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 늪에 빠진 자.

말의 무게

by 핑크뚱
말이란 내뱉는 사람에겐 가볍게 느껴져도
듣는 사람에겐 큰 무게를 지닙니다.

- 윤문원 <말의 무게>


오늘 아침 제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일상이 전개됐습니다.


저는 밤사이 과음으로 코골이를 심하게 하는 간단 씨 옆에서 몇 시간을 뒤척이다 새벽녘에 살포시 잠들었다 깨어났습니다. 저에게 어둠이란 세상의 모든 밝음을 빼앗아 움켜쥔 난폭한 제왕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둠을 무서워합니다. 그런 어둠과 맞서며 쉽게 잠들지 못한 그 시간이 사무치게 외롭고 괴롭기까지 했습니다. 유독 시끄럽고 외로운 긴 밤을 보내며 제가 한 생각이 뭘까요. 웃기게도 주부의 벗을 수 없는 굴레 때문인지 아침밥 걱정을 했습니다. 나름 부지런히 냉장고 속을 채워 넣는다 해도 이게 대부분 하루 이틀의 끼니로 도둑맞은 상태처럼 변하는지라 직장인의 월요병 앓이처럼 주부도 빈 냉장고 앓이를 합니다. 그렇게 현재 빈곤한 저의 집 냉장고 상태에 아침을 뭘로 차려낼지 고민이 안 될 수 없었나 봅니다.

어릴 적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눈을 감고 양을 세었던 기억 다들 있으시죠. 그래서 저는 냉장고 속을 뒤적거리며 아침에 사용할 재료를 하나, 둘, 셋... 세며 까무룩 잠이 들었나 봅니다.


시간이란 참 거짓이 없습니다. 제가 일찍 잠에 빠졌던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었던 전혀 관심 없거든요. 그냥 그 시간만 되면 그날의 해를 '빵긋' 산 위로 올려주잖아요. 제발, 오늘만은 해가 늦게 떠올랐으면 하는 바람은 시간 앞에 촛불처럼 그냥 휙, 날려 버립니다.


간밤에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아침밥을 위해 냉장고를 열었습니다. 언제 사뒀던 걸까요. 염장되어 있어 유통기한이 제법 긴 쌈다시마가 있습니다. 금요일 저녁 저의 다이어트를 방해했던 등갈비 김치찜에서 김치만 제법 남아 있습니다. 조카 먹이고 싶어 한 장조림도 있고요. 우와, 이것만 해도 벌써 반찬이 세 가지가 되는 건가요. 좋습니다. 아침 밥상이 생각보다 푸짐할 것 같은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창고에 가 봅니다. 감자 두 알이 남아 있네요. 그럼 감자 한 알과 양파를 넣어 볶음으로 됐습니다. 아무거나 군은 김치찜이 싫다고 하니 된장찌개를 끓이겠습니다. 냉장고 속에 항상 준비되어 있는 육수를 찾아 꺼냈습니다. 두부도 찾고요. 아무거나 군은 된장찌개 속에 여러 가지 채소가 들어가면 싫어합니다. 정말 채소만 골라내 나중에는 채소찌개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과감히 채소는 빼고 두부와 육수에 시원하고 개원한 맛을 더하기 위해 무를 얇게 썰어 넣습니다. 이렇게 끓여 냉장고 속에 넣어 두고 필요한 만큼만 들어내 데워 먹이면 편합니다. 밤새 고민하고 걱정했던 아침이 뚝딱 제법 가짓수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왠지 신납니다. 저의 마법 같은 손으로 고민을 한방에 해결한 듯 뿌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하나, 둘 가져가 상 위에 상차림을 했습니다.


이제 간단 씨와 아무거나 군만 준비하면 됩니다. 아침 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알리니 바로 나왔습니다. 저는 여전히 부지런히 부엌과 식탁을 오가는 중입니다. 아무거나 군이 식탁에 앉기 전 제 핸드폰을 찾습니다. 그러더니 식탁에 앉아 제 핸드폰의 음성 파일을 찾아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이미 짐작하신 분도 있겠지만, 제가 얼마 전 다이어트 선언을 한 말을 녹음한 음성 파일입니다.

엄마는 이제 다이어트할 거야. 앞으로 사과랑 샐러드만 먹을 거야.
엄마는 이제 다이어트할 거야. 앞으로 사과랑 샐러드만 먹을 거야.

식탁에 앉은 간단 씨와 아무거나 군이 키득키득 웃고 난립니다. 아무거나 군이 간단 씨에게 묻습니다.

"아빠, 다시마랑 감자는 채소예요?"

"응"

"그럼 엄마는 다시마랑 감자만 먹을 수 있겠네요."

이런, 정말 녹음 파일을 없애야 합니다. 빛의 속도로 달려가 핸드폰을 낚아채 전원을 껐습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행동입니다. 이번에는 아무거나 군이 말로 반복합니다.

"엄마는 이제 다이어트할 거야. 앞으로 사과랑 샐러드만 먹을 거야."

전날 저는 숙면하지 못해 피곤했지만 아침밥을 준비하며 전능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무거나 군의 말이 저의 전능감을 한방에 안드로메다로 날려 버렸습니다. 그 뒤로 저는 웃기고 비참하고 짜증까지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갇혔습니다.


이래서 말은 함부로 내뱉지 말라는 선인들의 말씀이 있나 봅니다. 오늘 아침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 말의 무게가 얼마나 가벼웠는지요. 역시 아이는 부모의 스승이라고 하더니 아무거나 군을 통해 제 경솔한 발언이 부끄럽습니다. 반성합니다.

한편으로는 이 말로 인해 제가 빠진 다이어트 늪에서 언제쯤 구조될 수 있을까요. 나올 수 있기는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