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산책에 천부적인 재능 6화 下 편
* 6화 上편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여름에 푸요와 지내며 알게 된 것은 터그 놀이도 공놀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놀이를 원 보호자인 동료가 권하지 않았던 걸까 했는데, 후에 푸요 스스로 그 행동들에 큰 흥미를 못 느낀다는 것을 알았다. 푸요의 꼬리는 한 달이 넘도록 아래로 가 있었다. 산책하러 가도, 노즈 워크를 해도, 강아지를 만나도 그랬다. 분명 신난 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꼬리의 뿌리를 약간 들고 좌우로 살짝 흔들 뿐, 끝까지 추켜세우지는 않았다.
낙이 적은 개. 그래서 푸요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아침은 거른다. 한 시간 좀 안 되는 오전 산책을 마쳐도 밥을 안 먹는 날이 많다. 밥그릇은 채워두고 출근한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푸요는 침대에 있는 것 같았다. 퇴근하고 오면 침실 문에서 쪼르르 달려 나와 맞이한다. 여전히 꼬리를 세우진 않는다. 밥그릇이 그대로 있는 경우가 많다. 해가 기울면 목줄을 차고 저녁 산책을 나간다. 귀가 후 발을 닦는 동안 물을 마시고, 그제야 밥그릇을 비워낸다. 잘 시간이 되면 침대에 같이 눕는다.
주말에는 조금 늦은 아침을 시작한다. 푸요는 내가 일어날 때까지 침대에 몸을 포개고 있는다. 같이 지낸 날이 길어지자, 먼저 잠에서 깨어 침대 밖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일도 늘었다. 산책 하자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외출 후 돌아와서 늦은 식사를 하고 같이 낮잠에 든다. 일어나서 간식을 좀 먹고, 곧 저녁 산책하러 가자며 몇 분 쇠는 소리로 울다, 다시 잠에 든다. 그게 전부다. 길가의 냄새를 길게 맞지도 않는다. 그저 빠르게, 오래 걸으려고 했고, 나는 그 속도와 시간에 맞추려 무릎 보호대를 찼다.
그 개가 원하는 것, 단지 산책, 그것만을 아주 열심히 한 것 같다. 출근 전에 이르게 일어나지 못해 오전 산책을 못 할 것 같은 날에는 당일 반차를 내기도 했다. 당일 반차를 낼 수 없는 날에는 산책 시터를 불렀다. 한 달이 넘도록 같이 지내다 보니 오전 산책을 어쩌다 빼 먹는다고 해서 아주 큰 일이 나는 것은 아니란 것을 알았고, 부랴부랴 퇴근해 저녁 산책을 길게 하는 걸로 사죄했다.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길에 앉아서 버티는 푸요를 보고, 지금 자정이 넘었으니 그만하자고 넋두리했던 기억이 난다. 만족스러운 산책을 하기 전에는 좀처럼 먹지 않는 개의 밥그릇에 사료를 부어 주고 노심초사 지켜보다, 결국 안 먹겠다는 의사를 확인하고 좌절했던 오전도. 퇴근하고 돌아와 그대로인 밥그릇을 보며 그의 앞발을 붙잡고 사정사정했던 저녁도. 그 가운데 내가 가진 것들로는 도저히 만족을 줄 수 없을 것 같은 심정이 있었다. 주말이 오면 푸요를 다른 집으로 데려다주면서, 그 마음까지 함께 넘겼던 것 같다.
# 2023.06.24.
산책 중 만난 두 갈래의 길 중에, 꼭 내가 고른 길의 반대편으로 가야겠다고 굳건히 버티고 선 개에게.
지금 밖은 너무 덥고, 너는 오늘 병원에 가야 해서 물 한 모금 못 먹어. 그러니까 똥 싸고 쉬 했으면 들어가서 에어컨 나오는 집에 있자니까 왜 집엘 안 간다고 버텨, 이 개야.
점심에 푸요의 건강 검진 일정이 예약되어 있어서 오전 산책을 비교적 짧게 해야 했던 무더운 토요일 오전. 돌아오는 길에 홀로 처절히 외친 말이다.
푸요, 너는 나한테 관심을 바라고 껴안아지기를 바라면서도 1분 이상 가깝게 맞대고 있기는 싫어하지.
딱 30센티만큼 멀어져 앉는 개. 엎드려서 손만 뻗어 발을 만지면, 또 꼬리를 흔드는 개. 푸요에게는 원하는 애정의 형태가 명확하게 있다. 그건 귀엽지만은 않다.
개의 욕구가 내 인내심보다 앞설 때가 있다. 그 개가 빨리 걷느라 줄에 목이 막혀 헉헉거리는 소리, 더 빨리, 더 멀리 가고 싶어서 낑낑대는 소리를 낼 때. 인간이 멈춰 서 있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네발로 무지하게 빨리 걸어가 버릴 때. 그럴 때 미워진다. ¹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싫은 것이다. 읽던 책도 두고, 그 문장들을 다 뒤로 하고 보태는 걸음을 저 혼자 신나서 앞질러 나가면, 밉다. 저 혼자 신나서 즐기기 바쁜 그 꼬리. 한 달여 만에 드디어 올라간 저 꼬리.
