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잿빛 같던 제 마음으로 봄이 스며든 날. 간단 씨가 아지랑이 영롱한 벚꽃길을 달려 저에게 왔습니다. 그날은 더 이상 평범한 하루가 아니게 됐고 화려한 연분홍 벚꽃은 제 인생을 위한 배경이 됐습니다.
누군가 간단 씨를 처음 만날 날을 묻는다면 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지인이 소개한 자리였습니다. 간단 씨는 어색해 어쩔 줄 몰라하며 눈동자의 초점은 길을 잃어 좀처럼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습니다. 또 손은 어찌나 꼼지락꼼지락 잠시도 쉼 없이 놀리던지 어설픔 그 자체였습니다.
간단 씨는 여태 제가 소개팅에서 만난 사람들과 확실히 달랐습니다. 대부분이 능력을 과하게 으스대 보기에 꼴사나울 때가 많았는데, 간단 씨는 엉뚱하게도 낮은 자세를 취한다고 할까요. 스스로 깎아내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고도의 계산된 행동인 것 같지만 오히려 어설픈 그 모습이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궁금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시작은 이런 궁금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간단 씨와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질 때마다 신기하게도 꼬리표처럼 궁금증이 따라붙어 있었거든요.
어린 시절 봄이면 들로 산으로 꽃 따러 다니며 놀았습니다. 먹을 게 부족했던 그 시절 봄꽃은 어린 제 입에 들어가는 달짝지근한 먹거리였다. 소꿉놀이 때도 꽃은 먹을 수 있는 것과 못 먹는 것으로 나뉘었으니깐요. 그러니 흐드러진 꽃에 마음을 빼앗겨 가던 길을 멈추고 오래, 자세히 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제 손이 자동으로 꽃으로 뻗으면 따서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참꽃, 감꽃, 찔레꽃, 아카시꽃 등 수많은 꽃은 제 입속 허전함을 감추기 위해 많이도 질겅질겅 씹었고, 기분이 우울할 때 달콤한 꿀을 쭈욱 쭈욱 빨아먹었습니다. 그런 제게 꽃은 먹는 것을 넘어 사랑이고 환희라는 것을 알게 해 준 게 간단 씨였습니다.
풋풋한 풋내가 진동하는 새순 같은 연애 시절. 따뜻하고 나른했던 사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출근해 오전 업무로 정신없던 그때 ‘카톡’ 문자 알림음이 울렸습니다. 문자를 확인하기 위해 창을 열자 흐드러진 벚꽃 길이 펼쳐졌습니다. 그 순간 화면 속 꽃잎이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제 마음으로 흩날리는 꽃비가 되어 날아들었습니다. 마치 청혼을 위해 준비된 꽃다발같이 느껴졌습니다. 하물며 그 길을 달려 저에게 오고 있다는 간단 씨의 짧은 메시지는 달달한 청혼의 속삭임일 수밖에요. 그때 제대로 눈에 콩깍지가 씌었던 겁니다.
그날이 간단 씨를 향했던 제 궁금증은 설렘으로 바뀌는 순간이 됐고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저의 두근두근 숨 가쁘게 나대는 심장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아 어리둥절해할 때, 정신을 차려 보니 우리는 나란히 예식장 양옆으로 나열한 꽃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참, 쉽게 부부가 됐고 가족이 되었습니다.
어제까지 앙상한 나뭇가지 틈에 한두 개의 꽃망울이 살짝 분홍을 띠더니 하룻밤 사이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저에게 활짝 웃어 줍니다. 어제까진 외롭고 쓸쓸함이었다면 오늘은 따뜻하고 설렘이 가득하게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새들조차 외로움이 전염될까 두려워 지친 날갯짓을 잠시도 쉬지 않고 지나던 앙상한 나무였는데 이 아침 새들이 앉아 벚꽃에 얼굴을 묻고 친한 척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너무 궁금합니다. 연애시절 저처럼 새들도 한순간 벚꽃에 콩까지가 씐 걸까요.
긴 코로나 시기를 지나 계절의 시작인 봄으로 성큼 발을 딛었습니다. 그런 우리들 앞에 어느 해 봄날보다 자신만만하고 화려함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전국의 모든 축제가 긴 잠에서 깨어나 드디어 말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곳도 전국적인 벚꽃 축제로 연일 들썩이고 있고요. 오랜만에 열리는 큰 행사라 굵은 땀방울을 연신 닦아 내는 상인들의 모습에 활기가 느껴집니다. 전혀 지치지 않고 얼굴 가득 큰 웃음 가득한 밝은 모습이 마치 축제의 흥분을 마음껏 즐기는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제 마음은 오락가락합니다. 찻길 양옆에 팝콘 터트리듯 터진 벚꽃을 매달고 늘어진 나무를 볼 때 애증의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제 마음이 벚꽃 앞에서 터지는 환호성을 스스로 막아 세웁니다. 매년 같은 자리, 비슷한 시기에 꽃 피우던 벚나무야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 나무를 보며 매 순간 달라지는 제 마음이 문제인 거죠. 지금 저는 상심과 혼란의 감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니 예쁘게 핀 벚꽃에 오만가지 제 마음의 색깔을 입혀 바라보고 있는 거죠. 누구도 아닌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간단 씨를 보는 제 마음도 지금의 벚꽃을 향한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나 봅니다. 간단 씨는 항상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우직한 모습으로 우리 가족을 지키고 있을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변함없는 건 융통성 없어 보이고 우직한 모습은 미련스럽게까지 보이니 말입니다. 이렇듯 제 마음대로 온갖 물감으로 마구잡이로 얼룩덜룩하게 간단 씨를 덧칠하고 있습니다. 연애 시절 마냥 설레었고 좋았던 간단 씨의 모습을요. 그러니 간단 씨를 바라보는 제 마음이 문제인 겁니다. 누구도 아닌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아무거나 군과 흐릿한 날씨도 감추지 못하는 예쁘게 핀 벚꽃 길을 달리며 이야기했습니다.
"벚꽃 너무 예뻐요."
"그렇지. 여기에 반짝 햇살 한 움큼 뿌려주면 어떨까?"
"그럼, 장관이죠."
맞습니다. 많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 움큼 정도면 충분합니다. 제 마음에 볕이 들 수 있는 조그마한 공간이면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힘이 생길 텐데요. 한 움큼이면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