용외에게 패한뒤 아들 부라에게 왕위를 넘기고 백랑산을 넘어 일본에 건너가 왜를 평정하고 애마토 왜를 세우고 15대 오진왕이 되었다함. 삼신의 부명에 응한다하여 응신이라는 이름을 지었다함.

오진왕은 의려 혹은 그의 아들 의라 2가지 설이 있다.

통전에는 285년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의려가 자살하였다고 하였다. 환단고기는 앞의 이야기를 이어 의려완이 바다로 도망하여 돌아오지 않자 286년 아들의라가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를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 일본 오사카에 대의라 신사가 있다. 궁사가 말하기를 "의라는 3세기 말 한반도에서 건너와 왕족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5)494년 문자열제 때 고구려에 병합. 이전부터 또는 이후 서방으로 진출.

6)중국의 사서인 삼국지, 후한서, 진서 등의 부여전은 모두 서부여에 대한 내용이다.

<일본에 진출한 부여족>

1) 기다 사다기치(1871~1939)는 일본 왕실의 조상이 부여, 백제계라고 주장 하고 부여는 4세기에 일본에 건너와 나라를 세웠다고함. 일본의 기마민족설을 최초로 주장

2)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1906~2002)는 동북 부여계의 기마민족이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열도에 들어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에 야마토(대화)지방에 야마토조정을 세웠다는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을 주장

3)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음식을 먹을 때는 모두 조두(목기 그릇)를 사용하고 여럿이 모이는 때에는 서로 절하면서 잔을 권하는데 잔을 씻어 권한다."라고 했고 또 "통역하는 사람이 말을 전할때는 모두 무릎을 꿇고 손을 땅에 대고 조용히 말을 한다."라 하였다. 부여인과 일본인의 강한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서방으로 진출한 부여족(신용하의 부여족과 불가리아)>

두막루(서기410?~726)부여의 유민이 나하(제1송화강)를 건너가 건국한 나라 대막루, 대막로, 달말루라고도부른다. 위치는 흑룡강성 눈강 동쪽, 송화강 복쪽, 송눈평원의 동부, 송요평원의 복쪽 지역으로 하얼빈, 치치하얼 근처이다. 726년 대진국 무왕과 흑수말갈에 멸망. 위서 열전 두막루 조를 보면 "옛날의 북부여"라고 했고 신당서 유귀전에서 "스스로 북부여의 후예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1)4세기말경 부여족의 일파가 중앙아시아의 카스피해와 흑해사이에 위치한 "갑카스(코카서스)" 지방으로이주. 그후 5~7세기 초까지 돈강유역과 북갑카스 지역으로 계속 이주.

2)서양에서 7세기부터 불가(Bulghar)족의 역사가 나오는데 이 불가족이 부여족이다. 불가는 부여(불)의 가라는 뜻이다.

3)635년 불가족은 족장 쿠브라트의 지도 아래 대불가리아 건국.

4)642년 쿠브라트 사망 후 그의 다석 아들의 권력싸움으로 불가리아 해체.

5)둘째아들 코라그가 세운 "고추불가국"은 14세기까지 번성. 현재 러시아의 타타르 자치공화국으로 존재.

6)셋째아들 아스파르흐가 이끈 불가족은 발칸반도로 남하. 당시 불가족은 동로마군과 결전을 앞두고 비토새산(발칸산)에서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의식을 행하였다고 함.

7)이때 로마군을 물리치고 불가리아 제1제국(686~1018)건국.

8)불가족은 귀족이 되어 보야(부여의 변음)라 불렸고, 크롬(Krum)황제때 수도를 옮겨 소비(지금의 소피아)라 불렀다.

9)황제는 소비의 산에 올라 단군에게 제사를 올리고 그산 이름을 발칸으로 정하였다.

10)신용하는 "발칸 산"을 "밝안산". "밝산", "백산" 등 우리말 지명과 동일한 것으로봄. 한 민족은 고대부터 백산(밝은산)에서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이발칸산에서 발칸반도라는 이름이유래.

11)크롬황제가 병사한(814)후 국력약화. 12세기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 세움.

12. 불가리아인은 서양에서 유일하게 갓난아기의 엉덩이에 반점(몽고반점)이 있다.

8.여덟곱번째 백제(남부여)

백제의 26대 성왕(523~554)

538년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천도하고 국호는 남부여라 하였다. 백제의 족의 성씨가 부여씨입니다.

<부여와 고구려>

1)삼성기상에서 고주몽이 해모수의 사당을 세워 태조로 삼았다고 하였으나 북부여가 원시고구려이다.