그런데 푸요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 인간이 집에 돌아오기를 오래도록 기다렸는데, 귀가했을 때 어쩐지 내가 그 마음에 충분히 화답해 주지 못하면 밥을 먹지 않으니까.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물도 안 마셨다.
¹ 사실 푸요에게 충분한 라포를 형성하지 못한 인간의 기분을 헤아려 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주 보호자를 두고, 잠깐 함께 살게 된 인간의 속사정 따위를 푸요가 알게 뭔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에세이 전체가 다 웃기는 소리에 불과하다.
푸요에게 좋은 임시 보호자였는가 되묻는다면,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적어도 건강 향상의 면에서는 그랬다. 약을 먹여 간 수치를 낮추었고, 편식을 조금이나마 고쳤고, 치아 상태를 호전시켰다. 하지만 좋은 친구가 되지는 못했다. 고백하건대 그와 함께 지냈던 시간을 즐길 수 없었다. 때때로 나의 돌봄을 개가 못마땅해하는 듯한 느낌도, 개의 어떤 결핍을 완전히 채워 줄 수는 없는데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는 것도, 이 모든 근심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초월할 수 없다는 것도 싫었다. 버티고 있었지만. 너끈히 버티고 있었지만.
개를 키운다는 것은, 개뿐만 아니라 다른 무엇이든, 일정 정도 버텨내기를 필연적으로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 대상이 아무리 예뻐도 사시사철 즐겁기만 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버텼던 만큼 푸요도 버텨내야 했을 시간이었다고 생각하면 무연(憮然)해진다. 주말에 지내던 집에서 데려오고 난 후 동네 카페에 푸요를 데리고 가려고 준비하는데, 얼른 나가자는 뜻으로 헥헥거리며 안절부절못하는 듯한 몸짓을 보고 고개를 저었던 기억 속 장면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새 보금자리를 만들려고 개를 두고 떠났던 동료를 생각한다. 하나의 집으로는 모자라서 세 집이 붙었는데도, 푸요를 완전하게 채울 수 없었던 상황을 지켜보며 타지에서 적응해야 했던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² 세 집을 오가게 해서 더욱 마음이 쓰였을 것이다. 몇 달을 온전하게 돌보아 줄 이에게 맡길 수 있었다면, 혹은 애초부터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아무에게도 터놓지 못한 채 홀로 곱씹었을지도 모르겠다.
² 동료는 푸요의 돌봄 비용을 내면서, 나를 포함한 임시 보호자들과 연락하고 상황을 전달받았다.
그런데 그런 고민의 한가운데 빠지니 어떤 조건이었다면 완벽했을 듯한데, 라는 생각이 도로 무의미해진다. 부족한 여건이어도 같이 살기로 했다는 이유만으로 같이 살 수 있어야 한다. 서로가 있어서 삶이 월등히 윤택해지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가 부재하면 지금보다 못나게 되기에. 네가 없는 삶을 사느니 같이 살 때의 궂음을 인정하고 그 현실에 발을 디뎌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상상, 그런 게 필요하다. 나는 그렇게 개랑 같이 살기 시작했으니까.
개와 살지 않았으면, 논문을 더 빨리 완성해서 졸업도 더 이르게 했을 것이고 –적어도 1년은 더 이르게 했을 것이다- 배우던 취미, 운동 등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며 어느 방면에서는 더 다채로운 삶을 살았을 테다. 찬을 임시 보호하면서 병원 다닐 때, 펫택시의 어느 기사님이 이렇게 충고한 적 있었다. 삼십 대에 개를 키우지 말라고. 그 나이는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많은 시기여서 개를 보는 것이 힘들뿐더러, 시간이 아까울 거라고 말이다. 그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찬과 살지 않았다면 한 십 년의 세월이 아주 유한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삼십 대를 어떤 생명에게 투여하는 방식으로 가장 가치 있게 만드는 경험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푸요가 몇 달을 임시 보호자들과 사는 동안 동료는 타지에서 자리를 잡았고, 다시 개를 데리러 왔다. 나는 그 순간에 있지 못했는데 전해 듣기로는 선글라스를 쓰고 온 동료를 잠시간 못 알아보고 짖었다가, 그가 얼굴을 드러내니 화들짝 놀라서 뛰어 올랐다고 했다. 아마, 그때도 히융히융 울지 않았을까.
푸요의 이야기를 에세이로 적도록 허락해 준 동료에게 감사의 인사를 덧붙이며, 그가 더 더운 곳에서 그해 여름을 이겨내는 동안 나의 도움이 얼마나 볼품없었는지 이제 와 드러내는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