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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운 Oct 31. 2021

[셰임] 지독한 결핍의 끝

내가 볼 때 너는 정신적 불구야.





 어떤 영화는 이해하게 되는 순간 슬퍼진다.


 스무 살 무렵, 처음 <셰임>을 보았을 때는 참 단순한 감상이었다. “중독자 영환가?’. 서늘한 화면과 배우의 연기는 좋았으나, 아무하고나 몸을 섞고 다니며 정작 사랑하는 이와는 가까워지지 못하고 방황하는 브랜든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브랜든이 이상행동을 하는 건 동생 씨씨를 좋아하기 때문인건가, 억압된 욕구가 발산되는건가? 하고 의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몇 년이 흐른 후, 사랑과 사람에 닳고 닳은 후에 다시 보게 된 <셰임>은 단순한 섹스 중독자를 담은 영화가 아니라 가엾이 무너진 현대인의 초상이었다.






 브랜든은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이면 포르노를 보거나, 매춘부를 부르거나, 휴대폰이나 어플을 이용한 여러 성적인 행위들을 한다. 지하철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 (유부녀)를 보고 쫓아 내리기도 하고, 회사 컴퓨터에 있어서는 안 될 새 폴더가 가득하다. 그의 욕망은 확실하고 직선적이다. 우리는 항상 “관계는 꼭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해요.”라고 배웠는데 브랜든은 상대가 누구든 욕망만 해소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듯이 굴면서 정작 마음이 가고 저를 좋아해 주는 사람과는 관계하지 못한다. 사랑을 해야 관계를 할 수 있다고 배웠는데 이상한 모순이다. 처음에는 브랜든이 가진 불가해한 욕망이라고만 생각했다. 어느 날 불가해한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브랜든은 왜 관계 불가의 인간이 되었을까.



 브랜든의 삶에는 사람을 사랑하고 알아갈 만한 여유가 남아있지 않다. 그는 마음을 터놓을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없고, 언제나 출근과 퇴근만을 반복하는 무미건조한 생활에, 모두가 서로를 스쳐 지나갈 뿐인 현대의 삶에 지쳤다. 그 공허함을 채울 방법을 모르기에 그는 1차원적인 욕망만을 갈구하며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결핍 속에서 허덕인다. 그래서 브랜든은 섹스는 가능하지만 사랑은 불가능한 사람이다. 스스로의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노력과 감정 소모도 불가능한 사람, 그래서 언제나 인스턴트 같은 관계만을 가지며 억지로 생을 연명하는 존재다. 브랜든은 스스로가 만든 고독 속에 갇히고 차갑고 외로운 도시 위에서 서서히 마모되어 빈 껍데기만 남은 현대인의 망령이다.



회사 동료와 한 때를 보내는 브랜든.



 브랜든은 서로 호감이 있는 회사 동료 여성과의 관계를 맺기에는 결국 실패한다. 상호 소통하는 관계는 배려와 공감, 여유가 필요한데 브랜든에겐 그런 것들이 남아있지 않다. 상대가 원하는 모습을 연기를 하며 살아갈 수는 있지만 진짜 공허한, 무엇도 남지 않은 부끄러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불가하다. 애써 노력해봐도 몸을 섞을 줄은 알아도 마음을 섞을 줄은 모른다.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법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브랜든은 동료와의 관계가 깨어진 후 콜걸을 불러 관계를 가지며 순간의 공허함을 채우는 방법밖에는 모른다.


 브랜든이 지하철의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굳이 반지까지 낀 확고한 유부녀를 원했던 이유는 그녀가 단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확실한 “관계 불가”의 상대기 때문이다. 유부녀와 잠자리를 가진다 해도 그녀가 연인관계를 요구하거나, 그렇게 발전될 가능성이 없으니까. 브랜든은 그렇게 고독 안에서 단절을 택한다.

 사랑을 택할 용기도, 삶도 없기에.




술집에서 <뉴욕>을 부르는 씨씨.



 반대로 동생인 씨씨는 관계 중독이다. 사랑이 고파서 누구나 쫓아다니며 금세 사랑에 빠지고, 언제나 상처 받는다. 브랜든이 유부녀를 마음에 둔 게 그녀가 관계 불가의 상대여서였다면, 씨씨가 유부남과 만나는 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자신을 채우고 사랑해주기만 하면 된다는 결핍 때문이다. 유부남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사랑받을 수만 있다면 몸도 마음도 내어주는 씨씨, 그리고 타인과 감정적 교류 자체를 차단해버리는 브랜든은 상반된 듯 온전히 닮아있다. 모두 지독한 결핍의 산물이고, 잔혹한 자기 파괴로 삶을 연명한다.