2)북한에서는 삼국사기에서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갑신년에 건국되었다고 한 것을 4주갑을 올려 기원전 277년 갑신에 건국되었다고 주장한다.

3)광개토대왕비문에 17세손 광개토태왕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광개토열제는 고주몽의 13세손임으로 해모수 단군부터 계산한것이다. 1대 해모수 -> 2대 고진 -> 3대 불명ㅇㅇ -> 4대 불리지(고모수) -> 고주몽

4) 신당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에 "고구려 비기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900년이 안되어 80살먹은 대장에 의해 멸망한다"고 하였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27년조에도 나옴)

기원전 238+기원후 668=907년

기원전 232+기원후 668=900년

5)이때(668년)이세적(584~669)의 나이가 85새였다.

6)한국사의 국통맥은 북부여(원시고구려)->본고구려->대진국(후고구려)으로 구려정통론으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부여사를 찾는 날이 곧 역사 광복의 날입니다.  서부여는 대소왕의 종제 -> 시 ->위구태->위거->마여->의려->의라 등으로 계승되다가 494년에 고구려에 합병되며 명말했습니다.

7)강단사학회는 중국사서에서 말하는 서부여를 전체 부여의 모습으로 서술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서부여사는 부여의 끝자락 역사이다.

8)부여사는 우리 한민족사의 머리와 몸통을 이어주는 중요고리이다.

9)부여사의 회복은 단절된 국통맥을 연결해 줄 뿐만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를 밝혀주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리, 북부여

환단고기의 북부여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북부여기의 저자 범장范樟은 누구인가?

범장은 고려 말 사람으로서 휘諱는 세동世東, 자는 여명汝明, 호號는 복애로 금성錦城( 현 전라남도 나주) 출신이다. 통찬 通贊 후춘後春의 아들이며 정몽주의 제자이다.

공민왕 18년 (1369)에 문과에 급제하여 덕령부윤德寧府尹에 이어 낭사郎舍의 책임자인 간의대부諫議大夫등을 지냈으며,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려의 국운이 다한 것을 알고 사관仕官의 뜻을 꺾고 만수산萬壽山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세 번이나 불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고향 금성으로 돌아가 생을 마쳤다. 사후에 후덕군厚德君에 봉해지고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다. 개성의 표절사表節祠,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광주의 복룡사伏龍祠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현재 광주시 광산구 덕림동에 있으며, 북구 생룡동에 사우용호재가 있다.

저서로는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와 동방연원록 東方淵源錄,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편찬한 화해사전華海師全이 있다. 이맥의 태백일사 고려국본기에 따르면 행촌이암, 청평산인 이명과 함께 범장은 양주의 천보산 태소암에서 소전거사를 만나 환단시대 우리 역사에 관한 진귀한 고서들을 보았다고 한다. 그 고서를 기반으로 하여 행촌은 단군세기를 지었고 이명은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썼으며 범장은 북부여기를 찬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동방역사의 맥을 바로 잡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특히 행촌과 범장은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가 망국의 비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부여사에 대한 인식을 같이하였다. 즉 고조선의 국통맥이 부여로 이어졌듯이 고려의 멸망 이후에도 국통맥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를 각각 지필한 것이다.

2)북부여기의 주요 내용과 구성

북부여기北夫餘紀는 시조 해모수로부터 6세 182년에 이르는 북부여 역사와 3세 108년에 걸친 가섭원부여(동부여)역사를 담고 있다. 북부여와 동부여 왕의 이름과 재위연대는 다음과 같다.

<북부여>

시조 해모수解慕漱단군 재위 45년(BCE239~ BCE195)

2세 모수리慕漱離단군 재위 25년(BCE195~BCE170)

3세 고해사高奚斯단군 재위 49년(BCE170~ BCE121)

4세 고우루高于婁단군 재위 34년(BCE121~ BCE87)

5세 고두막高豆莫(동명왕)단군 재위 49년(BCE108~ BCE60)

6세 고무서高無胥단군 재위 2년(BCE239~ BCE195)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

임술 원년(B.C.239)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天王郞)이라 할 만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단군 고열가 57년 으로 임술 4월 8일이라.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며 오룡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니 이에  이르러 즉위 하셨다.

 계해 2년(B.C.238년) 이해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의 법(지금의 호구를 조사법)을 제정하더니 오가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 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기사 8년(B.C.232년) 단제께서는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겨울 10월 공양태모(公養胎母: 현자를아끼고, 태교를 생각하는법)의 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태교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임신 11년(B.C.229)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이 영주(요나라 부근)를 습격하여 순사 목원등을 죽이고 크게 약탈질하고 돌아갔다.  

