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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운 Nov 05. 2021

[번지점프를 하다] 어떤 착각된 사랑에 대하여

내가 행복했던 곳으로 가주세요.




 우리는 사랑 앞에서 안제나 큰 환상과 착각에 빠지곤 한다. 이 사람과는 영원할거라거나, 이번엔 다를거라는 보편적인 착각부터 상대의 단점과 결점마저 사랑스러워보이는 중증, 나아가 너만이 내 인생의 전부이자 내 어두운 삶의 기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다소 극적인 믿음까지. 사랑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흐리며 내 안의 상대를 하나의 우주이자 신으로 만들어 내고, 어떤 사랑은 삶의 기나 긴 재앙이 되기도 한다.


 <번지점프를 하다> 역시, 재앙과 같이 깊었던 사랑에 대한 영화다.






 <번지점프를 하다> 고등학교 1학년  학교에서 처음  영화였다. 국어 선생님이 인생 영화라고 틀어주셨는데, 잔잔하고 오래된 로맨스 영화는 이미 그 시개의 취향의 영화는 니었던지라 다들 꿈나라로 떠나거나, 다른 짓을 하거나,  나이대 애들이  그렇듯 영화에 딴지를 걸고 빈정거리는 등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에서 영화에 극히 몰입했었던 모양이다. 아직도 교실 안의 어수선한 풍경과 우측 위에 달린 모니터에서 나오던 영화의 순간들이 아직도 그림처럼 생생한걸 보면.





 젓가락은 ㅅ받침인데 숟가락은  ㄷ받침이냐는 심오한 문법적 물음에 숟가락은 ㄷ모양으로 떠먹으니 숟가락이 아니냐고 멋쩍게 웃던 . 근사한 레스토랑도 아니고, 비싼 다이닝도 아니고 어디 개울가나  밑의 백숙 파전 막걸리나  법한 수수한 야외 식당에서 마주앉아있는 풋풋함, 태희에게 달려가무릎을 굽히고 신발끈을 묶어주던 순수한 얼굴이 여전히 선명하다. 태희를 위해 어깨가 젖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우산을 기울이고, 기꺼이 무릎을 굽혀 신발 끈을 묶어주고, 어디서든 태희를 발견하면 환하게 웃으며 달려가는  티없는 진심을 보고 있자면 나마저 한없이 감화된다.


 인우가 태희에게 내보이는 감정은 풋풋하지만 진심어린 사랑이다. 세상 무엇보다 착하고 순수한 감정, 그래서 두번은 없을 아주 귀하고 소중한 진심.







 하지만 그렇게 열렬한 사랑을 하던 인우는 사고로 인해 태희 잃고 만다. 인우는 절망했겠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계속 살아가야 하듯, 인우 역시 나이가 들어  사랑을 만나 결혼도 하고 번듯한 교사가 된다.


 그러나 인우는  학생인 현빈에게 태희의 흔적을 조금씩 발견하면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마음에 났던 구멍에 둑을 쌓아 막아뒀지만 몰려오는 노도에는 힘없이 스러지고 만다. 숟가락이   받침이냐는 질문에 신경질을 내고, 그냥 그럴 수도 있는 일인 벨소리에도 과민하게 반응한다. 나중에는 중고시장에서 산 라이터 하나에 이성을 잃고 화까지 낸다.


 묻어뒀던 과거의 기억이 수면 위로 올라오며 인우의 얼굴은 점차 어두워지고, 서서히 슬픔에 잠식되어간다. 혼자만 기억하고, 혼자만 하는 외사랑에 홀로 허덕이는 모습을 보고있자면 덩달아 마음이 쓸쓸해진다.






 어느 순간부터 현빈이 태희의 환생이라고 믿으며 “나는 너를 이렇게 기억하는데, 왜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니.” 라고 말하며 절망하는 시퀀스를 볼 때면 언제나 무어라 형용할  없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는 안되는 현실과, 그럴 수밖에 없는 마음의 비참함이 만나는 순간. 안된다고 수 백번을 되뇌여 봐도, 무려 17년이다. 인우는 17년이라는 길고 긴 시간동안 태희를 가슴에 묻고 살았다. 그리고 마음에 매립한 사랑은 부패하는 법이 없어 언제고 수면 위로 떠오르고 마는 것이다. 잊었고, 극복했다 믿어도 언제고 예고없이 다시 올라와 가슴을 쓰라리게 만든다.

 

 옛 사랑과 닮은 사람을 발견했을 , 같은 취향인 사람을 만날 , 아주 우연히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을 봤을 . 타인에게서 사랑의 흔적을 찾으려 매양 허둥대는 것은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의 서식이다. 인우 또한 다르지 않아 현빈의 라이터, 벨소리, 그림, 질문에서 끊임없이 태희의 흔적을 찾고, 어느 순간부터 현빈이 태희의 환생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실제로 현빈이 태희의 환생인지 어쩐지 증명할  없을지언정 인우만은 분명히 그렇게 믿고 있고,  믿음은  진실이 된다.





 그렇게 어느 순간 인우를 사랑하게 된 현빈과, 현빈이 태희의 환생이라 믿는 인우는 결국 뉴질랜드로 떠나 동반자살을 택한다. 두 사람은 저 우주에서 떨어진 밀씨와 같이 자유롭게 창공을 부유하며 사라진다.