씨씨가 브랜든의 회사 동료를 꼬셔 집으로 데려오는 씬에서 브랜든은 심각한 불안함을 드러내는데,  시퀀스에서 브랜든의 과거와 결핍을 엿볼  있다. 브랜든 또한 과거에는 씨씨처럼 관계 중독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브랜든은 씨씨와 같은 애정 결핍의 행동이 영혼을  상처 입힌다는  배웠고, 때문에 이제  도시로 상경한 과거의 자신과 같은 씨씨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에 몸서리친다. 브랜든이 도시에 올라와  곁에서 살고자 하는 씨씨를 거부하고 쳐내는 이유도, 결국 소파에서 서로 기대앉아 결핍의 원인이 되었을 과거를 이야기하는 일도 결국 그들의 근본적인 결핍이 다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그들은 서로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투영하는 존재기에 보고 있자면 고통스럽고, 안쓰럽고, 가여워서 끌어안아 주고 싶지만 선인장 같은  사람은 상처 받지 않도록 끌어안는 법을 모른다.





 씨씨나 브랜든 모두 근본적으로는 진심 어린 애정을 갈구하지만, 제대로 사랑받은 적도, 사랑하는 법도 모르기에 아무리 채워도 채울 수 없는 밑 빠진 독과 같은 생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사랑한다는 건 무거운 책임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연인이 되는 일도, 사랑하는 이와의 행위도 깊은 책임과 노력을 요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일종의 계약과 가깝다. 그건 내가 지금부터 너의 인생의 일부가 되고 사랑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하겠노라는 약속이기도 하고, 너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무언의 계약이기도 하다. 건강한 이들은 그 과정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지만, 오랜 시간 필사의 고독과 결핍을 씹어 온 이들에겐 그저 벅차기만 할 뿐이다. 오히려 사랑이나 연인이라는 관계에서 오는 책임과 구속이 숨 막히고, 하루하루 내 앞에 놓인 생을 씹어 삼키는 것조차도 벅차다.





 생을 살다 보니 어느 날은 씨씨였고, 어느 날은 브랜든이었다. 어떤 때는 작은 애정에 목말라 목숨을 걸어가며 술을 마시고 울고 불고 매달렸고, 점차 나이가 드니 더는 어떤 관계도 원하지 않게 됐다. 외로웠지만 사람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도 배웠다. 그러자 예전엔 묘한 근친 관계처럼만 보였던 브랜든과 씨씨 사이의 결핍된 마음이 보였고, 브랜든이 중독자로 살아가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어 서글펐다. 결국  또한 다를  없는 불가의 인간었음에.

 

 사랑은 지치고,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일은 피로하다. 타인의 단점마저 온전하게 사랑하고 포용할 만한 감정적 여유도, 깊게 소통할 이유도 더는 남아있지 않다. 어차피 깨질 텐데 노력하고 싶지 않고, 이제는 노력해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도 어떻게 하는지를 모르겠다. 지치고 어색하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단점부터 찾고, 관계를 깨야  이유부터 만들어 낸다. 언제나 도망갈 자리를 마련하고 지금이 아니라 차후를 생각한다. 내가 외롭고 힘들 , 원할 때만 결핍을 위로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의 병을 달리 고칠 방도가 없다. 아무 노력 없이 얻어지는 단순하고 직선적인 위로라면 모를까. (이를테면 내가 책임지고 돈과 노력을 들여 돌볼 필요는 없지만, 무릎에 앉혀놓고 원하는 순간에만 예뻐해  수는 있는 고양이 카페의 고양이라든가.)


 애정과 위로를 원하지만, 끝내 어떤 것도 얻지 못하는 브랜든의 모습이 나와  존재가 아님을 깨달을 때마다 마음에 고요한 노도가 몰아친다.





 때문에 영화의 엔딩을 보며 오래도록 바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랜든의 삶에 희망이 있기를.





너는 끊임없이 그 핑계를 찾고 있어.
내가 볼 때 너는 정신적 불구야.
완벽하게 자기를 이해해줄 사람을 찾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어.

/퀴즈쇼,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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