 경진 19년(B.C.221)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도록 하였다. 연 나라는 장수 진개(秦開:제나라의 장군으로 동호 즉 조선에 인질로 잡혀있다. 나중에 돌아가 조선을 침범하여 조선이 양평에 에 성을 쌓아 국경으로 삼았다.)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滿番汗:최근 중국의 연구로 북경 북쪽의 창평임이 밝혀짐.)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신사 20년(B.C.220)명을 내리사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도록 하시고 7월 새로운 궁궐 336간을 지어 이름하여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계미 22년(B.C.219), 창해역사 여흥성이 한나라 사람 장량(한고조의 공신. 한이 진시왕에게 망하자 그 원수를 값는다고 가재를 털어 자객을 구하고 역사를 구하였다. 120근의 철퇴를 만들어 동유중인 진시황 정을 박랑사에서 습격했으나 빗나가 부차를 박살냈다. 여기서 자객이 창해역사 여흥성이다. 여흥성은 그뒤 여흥성의 거사 미수로 수배되어 몸을 숨겨오다가 한나라 시조 유방과 연결되어 진시황을 타도하고 한나라 창업공신이 된다. 박랑사는 하남성 박랑현의 동남에 있다.) 과 함께 진나라왕 정을 박랑사 가운데서 저격하였으나 빗나가 부차를 박살냈다.

 임진 31년(B.C.209), 진승(진나라 말기의 농민반란 지도자)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려웠다. 이에 연나라.제나라.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명 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의 운장에 갈라 살게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케 하였다.

 기해 38년(B.C.202), 연나라의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는 오늘날의 난하이다.병오 45년(B.C.195),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후에 번조선의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이해 겨울 단제께서는 붕어하시고 태자 모리수가 즉위 하였다.

2세 단군 모리수 재위 35년

 정미 원년(B.C.194), 번조선의 왕은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매우 풍부 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위만)들에게 패하여 망한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마한이라 한다. 이에 이르러 변.진한의 두한도 역시 각각 자기들이 받았던 땅 백리를 가지고 수도로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고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무신 2년(B.C.193),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중국 요녕성 해남의 평양성)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는 침범하지 않았다.

 신미 25년(B.C.17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가 즉위하다.

3세 단군 고해사 재위 49년

 계축 42년(B.C.128),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경신 49년(B.C.121), 일군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

이해 9월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가 즉위 하였다.

4세 단군 고우루 재위 34년

 신유 원년(B.C.120),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한반도의 압록이 아니라 몽고지방 을강을  뜻함.)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중국의 제후국인 고구려후가 아니라 북부여의 제후국인 고구려후임이 확실해졌다.)로 삼았다.

 계유 13년(B.C.108), 한의 유철이 평나를 노략질하여 우거(망한 위만의 뒤를 이어 대항한자.)의 나라가 혼란스럽자 번조선인인 최最가 우거를 살해하였다. 뒤에 성기가 반항을 하였으나 그 또한 번조선인에 의해 살해되었다.이러하여 우거가 망하자 한이 4군(이것이 중국측에서 주장하는 한4군이다. 문제는 우리의 이사서를 믿지 않는 다하더라도 한무제의 태도에서 이 전쟁의 결과를 추측 해볼수있다, 한무제는 전쟁에서 지자 전쟁에 참가했던 육군사령관 순체,해군사령관 양복,무제의사신 위산과 공손수의 네사람을 모두 능지처참에 해당하는 기시라는 최악의 사형으로 발기발기 찢어 죽였다고한다. 만약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개선장군일 이 사람들을 왜 죽였겠는가, 이것의 대답은 생각해보지 않아도 누구나 알수있는 사실이다.)을 두고자 병력을 치막시키니,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의 군을 연파하였다. 이러자 그 지역의 백성들 모두가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갑오 34년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은 사람을 시켜서 고하기를"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 가시오"라하니 단제는 매우 곤란해 졌다.마침내 단제께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에 즉위 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때 국상인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기름지고 오곡이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라고 하며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 부여라 하며 또 동부여라고도 한다.

  5세 단군 고두막(혹은 두막루) 재위 22년, 제재위 27년

 계유 원년(B.C.108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13년이다. 제(帝)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찌기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명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卒本:몽고 역사학자의 말에 따르면 지금의 북만주나 동몽고의 땅으로 비정된다.)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 3년(B.C.106)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과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西安平:후에 요의 상경 임황부가 되었다.)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藁離國:바이칼호부근에서 몽고내부까지.)의 땅이었다.

 갑오 22년(B.C.86)단군 고우루 34년에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 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을미 22년(B.C.86)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서 압록하의 상류에서 한구와 여러 차례 싸워 크게 이겼다.

