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닮은 비빔만두

최대한 나를 숨겨 가족의 평화를 지키다.

by 핑크뚱

어린 시절 외할머님 댁 방 한 귀퉁이에 콩나물시루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빛을 완벽하게 차단하기 위해 시커먼 큰 천이 덮여 있었고 시루 밑에는 물항아리가 있어 수시로 물을 주었습니다. 특히 빛이 잠든 밤은 자다가도 일어나 물을 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콩나물이라는 게 신기하게도 물을 자주 먹지 못한 것은 영양가 없이 비쩍 키만 웃자라고, 빛을 많이 보면 콩나물 대가리가 초록빛을 띠며 줄기가 질겨져 식감이 완전 꽝이 됩니다.

제 어린 시절도 이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는 데 꼭 필요한 관심과 사랑이 턱없이 부족해 마음만 웃자란 애어른같아 아주 미미한 자극에도 상처받고 픽픽 쓰러졌습니다. 영양가가 영 없었다는 말이죠.


양파는 땅속에서 자라지만 뿌리가 아닌 줄기채소라고 합니다. 은근히 속고 있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우리는 갈색 겉껍질 안에 겹겹이 겹쳐있는 하얗고 동그란 줄기를 먹는 거죠. 양파를 찬찬히 보자면 면역력을 높여주고, 섬유질이 풍부해 소화를 증진시켜주기도 하고, 우리 몸의 염증도 가라앉히는 효과까지 효능이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특유의 매운맛 탓에 호감이 쭈르륵 미끄럼틀 타며 내려갑니다.

저도 처진 눈매 탓에 사람들이 순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아닙니다. 다들 속고 있는 거죠. 이런 저도 찬찬히 뜯어보면 천성이 부지런합니다. 일머리도 제법 있고요. 남의 의견도 잘 듣습니다. 그러니 독불장군은 못 됩니다. 이외에도 좋은 점이 제법 더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 모든 걸 한 번에 삽질해 묻어 버리는 생일맞이 폭죽같이 ‘펑’ 터집니다. 잘 참고 참았다 한순간 터진다는 거죠. 성격상 불편했던 감정을 차곡차곡 이불 개켜 쌓아 올리듯 마음 창고에 쌓아 뒀다 이불이 와르르 무너지듯 한 번에 감정을 쏟아 내 흘러넘치는 거죠. 참 지지리도 못났습니다.


당근은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뿌리채소입니다. 베타카로틴이 풍부하여 우리 몸에 흡수되면 비타민 A로 전환되어 시력, 면역기능, 피부 건강 등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특히 날것으로 먹어도 아삭한 식감과 달큼한 맛이 좋아 선호하는 사람이 많죠. 하지만 특유의 붉은색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특히 아이들이 싫어합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평이한 채소입니다.

순하디 순한 얼굴을 가졌으나 살짝 눈을 치켜뜨면 아무거나 군은 무서워 제 눈치를 무지 많이 봅니다. 억울합니다. 특별히 나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행동이라기보다는 특유의 외꺼풀에 가로로 길게 찢어진 눈일 뿐인데 말입니다. 아무거나 군이 다니는 학교의 도서관 도우미를 할 때도 옆에 있는 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기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아이들은 길게 늘어서 있는 걸 보고도 굳이 그쪽에 줄을 서더라고요. 둥글둥글 큰 눈과 가로로 길게 찌어진 눈. 눈매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이 있었나 봅니다. 괜찮다, 아니다 해도 솔직히 마음이 상했습니다. 친절로 따지자면 나무랄 데 없는데 말입니다.

사과는 봄에 화사하고 예쁜 꽃을 피워 벌들을 유혹해 수정합니다. 꽃이 열매가 되고 중심 열매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솎아냅니다. 그래야 중심 열매에 영양분이 집중될 수 있거든요. 말 그대로 될 놈만 남긴다는 말이죠. 그렇게 뜨거운 여름 태양을 견디고, 가을의 서늘한 바람을 품어 빨갛고 맛있는 사과로 탄생합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 비타민이 풍부해 피부미용에 좋고 새콤달콤함이 일품이라 앉은자리에서 한두 개는 거뜬히 깎아 먹을 수 있죠. 근데 은근히 사과가 알레르기를 유발해 못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안타깝습니다. 얼마나 맛있는데 말이죠. 제 옆지기인 간단 씨도 사과 알레르기 탓에 못 먹습니다. 덕분에 저는 혼자서 독차지해 양껏 먹어 좋습니다.

제 나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으며 자라 사람들과 제법 쉽게 친해지고 가까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깊이 있게 사귀지는 못합니다. 이게 정말 어렵고 힘듭니다.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제법 받았습니다. 아팠고, 서러워 눈물로 베갯잇을 적신 날이 많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깊이 사귀는데 알레르기 반응이 생겼습니다. 힘들다는 거죠.

이렇듯 다양한 제 모습을 숨기기 위해 보호색을 찾았다고나 할까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살짝 매콤함에 새콤달콤한 초고추장이 함께 버무려지면 제 단점을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하는 거죠. 그렇다고 자주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보호색이 평소의 제 모습이라 착각할 수 있거든요.

유난히 삶이 힘들다거나 제 마음의 아픈 곳만 콕콕 건드리는 날. 스멀스멀 본색이 드러나려 할 때쯤 감쪽같이 감추기 위해 사용하는 거죠. 그러면 상처는 덜 받고 평소의 제 모습보다 더 사랑받을 수도 있습니다.

비실비실한 콩나물, 톡 쏘는 매콤한 양파, 평범하지만 서늘하게 느껴지는 당근, 유독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과, 이 모두의 저를 한자리에 모아 마냥 입안에서 아삭아삭한 식감으로 좋게 기억될 수 있습니다.

이날도 바짝 날 선 저를 최대한 숨기기 위해 살짝 매콤하고 새콤달콤한 초고추장에 콩나물, 양파, 당근, 사과를 버무려 맛있는 비빔만두로 가정의 평화를 지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