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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운 Jul 18. 2022

[사바하] 신이 된 이에게 묻는 신의 부재

신이시여, 어디 계시나이까.



<검은 사제들>로 한국 오컬트 영화의 포문을 열었던 장재현 감독의 후속작.

토속 신앙과 사이비, 불교와 천주교의 조합이라는 어려운 과제 속에서 그가 인간과 신을 향해 묻는다.






불교는 세상 생명 모두가 부처가   있다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다. 불교에서는 부처가 유일신의 의미가 아니며, 깨달음을 얻어 윤회의 고리를 끊고 열반한 자가 바로 수없이 많은 부처 중에 하나가 된다. 따라서 불교에서 악이 없다는 것은  어떤 악도, 미물도 뉘우침과 깨우침을 통해 부처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바하의 등장인물 모두 미륵(미래에 부처가  사람, 이미 깨우친 사람)  수도, 악귀가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영화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쌍둥이는 각각 미륵과 악귀로 태어났다. 악귀인 언니는 미륵인 동생의 다리를 갉아먹었으며 평생에 걸쳐 동생과 주변을 괴롭혔고, 지하실에 갇혀 생활하며 뱀(악한 것)을 부리면서 사는 존재다. 그러나 미륵인 동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언니에게 살을 내어주고, 밥을 챙겨 주고, 마지막엔 옷을 주는 자비를 베푼다. 불교에서 밥을 공양하는 것은 굉장히 큰 자비에 해당하며 옷을 준다는 행위는 언니를 하나의 인간으로, 단순히 “그것”이 아닌 생명의 존재 그 자체를 존중했다는 뜻이다.


미륵의 가장 큰 자비를 통해 악귀였던 언니는 “악귀를 잡는 악신”으로 변모하게 된다. 때문에 옷을 받은 후 언니는 털이 빠지고 신의 형상을 띄게 되는데, 이는 김제석이 포교하던 신흥 사이비 종교의 스토리와 같다. 그들이 숭배하는 동방사천왕 또한 과거에는 악귀였으나 부처를 만나 악신이 되었으며, 악귀를 잡으며 살다가 종국에는 열반에 이르러 또다른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쌍둥이 언니가 악귀에서 출발해 열반에 이르르게 된다는 바로 그 악신을 뜻한다. 악귀로 태어났으나 미륵의 자비를 통해 악신이 되며, 악귀인 김제석을 죽이고 죽음 이후의 삶-열반에 이르르게 되는, 김제석의 종교를 관통하는 존재다.


 미륵과 악신이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것이 재밌는 지점이었는데, (언니의 외모가 나오지는 않지만, 배우가 같다) 두개로 쪼개어진 하나의 인간이 양 극단으로 태어난 것을 보면 한 인간의 안에는 미륵이 될 가능성도, 악귀가 될 가능성도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부처가 될 수도 있고 악귀가 될 수도 있다고,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불교의 세계관까지 선명하게 담아냈다.






 반대로 김제석은 한 때 미륵의 길을 걷던 사람이다. 그러나 네충텐파의 예언을 듣고 눈빛이 완전히 변하는데, 자신이 위협적인 존재에 인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영생의 욕망에 눈뜨게 된 것이다. 불교에서 욕망과 소유는 가장 악하고 멀리 해야 할 것으로 모든 악은 곧 “욕망” 을 뜻한다. 여기서부터 김제석은 미륵의 길에서 벗어나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살해 명부를 집필하고, 부모를 살해한 아이들을 거두어 99년생의 여자 아이들을 전부 살해하게 하면서 자신을 신이라고 믿은 존재, 영생을 탐한 존재. 불교에서는 죽음이 나쁘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나 열반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영생을 향한 집착은 김제석이 이미 타락했음을 초반부터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정나한은 잘못된 믿음으로 악귀를 부처로 믿고 악귀를 모시며 살아왔던 사람이지만, 여섯개의 손가락과 코끼리를 통해 김제석이 악귀임을 깨닫게 되는 인물인데 극 중에서 가장 파격적이었던 코끼리 장면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코끼리의 눈을 보고 두려우면 나약한 것이다. 코끼리의 눈이 어때보이나.” 라는 김제석의 말에 정나한은 “눈이 추워보인다.” 라고 답한다. 김제석은 “넌 왜 코끼리 눈이 무섭지 않지.” 라고 하며 방아쇠를 당기는데, 이 장면을 통해 김제석은 코끼리 눈이 두려운 악귀임이 드러나며 정나한이 코끼리 눈을 두려워 하지 않자 그가 자신과 같은 존재가 아닌, 자신을 위협할 악신이 되었음을 깨닫게 되어 총을 당긴 것이다. 언니(악신이자 부처로 열반하는 존재) 를 만난 후 정나한 또한 악신이 된다.


 정나한은 언니와의 만남을 통해 악신이 되었다가, 악귀를 죽이고 죽음을 통해 열반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극의 마지막, 박 목사의 안경에 비치는 폭죽놀이는 열반에 이른 사천왕에게 둘러준다는 두광을 의미하는듯 보인다. 그는 악귀 퇴치에 성공했고, 박목사는 동생 미륵이 그러했듯 자신의 옷을 정나한에게 덮어 주면서 그의 존재를 인정한다. 영화에서 옷을 덮어 준다는 행위는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임이 다시 드러난다. (가짜 김제석이 박나한에게 옷을 주어서 악귀 박나한이 존재하게 되었고, 동생이 언니에게 옷을 주어 악귀가 악신이 되었고, 박목사가 박나한에게 옷을 주어 악신 박나한이 열반에 이른다.)


정나한의 몸 위로 점점 눈이 쌓이는 장면은 참 쓸쓸한데, 그가 두광을 달고 열반했으리라 싶으면서도 도대체 왜 그는 현세에서 이토록 잔혹한 삶을 살아야 했는지, 신은 도대체 무얼 하기에 죄없는 이들을 이토록 고통케 하고 굽어 보지 아니하시는지를 의문하게 한다. 눈보라가 치는 어두운 밤, 신을 찾아보지만 얼굴을 가리고 울고만 있는 그의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 박목사는 일생이 불행으로 일그러진 정나한의 시체를 뒤로 하고 달리면서, 사창가의 엄마가 불러 주는 자장가가 유일한 위안이었던 추운 남자 위로 쌓이는 눈을 털어 주지도 못하는 채로 그 대답을 찾을 수 없다. 쓸쓸하고 가슴이 저릿하다.


그로 인해 유일신이 존재하고 그가 어린 양들의 삶을 인도한다고 믿는 박 목사는 일련의 사건 끝에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물을 수밖에 없다. 신은 무엇인가. 그는 존재하는가. 만일 존재한다면, 어째서 어린 양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가엾은 자들의 머리 위로 눈이 나리는데 그를 감싸안지 못하는가.

그저 싸늘하게 세상을 내려다보고만 있는 신을 향해 외친다.



신이시여, 어디 계시나이까.





 






죽음과 삶의 경계, 믿음과 불신의 사이,

신이 될 수도, 악귀가 될 수도 있는 생. 


인간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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