 임인 30년(B.C.79)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능에서 태어났다.신유 49년(B.C.60) 제가 붕어하고 유명에 따라 졸본천에 장사 지냈다. 태자 고무서 등극하다.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

 임술 원년(B.C.59) 제가 졸본천에서 즉위하고는 백악산에서 장로들과 함께 모여 사례에 따라 널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시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제는 태어나면서 부터 신과 같은 덕이 있어 능히 주술로서 바람과 비를 불러 잘 구제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라 불렸다. 이 때에 한나라의 오랑캐들이 요하의 왼쪽에서 널리 소란을 피웠으니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계해 2년(B.C.58) 제가 영고탑을 순시하다가 힌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 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이보다 앞서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이해의 나이가 23세 였다. 이때에 부여인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오이,마리,협보(주몽의 협력자로 뒷날 일본으로 건너가 다파라국을 세웠다.)등 세 사람과는 덕으로써 사귄 친구였던 지라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서 함께 길을 떠나 분릉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너려고 하여도 다리가 없었으므로 뒤 쫓아오는 군사들에게 몰릴까 두려워하여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오늘 도주함에 있어 추격병은 다가오고 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하니, 이때에 물고기 자라 따위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므로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가섭원부여(동부여)>

시조 해부루解夫婁왕 재위 39년(BCE86~ BCE48)

2세 금와金蛙왕 재위41년(BCE48~ BCE7)

3세 대소帶素왕 재위 28년(BCE7~ BCE22)

시조 해부루 재위 39년

 을미 (B.C.86) 원년 왕은 북부여 때문에 지약을 받아 가섭원 혹은 분능(산동성부근)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옮겨서 살았다.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범.표범.곰.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정유(B.C.84) 3년 국상 아란불(동부여 재상, 많은 문헌에 등장)에게 명하여 원근의 백성들을 널리 잘 먹여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며 또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해 안되어 나라는 풍부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 졌다. 때에 필요할 때 마다 비가 내려 분능을 기름지게 하는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임인 8년(B.C.79) 앞서 하백녀 유화부인이 나들이를 나갔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 갔음을 책말하여 마침내 구석 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이며 혹은 고진의 손자라고도 한다. 왕께서는 유화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그해 5월 5일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 아이가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은 고주몽이라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잘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다.

 갑진 10년(B.C.77)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자 큰 돌을 마주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들을 시켜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더라. 왕은 몹시 기뻐하며 "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신 아기로다."라고 하시며 곧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라 하고 장성케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임술 28년(B.C.59) 나라 백성들이 고주몽을 가리켜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러, 이듬해 새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계유 39년(B.C.48) 왕이 죽고 태자 금와가 즉위하다.

2세 금와 재위 41년

 갑술 원년(B.C.47)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특산물을 바쳤다.정유 24년(B.C.24)유화 부인이 돌아 가셨다.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으로 모셔와 장사지냈는데 황태후의 예로써 억지로 산 같은 능을 만들고 곁에 묘사를 짓게 하였다.갑인 41년(B.C.7년)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 대소가 즉위 하였다.

3세 대소 재위 28년

 을묘 원년 (B.C.6) 봄 정월에 왕은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국교를 청하고자 왕자를 인질로 삼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열제가 태자 도절로써 인질을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매 왕이 그를 꾸짖었다. 겨울 10월 병력 5만을 이끌고 가서 졸본성을 침략하였으나 큰 눈이 와서 많은 동사자만 내고는 퇴각하였다.계유 19년(A.D.13)왕께서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학반령밑에 이르르자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임오 28년(A.D.22) 2월 고구려가 나라의 힘을 다시 모아서 침범해오니 왕은 몸소 무리를 이끌고 출전하였는데, 진흙탕을 만나 왕의 말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때에 고구려 대장군 괴유가 바로 앞에서 있다가 살해하였다. 그래도 부여군은 굴하지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 하였는데 큰안개가 7일 동안이나 계속되니 고구려 열제는 몰래 병사를 이끌고 밤에 탈출하여 사잇길을 따라 도망쳐 달아나 버렸다.여름 4월 왕의 동생은 따르는 무리 수백인을 데리고 길을 떠났는데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왕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는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였고, 그 길로 갈사수의 변두리를 차지하고는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니 이를 갈사(길림성 부근)라 한다. 갈사는 태조 무열제의 융무 16년 8월에 이르렀을 때, 도두왕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짐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대저 3세 47년 만에 나라가 망했다. 고구려는 도두를 우대라고 부르도록 하고 저택을 하사하시니, 혼춘을 식읍으로 삼게 하여 동부여후에 봉하였다.