 






 처음 영화의 엔딩을 보고는 무난한 감상이었다.  “다시 만나 사랑하기 위해 죽었구나. 환생해서도 다시 만나는 인연이라니. 굳이 그렇게 죽었어야 했을까, 가엾다.” 정도의.


 그러나 어느  죽음으로 누군가를 잃고, 상실감에 시달리다가  영화를 다시 보자  생각은 “그래서 현빈이 태희의 환생이긴  것인가.”였다. 영화에서 묘하게 현빈이 태희와 닮은 행동과 모습을 보이기는 하나, 그게 정말 “태희만이 가질  있는 고유한 특징이던가.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매듯, 인우 또한 그런 사람인 것 같아 보인다. 태희와 같은 벨소리, 숟가락이 디귿 받침인걸 궁금해하는 엉뚱함, 우연히 사게  라이터같은 것들. 세상에 찾아보면 그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고 오직 현빈 하나 뿐일까.




 우리는 종종  상처와 환상을 타인에게 덧씌우며 나의 결핍을 만족시키려 한다. 누군가에게 과거에 허무히 잃어버린 사람을 투영하고,  사람의 입맛, 취향, 행동 같은 것들이 과거와 닮았을수록 마음이 부풀어오른다. 나중에는  사람의 모든게 기적같고, 세상 유일무이한 인연인 것으로 착각하게 되고는 한다. 현재의  사람에게 과거에 못다  사랑을 퍼부으며 깊은 회한과 상처를 메꾸고자 애쓴다. 인연이나 환생같은 것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단걸 머리로는 알아도, 비어버린 마음을 채우기 위해 기꺼이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상처받고 헤집어진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약해, 작은 것에도 그토록 쉽게 흔들린다.


 <너의 모든 것3> 에서 딸이 낳은 손주가 자신의 죽은 아들의 환생이라 굳게 믿었던 엄마처럼, 이제 세상에 없는 연인이나 가족과 닮은 사람을 만나면 마치 믿지도 않던 신이 내게 준 기적같이 느껴지는 것처럼 오랜 시간 상실에 시달리며 살아온 인우 역시도 그렇다.


 현빈은 끝의 끝까지 기적같이 과거의 기억을 되찾거나 태희의 환생임을 입밖에 내지 않았지만, 인우는 분명히 그렇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실 태희와 현빈은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성별도 달랐고 성격도 달랐다. 도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던 태희와 달리 현빈은 그 나이대 남자애들처럼 이상한 장난도 치고, 인우를 만나고 헤어지긴 했지만 여자친구도 있었고, 털털한 성격으로 주변에 친구도 많았다. 현빈은 태희처럼 뉴질랜드에 가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다. 입맛도, 취향도 달랐을거고 애초에 살아온 세상 자체가 달랐을 테니 태희와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우는 현빈의 그 “작은” 우연 몇 개를 기점으로 인연이라는 환상을 더해가고, 끝내 잃어버렸던 제 사랑을 현빈에게 투영해 진실로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결말은 죽음 말고 다른 것으로 대체될  없다.


 “여자면 어쩌지, 그래도 다시 만나 사랑해야지….” 라는 나레이션에서 유추할  있듯 인우에게는 성별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린 제자를 태희의 환생이라고 믿고 그토록 애절히 사랑하다가 도피까지 떠난 것을 보면 나이도  문제가 아닌듯 싶다. 그럼에도 그들의 끝이 어찌저찌라도 살아가는 행복이 아닌 절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건 결국 인우가 사랑하는건 “태희, “환생했다고 믿고 있는 현빈 아니어서다. 인우의 사랑이 죽음으로 향하는 이유는 현빈이 남자여서도, 차별이 만연한 세상이어서도 아니고 결국 현빈의 존재가 인우의 상실을 온전히 채울수 없음에 있다. 그렇게 애절히 울고 애써도 사실은 알고 있으니까. 환생이 없다는 것도, 현빈은 태희가   없다는 것도.


 인우가 현빈이 태희의 환생이라고 믿는 과정에 이렇다  설득력이나, 환생임을 확실히 하는 장면이 부재한 것도 모든건 인우의 환상일 뿐이어서가 아닐까. 작은 것을 확대 해석하고, 어떻게든 잃어버린 사랑과 연관지어 끊어져버린 인연을 다시 이어가고 싶었던 인우의 처절한 랑이 만들어낸 착각. 그걸 환생이라는 판타지로 포장했지만, 들여다보면 그저 한 남자의 재앙과 같이 깊었던 사랑이 낳은 비극일 따름이다. 한 때는 인생의 종착지였던 사랑을 잃어버린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남자의 삶이자, 죽은 이는 살아돌아오는 일이 없다는 법을 끝내 소화시키지 못한 인생의 결말이다.




 그래서 이따금  영화를 꺼내  때면 사랑에 실패했던 어떤 남자와, 그런 남자를 무고히 사랑했던 소년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그냥 그렇게라도 잃어버린 사랑과 다시 만났다고 믿지 않으면 견딜  없었던 불쌍한 사람과, 우연히 그런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소년의 아름다워 보이지만 사실 비극적인 얘기.


 가장 화려했던 꽃이 가장 처참히 지듯,

 가장 순수하고 애절했던 사랑이 가장 비극적으로 진다.






내가 
행복했던 곳으로 가주세요.


/택시, 박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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