가을 7월 왕의 친척 동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선왕께서는 시해 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스스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고,나 또한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새롭게 일으킬 수가 없으니 차라리 항복함으로써 살기를 도모하리라" 하고 옛 도읍의 백성 만여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무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에  떼와 같은 무늬가 있었던 까닭에 낙씨의 성을 하사하였는데 뒤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에 이르니 바로 연 나라의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자열제의 명치갑술(A.D.494)에 이르러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조차 끊겼다.


북부여기는 열국시대의 출발이자 해모수의 북부여 건국 이야기 , 북부여사의 틀이 바뀌는 동명왕 고두막한의 출현(졸본부여와 동부여의 탄생)과 이를 전후로 한 무제의 침략과 위만정권 내 번조선 유민의 조선족 독립전쟁인 소위 한사군 전쟁, 그리고 북부여 말기 남삼한 성립사와 부여 잔여사殘餘史로 이루어져 있다.

북부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이자 열국시대의 첫머리가 되는 나라가 바로 북부여라는 것이다. 북부여의 시조는 해모수이다.

그런데 북부여기에는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에 관한 기록 외에도 남삼한南三韓의 기원에 대한 귀중한 기록도 담겨있다. 해모수 단군 때 번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은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황해를 건너 한반도 이남으로 망명을 하였다.

이때 제가諸加 무리가 상장上將 탁을 받들고 월지(금마)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했다. 당시 변한과 진한도 한반도 이남에 나라를 세웠는데 이로써 한반도 한강 이남지역에서 남삼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변한과 진한은 모두 마한의 명령에 복종하였다.

3세 고해사 단군조에는, 삼국사기에도 나와 있는 낙랑 왕 최숭이 마한 땅으로 옮겨가 나라를 세운일을 기록하고 있다.또한 북부여기에는 다른 사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 고두막한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4세 고우루 단군 때 한나라 무제는 위만의 손자 우거를 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한무제는 우거가 있던 왕검성만을 정벌하려 한것이 아니라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까지 완전히 집어삼키려 하였다. 이때 군사를 일으켜 의연히 일어나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 바로 고두막한이다. 고두막한이 세운 나라가 졸본부여이다. 후에 고구려가 바로 졸본부여 자리에 나라를 세운다.

북부여기에는 고두막한에게 밀려 가섭원으로 쫓겨 간 해부루가 세운 동부여 역사가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해부루는 북부여 4세 고우루단군의 아우이다. 아들이 없던 해부루가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금와金蛙]를 얻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이 여기에도 그대로 실려있다. 그 금와가 바로 동부여의 두번째왕이다.

주몽의 탄생이야기도 해부루왕 조에 같이 나온다. 여기에 실린 기록에 따르면 고주몽은 하백의 딸 유화의 아들이다. 그런데 유화를 유혹하여 임신을 시킨 사람은 해모수가 아니라 고모수高慕漱라고 한다. 북부여기에 따르면 고모수는 부여의 황손(해모수의 둘째아들인 고진의 손자)이다.

동부여의 3세 대소왕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여러 번 언급되었다. 대소왕이 고구려와 전쟁을 하게 된 계기와 대소왕의 죽음, 그리고 동부여 멸망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내용과 다른점이 없다. 또 대소왕의 아우가 세운 갈사국의 유래와 그 멸망, 그리고 연나부 부여에 대한 기록이 모두 삼국사기와 같다. 결국 북부여기는 우리 역사의 국통에 관한 다른 사서들의 미비한 기록과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 잡아 줄수 있는 결정적 기록이라 하겠다.

물론 북부기에도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연나부 부여에 대한 기록이 거의 빠졌다는 점이 그것이다. 5세기말 고구려 문자열제 때 나라를 고구려에 바쳤다는 기록 외에는 자세한 언급이 없다. 삼국지 동이전과 후한서 등 중국사서에 나오는 부여에 대한 기록은, 주로 2~5세기에 존재했던 연나부부여에 대한것이다. 그런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는 연나부 부여가 멸망한 후 일본으로 이주하여 일본을 정복하고 고대국가(4세기 야마토大和정권)를 건설한 부여의 왕자인 의라 이야기가 실려있다. 나라를 세운 의라는 일본에 부여의 문화를 전파하게 된다.


자료참고 

상생출판

https://www.sangsaengbooks.co.kr/

참한역사신문


http://ichn.co.kr/index.php

한푸쳐


https://hanfuture.hanstyle.net/


우리역사 국사편찬위원회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a/main.do


https://m.blog.naver.com/warllang/110166545767

https://gaundekr.tistory.com/15793971

증산도

https://gdlsg.tistory.com/3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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